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중국 최대 포털사이트 바이두에서 검색한 윤동주는 중국국적의 조선족으로 소개되어 있다.
▲ 중국 최대 포털사이트 바이두에서 검색한 윤동주 중국 최대 포털사이트 바이두에서 검색한 윤동주는 중국국적의 조선족으로 소개되어 있다.
ⓒ 바이두 홈페이지 화면 캡쳐

관련사진보기



지난 12월 30일은 윤동주 시인의 탄생일이었다. 수능 '필적 확인란'을 포함한 최다 빈출 작가로 윤동주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중 한 명이다. 암울한 시대 속에서도 별을 노래했던 민족시인 윤동주를 두고 중국 측에서는 그를 '중국 국적의 조선족'으로 왜곡하고 있다.

중국 최대 포털사이트인 바이두는 윤동주 시인의 국적을 '중국'으로 표기했으며, 민족 역시 '조선족'으로 표기해 둔 상태다. 이러한 왜곡이 발생하게 된 배경에는 윤동주 시인이 출생지가 조선 땅이 아닌 두만강 북쪽의 땅 만주, 지금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 일대인 용정 명동촌이기 때문이다.

1909년 청-일 간 체결된 간도협약을 바탕으로 두만강을 기준으로 대한제국과 청나라의 국경선이 나뉘어졌다. 일제는 청나라로부터 만주 지역의 안봉선 철도 부설권 등을 얻는 대신 간도를 청나라의 영토로 인정했다. 그러나 대한제국과 청나라 양측의 국경선을 두고 체결된 협약에서 당사자인 대한제국이 을사늑약으로 일제에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황이었다. 대한제국의 의견이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점과 을사늑약 역시 강제성을 띤다는 점에서 간도협약은 무효로 규정해야 한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있는 명동촌의 원이름은 '부걸라재(鳧鴿砬子)'로 '비둘기 바위'라는 뜻의 척박한 땅에 불과했다. 그러나 1899년 함경도 출신의 김약연, 김하규, 문병규 등이 140여 명을 이끌고 북간도로 집단 이주한 이후 윤동주 시인 조부인 윤하현 등이 합류하면서 '동방을 밝히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북간도 최대의 한인촌을 형성했다.

명동촌 사람들은 선진적으로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받아들였다. 윤동주의 외삼촌이자 북간도의 대통령이라 불리던 김약연과 독립운동가이자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 그리고 목사 정재면의 주도 아래 그들은 명동교회와 학교를 설립했다. 한글로 배우고 가르치는 것, 교육을 바탕으로 민족정신을 고취 시키는 것, 그것은 독립에 대한 열망이었다. 황무지를 맨손으로 일궈낸 '이상촌' 북간도는 독립운동 인재들을 키워낸 산실이었다.

윤동주 역시 그곳에서 나고 자라며 민족정신을 배웠다. 조선의 해방과 민족의 독립은 그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이었다. 그가 용정에서 숭실중학교 입학을 위해 평양으로,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경성으로, 동경 유학길에 오르는 과정에서 그의 시는 뚜렷한 모국 지향적 성격을 내비친다. 망국민으로서 반일 의식을 느끼며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시로써 저항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시는 분열하고 반성하는 자아를 표현하는 것이자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수단이었다. 일본에서도 조국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저항하지 못한 부끄러운 자신을 탓하던 그는 1945년 2월 스물여덟살의 짧은 나이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거두게 된다.

2007년 윤동주 시인이 살았던 명동촌 생가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중점 문화재 보호 단위로 지정되었다. 2012년부터 용정시 인민 정부에서 본격적인 복원 사업을 추진해 윤동주 전람관이 새롭게 건립됐으며, 입구에는 중국 내 조선족 출신 장관이자 소수민족 문제를 주관하는 국가 민족 사무위원회 주임인 이덕수씨가 쓴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 표지석이 세워졌다.

윤동주 시인은 연변 자치구 용정 명동촌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본적은 함경북도 회령이다. 조선족이라는 공동체가 형성된 것 역시 1949년 중국 인민 공화국이 정식 출범한 후 중국에 남은 조선인들을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 규정하면서부터다. 윤동주 시인이 사망한 것은 1945년으로 조선족 개념이 생겨나기 전이며 한글로 쓰여진 그의 시 <별 헤는 밤> 속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에 나타난 것처럼 중국 이름을 지닌 소녀들은 그에게 '이국적인 소녀들'이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윤동주 시인의 국적에 대해 현대의 시각에서 규범화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그가 동경 유학길에 올랐을 때 그는 일본 여권을 들고 간 조선인이었다. 또한 함경북도 회령을 본적으로 둔 그가 만약 광복 때까지 살아있었더라도 북을 선택했을지 남을 선택했을지 알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을 고려하더라도, 현재 중국에서 윤동주 시인을 '중국 국적의 조선족'이라고 표현하는 건 우려스러운 일이다. 

중국은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자국 내 소수민족 통합을 위한 '민족통합교육' 정책을 진행하고 있다. 민족통합교육이란 중국의 표준어인 '보통화'(한족이 사용하는 대표 언어로 정식명칭은 '한어'이다)를 소수민족의 국어로 사용하는 정책으로 하나의 대륙, 하나의 중화 민족으로 응집하기 위한 대대적인 사상교육을 실시하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은 동북 지방 일부 조선족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작년 9월 신학기부터 한국어 설명이 덧붙여진 옌볜교육출판의 '한어(漢語·중국어)' 교과서 대신 중국어로만 기술되어 있는 인민교육출판사의 '어문(語文)' 교과서를 사용하도록 했다. 나아가 중국은 공통교육을 강조하면서 남아있는 여러 과목의 교재 또한 순 중국어로만 기술된 교과서를 사용하게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족 중심의 일체(一體)의 중국을 만드려는 의도는 조선족 자치주에 남아있는 한국 문화와 언어를 없애 중국 대륙과 한반도의 연결성을 끊어내 온전한 중화 민족을 만드는 데 있다. 이는 결국 윤동주 시인이 중국 국적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태그:#김치공정, #한복공정, #문학공정, #중국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