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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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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는 부장에 취임하여 비교적 온건노선으로 중정을 운영하였다.

그동안 정보부가 해온 행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미지의 쇄신이 필요하고, 불교도인 그의 성품이 극렬주의가 아니었다. 또 박정희가 밀어붙이는 강경노선이 지속되다가는 자칫 국가적인 파국에 직면하게 될지 모른다고 우려하였을 것이다.

그의 중정부장 재직시는 내외적으로 유신의 억압체제가 스스로의 하중(荷重)을 견디지 못해 삐거덕거리던 때였다. 체제의 유지는 긴급조치 9호 등 억압조치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그를 중정부장으로 임명한 박 대통령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어떤 면을 보고 임명했는지 알 길은 없으나, 김재규 취임 이후 일련의 유화 제스처가 나타났다.

79년 1월 시인 김지하의 면회 허용, 김철 통일사회당고문의 석방(3월 31일), 민주구국헌장 지지서명운동 관련자들의 석방(5월 10일), 긴급조치 9호위반 복역수 중 신부, 목사, 학생 등 14명의 석방(7월 17일), 시인 고은의 석방(10월 29일), 민주구국선언 관련자 11명의 석방(12월 31일)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런 조치에 김재규의 역할이 어느 정도 미쳤는지는 알길이 없다. 그러나 전혀 관련이 없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는 가족들에게 "다른 정보부장들이 사람을 잡아들이는 부장이었다면, 나는 놓아주는 부장"이라고 자부했다고 한다. (주석 10)


다른 기록도 살펴보자.

서슬 퍼런 긴급조치 9호로 재야 활동이 극히 위축됐던 유신 말기에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던 지식인들은 김재규 부장의 온건 노선을 감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송기숙 전남대 국문과 교수는 1978년도에 소위 「교육지표 사건」에 연루돼 동료 교수 11명과 함께 남산의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송기숙 교수는 "죽을 고문을 당할 각오를 했는데, 수사관이 상부지시라며 의외로 부드럽게 조서를 받더니 그냥 풀어 줬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한동안 그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으나 10ㆍ26이 나자 "아하 싶었다."고 말했다. (주석 11)


김재규의 손위 동서로 당시 중장의 일본 책임자(대외직함은 주일공사)였으나 10ㆍ26 직후 미국으로 피신했던 최세현 씨의 증언.

김재규의 거사는 우발적인 것인가 계획적인 것인가, 단정할 순 없지만 다분히 계획적이었다.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은 78년 내가 고려대 교수로 있을 때 김상협 씨, 김재규, 나 셋이서 점심을 먹던 자리였다. 김상협 씨와 내가 구속한 학생들 좀 석방하라고 했더니 김재규가 하는 말이 비장한 표정으로 "조금만 기다려라" 라고 했다. 조금만이라는 게 일주일이 될 수도 있고 일 년이 될 수도 있는 것인데 그때 벌써 김재규는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었다고 본다. (주석 12)
 
젊은 날의 추기경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부터 시작된 김수환 추기경과 인권변호사들의 동지적 관계는 70~8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왼쪽부터 송건호, 김수환, 황인철, 홍성우.
▲ 젊은 날의 추기경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부터 시작된 김수환 추기경과 인권변호사들의 동지적 관계는 70~8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왼쪽부터 송건호, 김수환, 황인철, 홍성우.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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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체제 반대운동에 천주교 신부들이 많았다. 윤형중 신부와 지학순 주교가 1977년 3월 22일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고 구속되었다. 천주교의 반발이 거세게 전개되고 김수환 추기경이 김재규 부장의 면담 의사를 전해왔다.

김수환 추기경은 두 신부의 석방을 위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 왔다. 당시 정보부장 정도의 직위라면 추기경의 방문을 받을 수 있겠으나, 겸손했던 김재규 부장은 예의상 자기가 방문하는 것이 옳다며 김수환 추기경을 예방하고 시국 전반에 대하여 수습책을 의논했다. 그후에도 김재규 부장은 김수환 추기경을 몇 차례 만나면서 구속 신부들을 석방하고, 오히려 김 추기경을 통하여 박정희 대통령에게 긴급조치를 해제토록 건의해 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주석 13)
 
김대중의 촛불시위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고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김대중은 2년 10개월 동안 감옥에 갇힌다.
▲ 김대중의 촛불시위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고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김대중은 2년 10개월 동안 감옥에 갇힌다.
ⓒ 김대중평화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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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는 3ㆍ1구국선언사건으로 군사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진주교도소에 복역중이던 전 신민당 대통령후보 김대중을 서울대병원으로 이송하여 치료를 받도록 박 대통령에게 건의한 것으로 알려진다. 또 김상협 고려대 총장의 방문을 받고, 구속학생들의 석방을 위해 박찬헌 문교부 장관을 만나 제적학생들의 복적과 구속학생들의 석방의 뜻을 은밀히 건네기도 했다고 한다.

 
주석
10> 김대곤, 앞의 책, 57쪽.
11> 『주간중앙』, 1993년 10월 25일자.
12> 최세현,「나는 미국으로부터 어떤 언질도 받지 않았다」,『말』, 1993년 11월호.
13> 오성현, 앞의 책, 13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박정희를 쏘다, 김재규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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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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