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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해냄 출판) 책표지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해냄 출판) 책표지
ⓒ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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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결이 다르고 향기가 있다. 서로의 결과 향기가 뒤섞여 또 다른 결을 만들고 다른 향기를 피어 올리는 게 만남이다. 사람이 걸어온 길도 그렇다. 비슷한 건 있어도 똑같은 길은 없다. 끊임없는 자기 선택의 반복으로 빚어낸 세상에 하나뿐인 시공간이다. 시시각각 길이 겹치면서 또 다른 길을 내고 누군가는 그 길을 지킨다.

김탁환 소설가가 최근 펴낸 에세이집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해냄 풀판)는 반세기 동안 다른 길을 걸어온 50대, 두 인생의 우연적인 만남을 장편 작가 특유의 느릿하고 긴 필치로 써내려간 책이다. 만남이 찰나에 그치지 않고 1년, 2년 지속됐던 것은 사람의 결과 향기, 그리고 걸어온 길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 중 닮은 것을 찾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결] (주)미실란 발아현미 98%의 비결

첫 만남은 2018년 3월 1일이었다. 저자가 대학동기들과 전남 구례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상경하는 길에 우연히 곡성에 가서 점심을 먹은 식당 '밥cafe 飯(반)하다'에서였다. 폐교를 리모델링한 공간이었다.

"밥은 구수했고 반찬은 정갈했다. 밥알 하나하나가 탱탱하게 씹히며 다른 맛을 내고 다른 방향으로 튀었다. 반백년을 밥상머리에 앉았지만 이런 밥은 처음이었다. 가게 주인과 인사를 나눴다. 첫인상이 딱 마음 좋은 시골 농부였다."(책 29쪽)

농업회사법인 '미실란'(美實蘭) 이동현 대표였다. 밥맛이 달랐던 비결은 도정을 막 마친 쌀의 '결'에 있었다. 이 대표가 가진 유기농 발아현미 가공 기술이었다. 현미는 수확한 벼를 건조, 탈곡한 뒤 왕겨를 벗긴 쌀이다. 백미처럼 매끈하게 도정하지 않고 적정한 수분과 온도를 공급해서 1mm~5mm 정도 싹을 틔우는, 특허까지 받은 기술이었다.

현미 발아율이 50% 이하면 '죽은 쌀'이다. 싹에 에너지와 영양소가 농축돼 있기 때문이다. 이 대표의 현미 발아율은 98%. 이는 가공 기술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앙기 대신 무려 278개에 달하는 품종의 벼를 손으로 심고, 농약을 뿌리는 대신 왕우렁이를 논에 집어넣으며, 콤바인 대신 낫 들고 벼를 베면서 친환경으로 키운 우직함으로 나온 싹이다.

서울 사는 도시 소설가인 저자가 밥 한 끼 먹었던 인연을 이어가면서 곡성 농부의 모내기와 추수 작업까지 거들었던 것도 흙과 쌀, 생명의 가치를 쫓아온 삶에 각인된 결이었다. 이는 '열두 마리 고래의 사랑 이야기' '불멸의 이순신' 등 23년 동안 글 감옥에 갇혀 장편소설만 29편을 쓴 작가의 삶과는 달랐지만, 우직함은 닮았다.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해냄 출판) 107쪽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해냄 출판) 107쪽
ⓒ 임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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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향기]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아름답지요?"

이 대표와 함께 곡성을 두루 다닌 저자가 자주 들었다는 말이다. 섬진강 뿅뿅다리 위에 함께 드러누워 물소리를 들을 때도 그랬고, 맨발로 논에 들어가 꺼내든 새끼손톱만한 왕우렁이를 보여주면서도 이 대표는 이 질문을 던졌다고 했다. 50대 농부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운 질문이지만, 노동에 지치지 않고 아름다움을 추구했기에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이 대표가 가장 아름답게 여기는 곳은 미실란 강의실 나무 바닥이었다.

