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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통일운동가 고 김낙중 선생.
 평화통일운동가 고 김낙중 선생.
ⓒ 오마이뉴스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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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통일주의자··운동가 김낙중(金洛中; 1931-2020) 선생이 지난 7월 29일 향년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내가 김낙중 선생을 알게 된 것은 그의 저서 <인류문명사의 전환을 위하여>(2013)를 통해서다.

얼핏 민중당을 창당한 사람이라는 걸 들어본 것 같기도 했지만, 선명히 기억에 남지는 않았다. 선생은 이 책의 서문에서 "제가 마지막으로 이 세상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들을 적은 것이 이 책입니다. 즉 이 책은 세상에 남기는 저의 '유서'입니다"라고 했다. 유서처럼 남긴 책이기에 결코 소홀히 읽고 넘길 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기가 절실했던 만큼 내용도 맘에 들었다.
 
김낙중 선생께서 유언처럼 남긴 저서가 <인류무녕사의 전환을 위하여>(2013)이다.
▲ <인류문명사의 전환을 위하여>(2013) 표지와 내면의 저자 사진과 약력 김낙중 선생께서 유언처럼 남긴 저서가 <인류무녕사의 전환을 위하여>(2013)이다.
ⓒ 김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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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중 선생 일생 삶의 여정은 <인류문명사의 전환을 위하여> 서문에 잘 집약되어 있기에, 좀 길지만 저자의 회고를 그대로 인용한다.
 
"내가 태어나던 1931년, 일제는 그들이 '만주사변'이라 부르는 중국침략을 시작했고, 초등학교 시절에 '지나사변'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저는 온통 전쟁 냄세를 풍기는 세상 속에서 성장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1945년 일제가 물러가고 8․15를 맞았으나 나라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미․소의 점령지가 되었고, 제가 20세 되던 1950년에 남과 북은 소련탱크와 미국 비행기를 가지고 '6․25전쟁'이라는 남북간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였습니다.

당시 젊은이들은 동족상잔의 전쟁 틈바귀에서 인민군으로 또는 국군으로 나가서 형제들에 대한 살인행위를 하도록 강요당했습니다. 그래서 농촌에 살던 저의 초등학교 동창생들은 대부분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인민군 편에 가서 총을 들었고, 도시에 살던 저의 중고등학교 동창생들은 거의 모두 '학도병' 또는 '징집'으로 국군 편에서 총을 들고 싸움질을 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저의 동창생들의 대부분은 어느 쪽인지에 서서 총질을 하다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중략) 1953년 7월 27일에 '6․25전쟁'이 겨우 휴전이 성립된 상태에서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은 학생들을 동원해서 "휴전반대 북진통일"을 외치는 가두시위를 하게 했습니다. …(중략) 당연히 나도 가두시위를 해야 할 입장이었지만(당시 김낙중 선생은 서울대 사회학과 학생신분 이었음 - 기자 말), 6․25전쟁으로 이미 수백만 명이 살상을 당하여 매일 젊은이들이 부상당하거나 시체가 되어 부산으로 후송되는 것을 보면서 부산에서 생활하던 저는 "휴전반대 북진통일"을 외치는 가두시위에 도저히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눈물'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이런 세상은 제가 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전쟁반대 평화통일"을 외치며 부산 광복동 거리에서 단독 시위를 하며 살아왔습니다. 그 후 저는 한결같이 "사람은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서로 용납하며 함께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59년의 세월을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저는 북측에서 한 번, 남측에서 네 번 "너는 죽여 없애야 할 원수들 편의 간첩"이라며 온갖 고문과 죽임을 요구당하며 수없는 죽음의 고비를 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동족 간의 살인적 싸움질은 계속되고 있으니 어떻게 눈을 감을 수가 있겠습니까?" (김낙중, 2013, pp.7-8)

그러고 7년이 지나도 남북분단은 그 끝이 보이질 않는 숙제로 남겨진 채로 선생은 한 많은(눈물 마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선생은 평생 참 잔인한 세월을 살았고, 그 역사의 잔혹성에 한 몸으로 부대끼고 저항했다. 나는 앎이 곧 삶이 된 그의 날선 '정신성'을 높이 평가한다. 일부 보수 측은 여전히 부정적이지만, 내가 보기에 선생은 평화통일 '운동가'이기도 하지만 평화주의자·사상가로 살아온 '문명비평가'였다. 왜냐하면 선생께서는 <인류문명사의 전환을 위하여>를 기필한 것만으로도 문명비평가 혹은 사상가로 그 면모를 여실히 입증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서양문명이 동서냉전 대립을 나타내고 있는 Corea(코리아) 반도는 공교롭게도 지구상에서 가장 큰 육지인 '유라시아대륙'과 가장 큰 바다인 '태평양'이 마주쳐 파도치는 곳임"을 상기시키면서, "한반도에서 남북의 갈등양상은 천지 대자연이 음양의 갈등․조화 속에 운행된다는 원리를 되짚게 한다"고 했다. 해서 우리 Corea 사람들은 음양의 상생을 통해 '생명문화'를 창조하느냐 혹은 음양의 상극으로 폭발하고 마느냐는 것을 결정해야 할 민족사적 나아가 세계사적인 과제 앞에 세워져 있다는 게다.

