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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묻은 태극기  봉오동 전투(1920. 6. 7.)당시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이 썼던 태극기
▲ 피 묻은 태극기  봉오동 전투(1920. 6. 7.)당시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이 썼던 태극기
ⓒ 독립기념관 소장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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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민군(民軍)의 역사는 길다. 관군이 외적에 패퇴하거나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 때 백성들이 스스로 나서 그 역할을 맡았다. 별도의 민군이 편성되기도 하였다.

 고구려 - 경당(扃堂)
 신  라 - 화랑
 고  려 - 광군(光軍)
 조선조 - 민간방위체제(兵農일체)
 임진란 - 의병
 한 말 - 의병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는 1907년 7월 31일 순종으로 하여금 군대해산 조칙을 내리게 강요하고, 8월 1일 서울에서부터 군대해산을 강행했다. 이들은 먼저 한국군의 화약과 탄약고를 접수케 한 다음 군대를 해산시켰다. 

국토방위의 중축인 군대가 일제에 의해 해산된 지 13년 만인 1920년 5월 이역인 북간도에서 독립군 연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를 창군한 한 것은 그 역사적 의미가 적지 않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출범했으나 아직 군대를 창설할 처지가 못 되었다. 21년이 지난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다. 사령부 요원들이 중국 각지를 돌며 1년 동안 300여 명을 모았고, 1942년 5월에는 조선의용대의 남은 병력이 광복군에 합류하고, 일본군에서 탈출한 학병들도 참가하여 1945년 4월에는 숫자가 564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북로독군부에 참여한 병력이 600여 명에 이르렀다. 최운산은 여러 곳의 땅을 헐값에 처분하여 군자금으로 댔다. 그리고 자신의 소유지 서대파에 주둔지를 마련하였다. 자신이 창설했던 군무도독부의 병사들이 북로독군부의 기간 병력이 되었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을 맡았던 역사가 김승학이 군무도독부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군무도독부는 3ㆍ1독립선언 후 일어난 단체로서 본부를 왕청현 석현에 두고 최진동(일명 명록) 3형제가 주동이 되어 활동한 단체이다.

독립군 500여 명 장총 오백여 정을 갖고 있었으며 군복은 중국군인 복색과 같은 회색을 착용하였으므로 중국 군인과 구별하기 곤란하였다. 부장에는 최진동(함북 온성 출신이며 중국 군대에서 다년간 전투경험이 있음) 사령관 이봉남 부사령관 이원 참모장에 김호석이었다. (주석 17)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승리한 뒤 독립군들이 찍은 기념사진 북로군정서로 추정되는 독립군 부대가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 토벌대를 물리친 뒤 촬영한 기념사진
▲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승리한 뒤 독립군들이 찍은 기념사진 북로군정서로 추정되는 독립군 부대가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 토벌대를 물리친 뒤 촬영한 기념사진
ⓒ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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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로군정서 창설을 주도했던 최운산은 서대파에서 멀지 않은 십리평에 사관연성소를 설립했다. 국경 봉쇄에도 꾸준히 찾아오는 애국청년들을 무장독립군으로 양성하기 위해서는 본격적인 훈련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관연성소는 6개월 과정의 단기 군사학교였다.

북로군정서의 병사로서 김좌진 장군의 비서 이정(李楨)이 1920년 7월에서 9월까지 작성한 『이정의 진중일지』에는 대한북로독군부에서 사관연성소를 시찰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최근 이정은 일제의 밀정으로 드러났다)

7월 26일 독군부 병원들은 오전 본영을 시찰하였다. 보병 조전ㆍ군대 내무서ㆍ야외 요무령ㆍ축성교범ㆍ육군 형법ㆍ육군 장벌령 등, 인쇄물 각 1부를 독군부 소대장에 출급하다. 

7월 27일 독군부 군인 1소대는 오전 9시경 십리평을 떠나 자기 기관으로 돌아가다. 십리평에 사관연성소 지소를 설치하고 본소 학도의 학력 부족자를 교련할 예정이었다.

8월 13일 금요일. 맑음. 경신 6월 29일. 소정 명령으로 본부 교사 이범석ㆍ학도단 제1학도대장 최준형(崔畯衡)ㆍ제2학도 대장 서리 오상세는 1주일 경근신(經謹愼)에, 한건원ㆍ강화린ㆍ백종렬ㆍ김훈제 구대장은 10일간의 금족(禁足)에 각각 처벌하고, 부총재 대리의 명령으로 소장 김좌진은 2주일간 정직(停職)에 교수부장은 1주일간 경근신에 각각 처벌하고 학도단장은 의원면직하다. (주석 18)


이 기록에 따르면 사관연성소의 규율은 대단히 엄격했던 것 같다. 학도대장이 1주일 근신처벌을 받고, 구대장이 10일간 금족령을, 사관연성소장 김좌진은 2주일간 정직처분을 받았다.


주석
17> 김승학, 『한국독립사』, 391쪽, 국사편찬위원회, 1965.
18> 이정, 『진중일지』, 여기서는 최성주 앞의 책, 55~56쪽, 재인용.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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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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