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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몇 주 전 지인에게 연락이 왔다. 커피 한잔하자는 말에 나는 여느 때랑 다른 대답을 하고 말았다. 나는 아주 잠깐 이 사람이 이 시국에 만나도 되는 사람인가 안 되는 사람인가를 생각했다. 만나도 되는 사람은 뭐고 안 되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조금 엉뚱한 자문에 대한 대답을 찾느라 지인에게는 망설인 끝에 그냥 다음을 기약했다. 나는 왜 그런 질문을 나에게 던졌을까.

사람을 만나기 힘든 기간이기 때문에 흔치 않은 이 기회를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데에 사용하려 했던 적이 있는가? 되는 사람 안 되는 사람은 애초부터 없었다. 단지 조금 더 심적으로 가까운,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게 좋겠다 싶은 것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만남을 만들기 전에 그 사람이 나와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 사람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금 야박해 보이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지금은 심심타파를 목적으로 사람을 만날 수는 없지 않나...

물론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선을 오가는 게 싫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를 피하는 사람이긴 했다. 특별한 일하는 게 없어 보여서 다단계를 소개해 준 동네 누구 엄마, 남의 집 이사 준비에 두 팔 걷고 도와주며 오늘의 수고를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꺼내어 말해주는 아는 언니... 나는 이런 인간관계 안에서 희미해진 선의 위치를 다시 정하고 긋느라 힘들었다. 심지어 거리 두기가 그다지 힘들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선을 넘는 것보다 낫지 않나? 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랬던 나도 코로나로 인한 거리 두기는 너무 힘들었다. 봄기운과 함께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느낄 때, 그 바람이 내 볼을 스쳐 나를 한 바퀴 돌아 지나갔을 때. 나는 그때 갑자기 지인들 속에서 아이처럼 소리 내어 웃고 떠들고 시끄러워지고 싶은 충동에 몸서리쳐졌다.

차가웠던 거실 창밖이 순간 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햇볕들로 변해 있을 때, 주말 이른 아침 산책길에서 나무에서 나무로 소리 내면서 옮겨 앉는 새를 볼 때, 한 주를 계획하려고 날짜를 확인하면서 쉽게 세어 넘어가 버리는 하루하루를 보며 그리운 사람들을 떠올렸다. 나도 이런 나에 대해 말을 잇지 못하다가 곧 이유를 알 것 같았는데 그것은 사람이 고픈 증상들이리라. 그래서 지인에게 전화가 온 그날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면 단걸음에 달려 나갈 뻔했다.

거리 두기는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수동적이라는 생각을 바꿨다.
거리 두기는 내 주위의 '찐'사람과 아직 '찐'이 아닌 사람을 구별시켰고
거리 두기는 양쪽 중 어느 쪽에서 더 이 관계를 원하는지도 알게 했다.

나도 다른 이들의 거리 두기 정도를 정하는 데에 시험대에 올랐을 터다. 나를 '그래도' 원하는 쪽은 지속적으로 만남을 원했을 것이고 '좀 나중에' 만나도 된다고 느끼는 쪽은 연락이 없거나 덜 한 쪽이겠다. 선이 불명확한 것이 싫다던 나 같은 사람에게도 오히려 선을 확실하게 그어 준 거리 두기 기간이 씁쓸하게 느껴진 건 이 때문이다. 

코로나는 우리를 마스크를 씌운 모습으로만 바꾼 게 아니었다. 주위 사람과의 심적인 거리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했고 그래서 더 예전 같은 일상을 간절히 원하게 했다.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3차 팬데믹 중인 지금, 이제는 거리 두기도 마스크만큼 익숙해졌다. 어쩌면 거리 두기로 1년이 넘게 거리가 두어진 사람들과 코로나가 종식되어도 전처럼 지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거리 두기는 정말이지 잔인하다.

태그:#거리 두기, #집콕, #일상 속 코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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