"주머니에서 몽당초를 꺼내 힘껏 칠한 후 마른 헝겊을 양손으로 모아 쥐고 무릎을 꿇고서 빠닥빠닥 나무 바닥을 닦으면 맨들맨들 어찌나 빛이 났는지 모릅니다. 폐교로 들어가서 미실란을 꾸릴 때, 다른 건 다 바꿔도 교실 바닥은 그대로 두라고 했죠. 아름다움을 지키고 싶으니까요."(책 47쪽. 이 대표 말 인용)

이 책 제목은 이 대표의 입에서 나왔다. 저자는 이 대표와 그의 이야기 속에서 더 큰 아름다움을 찾았다. "나무를 숲 사람, 벼를 논 사람"으로 부르고, 논으로 들어가 어린 모의 잎귀를 쓰다듬으며 "잘 잤어? 컨디션은 어때?"라고 묻는 어이없는 농부. 왕우렁이와 물뱀, 참새와도 눈을 맞추며 몸의 상태를 묻고 양해를 구하는 미생물 과학자의 영혼에 반했다.

저자는 이 모습을 보면서 개화기 이전을 배경으로 소설을 쓸 때의 자신을 반추하기도 한다.

"나 역시 죽은 자들과 함께, 마음을 주고받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랜 시간을 지내왔다.(중략) 정도전이든 이순신이든 황진이든, 3년 혹은 그 이상을 함께 지내다 보면, 그들이 내 고민을 가장 잘 이해하는 친구나 인생의 선배처럼 느껴진다."(책 91쪽)

땅에 매혹된 농부에게서 풍기는 사람의 향기는 이야기에 매혹된 소설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연에게 말을 거는 이 대표의 모습에서 죽은 자와 대화를 나누는 자신을 발견했다. 저자는 과거와 현재는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며, 모든 생명체 역시 형태만 다를 뿐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웃이며 친구라는 공감을 잔잔하게 서술했다.

이런 이 대표는 곡성 토박이가 아니었다. 전남 고흥군 동강면 오월리 벽계마을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는데, 저수지 공사로 고향은 수몰이 됐다. 저자는 교실 나무 바닥을 지키듯이 자기 기억 속에 저장된 고향 땅의 마을공동체를 곡성에서 되살리려는 또 다른 실험에 매료됐다. 이는 이 대표 대학후배였던 부인 (주)미실란 남근숙 이사가 앞장섰다.

술이 없고, 공연자 숙련도에 대한 평가가 없으며, 참가자의 지위나 나이에 차등을 두지 않고 경계가 없이 열리는 이른바 '삼무 음악회'이다. 들녘을 배경으로 매년 1~2번 열리는 음악회는 외지인과 곡성 주민들이 어우러지는 공동체문화가 되고 있다. 또 폐교에서는 이담, 김근희 작가의 그림전 등을 개최하고, 2018년 가을부터는 작은 영화제도 연다.

"아름답지요?"

이 대표가 굳이 답변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이 질문을 뜬금없이 던진 게 아니었다. 그가 운영하는 회사 '미실란'(美實蘭)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희망의 열매를 꽃피우는 곳'이라는 뜻이다.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해냄 출판) 198쪽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해냄 출판) 198쪽
ⓒ 임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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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길] 생명을 살리는 거대한 실험실

마지막으로 저자를 곡성으로 이끈 건 이 씨가 걸어온 고집스러운 길이었다. 1988년 순천대학교 농생물학과 입학, 1992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농생물학과 입학, 2000년 문부성 장학생으로 선발돼 일본 규슈 대학교 생물자원환경과학과 박사과정 입학, 2003년 박사 학위 받고 귀국, 2004년 (주)픽슨바이오 창업, 2005년 농업회사법인 (주)미실란 창업.

'박사농부' '농부과학자'로 불리는 이 대표의 약력만으로는 감흥이 없다. 저자는 장편 작가 특유의 집요함으로 이 대표 고향을 답사하고, 함께 논에 들어가 흙과 벼, 미생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약력에 살과 뼈를 붙였다. 학생운동을 중단할 때의 번민, 석사 때 보인 경주마 같은 열정, 서울대 박사과정에 진학했다가 그만 둘 때의 인간적 고뇌…….

