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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26일, 방송계의 비인간적인 제작 환경에 문제를 제기하며 스스로 생을 달리한 고 이한빛 PD를 향한 엄마의 이야기입니다. 한빛에 대한 그리움과 한빛이 주고자 했던 메시지를 기억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기자말]
 
 한빛의 부재와 함께 바래진 지갑
 한빛의 부재와 함께 바래진 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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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 여동생이 코로나19로 학원이 휴강을 해 사물함의 책을 가져와야 했다. 밤중에 급하게 꺼내다가 한빛이 선물한 지갑을 잃어버렸다. 한빛의 부재가 길어지는 만큼 같이 낡아진 카드지갑이다. 똑같은 것으로 사준대도 한빛 오빠랑 헤어진다고 싫다고 했던 지갑이다.

며칠을 울었다고 한다. 폐쇄된 학원에 가서 사물함부터 버스 정류장까지 찬찬히 살펴보고 포장마차에 들러 혹시 누군가가 지갑을 주워오지 않았나 확인까지 했단다. "언제까지 한빛오빠를 붙잡고 있니? 이제는 잊어야지. 그만 울어"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그 말을 하는데 가슴이 서늘했다.

이렇게 한빛은 잊히나? 언젠가는 작은 흔적조차 다 소멸하겠지. 함께 한 시간과 공간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만 있어도 당장 달려갈 수 있는데 잊어야 하나?

내 삶은 한빛과 연결되어 있었다
  
작년에 동유럽에 가면서 혹시라도 살아갈 이유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졌다. 지극히 이기적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여하튼 자식이 죽어도 엄마는 여행을 가는구나 하면서 떠났다.

낯선 도시의 한복판에 서서 억지로 마음을 끌어올렸지만 하나도 즐겁지도 신기하지도 않았다.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걸었다. 자학하듯 다리에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동유럽 여행을 왔는지 걸으려고 왔는지 의문도 갖지 않았다. 그저 시간을 버릴 곳을 찾고 허망함을 때우기 위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떠밀리기만 바랐다. 현재를 잊고 싶은 간절함만 있었다.

그러다 오스트리아 빈 벨베데레 미술관에서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The Kiss)를 만났다. 황홀해야 할 찬란한 금빛 앞에서 가슴이 울컥했다. '키스'를 어디선가 본 적은 있지만, 클림트 작품이라는 것은 솔직히 몰랐다.

한빛 유품을 정리하는데 '키스' 액자 퍼즐이 나왔다. 고난도의 퍼즐이었다. 애인과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퍼즐조각을 채워갔을까? 아니면 선물로 주려고 혼자 꾸역꾸역 만들었는데 건네질 못했을까? 물어볼 수가 없다. 나에게는 파격적인 그림이지만, 한빛이 이 퍼즐을 완성해 가던 그 시간은 행복했기를 소망했다.

이렇게 곳곳에 아니 매사 다 한빛과 연결되어 있다. 멀리 도망쳐 온 이곳에서도 한빛을 만났다. 그동안 유명 기념품점이 있어도 들어가고 싶은 의욕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 클림트 '키스'가 자꾸 나를 끌어당겼다. 선물로 주고 싶은데 한빛이 없구나. 가슴이 또 아려왔다. 애써 한빛과 함께 있고 싶은 간절함으로 작은 소품을 샀다.

매일 학교 순회를 할 때도 한빛을 만난다. 본관 3층 엘리베이터 옆에 클림트의 '키스'가 걸려있다. 애써 담담하게 스쳐 지나가려고 하지만, 항상 가슴이 출렁한다. 눈시울이 금방 뜨거워진다. 교실과 복도에서 활발하게 떠들며 노는 건강한 중학생들을 보면서 한빛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겠지. '저렇게 웃고 뛰어다녔겠지?' 하며 한빛을 만난다. 엄마가 주지 못한 행복을 누리고 갔기를 간절히 바라며 눈물을 훔친다.

곳곳에 있는 한빛. 산청 동의보감촌 연수 때도 한빛을 만났다. 다른 연수생들은 한방 음식에 대해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열성인데 나는 또 가슴이 먹먹해졌다. 울컥하면서 가슴 구석구석 뜨거워졌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한빛은 MBC에서 주최한 드라마 '허준' 감상문 모집에서 상을 탔다. 드라마 세트장에서 있었던 시상식에 한솔이가 함께 했다. '허준'에 출연했던 배우들의 사인지를 한 묶음 보여주며 "엄마, 배우들은 다 좋은 사람들인가 봐. 나랑 한솔이한테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해주고 초콜릿도 주고 머리도 쓰다듬어 주셨어" 하며 흥분했다.

앞뒤 상황을 들어보니 보호자 대신 어린 형이 어린 동생을 데리고 다니는 모습이 그들을 감동시킨 것 같았다. 한빛을 대단히 착한 형으로 보았거나 조손가정의 아이로 동정과 애정을 받은 것 같은데 한빛이 신났으니 다행이다 했다.

누군가가 삶은 과거를 떠나보내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누가 모르랴? 나도 결국 한빛에게서 벗어나야 하겠지. 떠나보내야 한다고 하겠지. 그러나 미래를 잘살아보겠다고 필요한 '용기'를 노오력해서 현재를 극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호수처럼 흔들림 없이 흘러갈 수 있을까
  
 호수는 항상 저렇게 소리 없이 제 갈 길을 갈 것이다.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흔들림 없이 흘러갈 것이다. 호수가 아름다운 것은 가야 할 이유와 희망을 품고 있어서일까.
 호수는 항상 저렇게 소리 없이 제 갈 길을 갈 것이다.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흔들림 없이 흘러갈 것이다. 호수가 아름다운 것은 가야 할 이유와 희망을 품고 있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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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동유럽에서 본 호수가 생각난다. 모두 그림 같은 풍경에 취해 일주일만이라도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감탄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름다움도 가슴 저리고 잔잔한 고요함만 슬프게 다가왔다. 가늘게 스며들던 호수의 잔물결이 나중에는 숨쉬기가 힘들 만큼 목까지 차올랐다.

또 울 핑계가 필요했나? 구석을 찾아 호수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한참을 울었다. 일행이 한 마디 했다.

"소녀적인 감성이 풍부하신 것 같아요. 저는 아름답다는 말 말고는 달리 표현을 못 하겠던데요. 부러워요."

호수는 항상 저렇게 소리 없이 제 갈 길을 갈 것이다.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흔들림 없이 흘러갈 것이다. 호수가 아름다운 것은 가야 할 이유와 희망을 품고 있어서일까.

그런데 왜 나는 한빛이 떠났다고, 한빛을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할까? 한빛과 함께 살겠다고 그렇게 우기고 스스로 슬픔을 선택하고도 한빛 없이는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주저앉을까. 호수처럼 살아야 할 이유와 희망을 찾으면 되지 않을까.

그리우면 가슴을 끌어안고 슬프면 가슴 터지게 울면 된다. 집 안 구석구석이든 이 세상 어디든 시공간을 떠나 한빛을 만날 수 있는 것도 내가 선택한 것이다. 내가 한빛과 함께 지금 여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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