해서, 김낙중 선생은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민족통일 문제는 단순하게 Corea 사람들이 자신들의 '민족통일'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문명사적 변화를 위하여 전 세계 인류가 평화롭게 함께 사는 '한겨레'를 이룩하려는 세계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한 문제로 보아야 한다는 걸 강조했다. 과연 지금 우리에게 그런 문명사적인 안목이 있는가? 선생은 우리 Corea 사람들은 지구에서 유일하게 지난 수천 년간 지구촌에서 형성된 모든 문화들, 즉 인도문화, 중국문화, 그리고 지중해문화를 우리의(특히, 고려조 이후) 역사에서 모두 흡수, 체험하며 살아온 데에 주목한다.

선생은 Corea에서 부족단계를 넘어 민족단위가 제대로 형성된 것은 대략 1000년 전부터인데, 우리민족 특히, 남과 북의 국가 지배층 사람들은 '겨레' 구성원 간의 '운명 공동체'적 유대의식을 상실한 게 문제라 했다. 말하자면 남과 북 모두 정권유지의 방편으로 분단을 도구화한 지배층의 권력 속성이 문제라는 게다. 하여 우리에게 "평화통일 문제도 그 방법을 몰라서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평화통일이 진정으로 필요한 민중들에게 강대국을 업고 돈과 권세를 쥔 권력자들의 욕망을 과감히 뿌리칠 수 있는 내면적 힘이 없기 때문"이라 했다.

선생께서는 "저, 김낙중 개인의 삶이 한민족이라는 민족운명과 별개일 수 없었듯이, Corea라는 한 개 민족의 삶도 '한겨레'라는 '전 인류 공동체'의 삶과 별개일 수 없다고 확신한다"고 했다. 선생은 "1945년의 8․15는 결코 '민족 해방의 날이 아니다. 그날은 분명히 미․소에 의한 '민족분단의 날'이 되고 만 것이 아닌가?"라고 질책한다. 선생은 이 책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조선왕국이 망한 것은 청나라에 의지해서 나라를 유지하려고 했던 어리석음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남과 북의 동포들이 평화적 공존의 길을 택하자면, 우선 스스로가 외세의존의 사대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강대국이란 동서고금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자신의 '국가이익'(national interests)을 우선하는 정책을 추구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민족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대주의의 꿈에서 깨어, 그 어떤 외세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운명은 오직 우리 민족 자신이 결정할 수 있도록 남과 북이 모두 '민족자주'의 길을 가야한다는 민족적 자각이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겠다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이 있어야만 하겠습니다(p.207).

 
 
선생은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이 사상과 이념의 차이를 넘어 민족적 화해를 추구하기 위해 적극적인 평화운동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선생의 유언에 따라 우리는 지금 민족자주와 한반도평화를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어 봐야 한다. 끝으로, 김태철 시인이 '평화주의자 김낙중 선생의 영전에 바치는 <탐루(探淚)>'라는 시를 인용한다. 김낙중 선생님! 평화의 세상에서 부디 편히 쉬소서.
 
하얀 소복(素服) 입고
등불 하나 든 채
화약내 나는 광복동 거리를 헤매고 다니며
눈물 가진 사람 찾던
가슴 뜨겁던 청년이 여기 누었습니다.

온 생
부슬부슬 보슬비 내리던 임진강의 샛강을
거슬러 오르는 심정으로
북에 가 사형선고를 당하면 인민처럼 웃고
남으로 와 사형선고를 당하면 시민처럼 웃던
쓰디쓴 고문으로 살다 죽고
고문보다 더 지독한 평화로 끝내 다시 살아난
아름다운 자유인이 여기 묻혔습니다.

…(중략)
그래서 지금
임진강 샛강 흘러 한강과 만나서
조국의 강, 조강(祖江)으로 흘러들고
조강의 물살들이 고개 숙여 조문을 오고
거슬러 오르던 물거품들은
남과 북이 제발 사이좋게 소복하라고
아름답고 지치지 않을 개망초 꽃들이
백두에서 한라까지 모두 달려들어
향을 지필 것입니다.
이윽고

하얀 옷 입고
손에 손 잡고
꽃다지 펼쳐진 통일 거리
눈물 가진 사람 찾던
가슴 뜨겁던 평화의 스승 여기 누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사진은 적절히 배치해주세요.


태그:#김낙중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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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로 태어나 지금은 명예교수로 그냥 읽고 쓰기와 산책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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