결국 이 대표가 결단한 길은 실험실의 쥐를 끊임없이 죽이면서 성과를 내야하는 독소 연구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꺼리는 동물의 똥에서 미생물을 추출해서 생명을 살리는 친환경 연구였다. 그는 일본 규슈 대학교에서 3년 동안 박사학위 논문 외에 일곱 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지도교수가 일본에 남아줄 것을 간청했지만, 귀국했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누구나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결과를 고스란히 감내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실패하기 위한 길을 선택하진 않는다. 그가 귀국을 서두르는 것은 미생물 연구자로 성공하기 위해서였다."(책 116쪽)

이 대표는 또 다른 길을 선택한다. 언제 교수가 될까 마음 졸이며 세월을 보내기 싫었단다. "땅을 살리고 농작물을 살리고 농부를 살리고 나아가 우리나라 국민들 살리는 미생물 연구"를 바탕으로 병충해를 막을 안전하고 저렴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픽슨바이오'란 회사를 설립했지만 회사 경영 경험 부족 등의 이유로 실패했다.

곡성의 '미실란'은 그 다음에 선택한 길이었다. 우리나라 주식이 쌀인데, 벼농사를 짓지 않으면 외국에서 수입을 해야 하고, 벼농사를 지으면 물을 채우기에 자연스레 습지가 생긴다. 제초제 없는 친환경 농법은 환경을 지키는 일이라는 게 이 대표가 이 길을 선택한 이유이다. 국민 건강에 기여할 수 있는 현미 발아율을 높이려고 벼 품종도 연구도 함께했다.

저자는 이 대표와 함께 길을 걷고, 골짜기를 오르내리면서 곡성 전체의 아름다운 모습도 조망했다. 또 '미실란'의 발아현미 실험이 마을공동체의 씨앗을 발아시키기 위한 거대한 실험실로 커가는 모습도 문학적 감수성을 가미해서 입체적으로 기록했다. 손으로 모를 심고 낫으로 벼를 베는 친환경 농사꾼 이씨가 14년째 고집스레 걸어온 길이다.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해냄 출판) 230쪽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해냄 출판) 230쪽
ⓒ 임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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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권의 책에서 장편작가인 저자와 박사농부의 길은 끊임없이 교차한다. 각자 다른 길을 걸으면서 두 사람의 마음속에 각인된 서정과 서사도 엮인다. 저자는 책 서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 책엔 도시소설가가 농부과학자를 만나는 과정이 담겼다. 미실란이 지방, 농촌, 벼농사, 공동체 등 네 가지 소멸과 맞서 싸우는 과정, 이 대표가 과학적인 방법론과 전통적인 이야기를 한 그릇에 담는 과정, 곡성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엉키고 다투고 화해하는 과정, 이동현과 김탁환이 우정을 나누는 과정 등이 볏단처럼 쌓였다."

저자는 "새롭고 낯선 만남 속에서 이 대표는 나를 흔들어 깨웠고 나 역시 그에게 영향을 줬다"면서 "거창하게 운명이란 단어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서로의 곁에 머물며 달라졌다"고 고백했다.

만남이 항상 아름다운 건 아니다. 결이 부딪쳐 파열음을 내거나 악취가 진동하는 만남도 있다. 하지만 2년 반 전에 우연히 식당에서 만난 두 인생. 이 책에는 두 사람의 결과 향기가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아름다운 씨앗, 박사농부의 길을 지키려는 도시 소설가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시선도 풍성하고 고즈넉한 가을 들녘처럼 펼쳐진다.

관련 기사 :
"밥은 다이어트의 적? 천만에!" http://omn.kr/1ov2o
"곡성 폐교의 기적... 천년 숲 만든다" http://omn.kr/1ov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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