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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삼성반도체 생산현장인 클린룸 안에서 방진복을 입은 여성노동자
 1990년대 삼성반도체 생산현장인 클린룸 안에서 방진복을 입은 여성노동자
ⓒ 반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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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보지 않으면 몰래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가 가족이라고 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끝까지 부여잡고 싶은 존재가 가족이다. 살랑바람에도 행여 넘어질까 손을 꼬옥 맞잡는다. 거센 비바람에도 떨어지지 않았던 마지막 잎새, 그 잎새를 26년 동안 그려온 자매가 있다. 은희(가명), 은미(가명) 자매다.

은희씨는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일했다. 입사 2년 반이 지난 1995년, 21살 나이에 갑자기 쓰러졌다. 루푸스(면역 이상 반응으로 인해 여러 합병증을 수반하는 자가면역계질환) 진단을 받았다. 당시 입마름이 심해 말하기가 어려웠고 눈이 심하게 뻑뻑했다. 장갑을 두 개씩 끼어도 작업물에 손가락이 닿으면 아팠다. 쇼그렌 증후군이 합병증으로 왔다.

쫓겨날까 두려워 동료들에게도 회사에도 아프다 말하지 못했다. 1997년 또 쓰러졌다. 쓰러지고 나서 일 년을 더 일했다. 더 일하고 싶었지만, 낮과 밤을 오가는 교대근무를 몸이 더는 버티지 못했다.

루푸스라는 병명을 아는 의사조차 몇 없었고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당사자도 가족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2004년도부터 은희가 짜증도 자주 부리고 비실비실하고 뭔가 이상해졌어요. 그래서 제집 옆으로 이사 오게 했어요. 2006년 은희 아이의 돌을 한 달 앞두고 갑자기 또 쓰러졌어요. 38일 동안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어요. 의사가 조혈모세포 이식을 권유했는데 부작용이 치명적이어서 거절했습니다. 그럼 피를 갈아보자고 하더군요.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헌혈증을 모았고 피를 다 갈았어요. 그랬더니 살아난 거예요. 무슨 도깨비장난도 아니고..."

언니 은미씨는 그때부터 동생을 옆에 끼고 돌보기 시작했다. 루푸스 환자는 어떤 합병증이 언제 올지 모른다. 전신에 걸쳐 합병증이 순식간에 나타나고, 그에 따른 처치를 빨리 취해야 한다. 가족들이 항상 긴장하고 유심히 관찰해야 한다.

은희씨가 의식이 없을 때 입원실에 같은 병을 앓던 젊은 환자가 있었다. 동생의 의식이 돌아오고 퇴원하던 날, 동생보다 멀쩡하던 젊은 환자가 갑자기 사망했다. 그 젊은 환자는 치료비가 없어서 받아야 할 치료를 제때 받지 못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언니 은미씨는 지금도 그 상황이 너무 안타깝고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고 한다.

2012년 뇌경색이 왔다. 루푸스 합병증이다. 아파트 장터에서 사 온 곰탕에 머리카락이 있어 손가락으로 꺼내는데 잘 집히지 않았다. 손가락을 넣었다 뺐다 넣었다 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이상하다 여기고 119를 불렀다. 몇 개월 후 2차 뇌경색이 왔다. 반갑지 않은 손님은 혼자 오지 않나 보다. 말초신경염도 함께 왔다. 그렇게 병원에 실려 가기를 수차례, 따라붙은 병명만 스무여 가지다.

근로복지공단의 고객은 사랑받지 못한다
   
2014년 10월 28일 은희씨를 포함해 반도체 전자산업 노동자 19명이 집단 산재신청을 했다. 당시 영등포 근로복지공단 앞 기자회견 모습.
 2014년 10월 28일 은희씨를 포함해 반도체 전자산업 노동자 19명이 집단 산재신청을 했다. 당시 영등포 근로복지공단 앞 기자회견 모습.
ⓒ 반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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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회사에서 보상해 줄 줄 알았어요. 일하다가 아픈 거니까."

언니 은미씨가 회사에 수차례 전화해 책임을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회사랑 상관없는 일이다, 소송하려면 소송해라'였다. 혼자 힘으로 삼성과 어찌 싸우겠는가. 억울하고 답답했지만 길은 보이지 않았다. '루푸스를이기는사람들협회'에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를 소개받았다.

"반올림에 처음 전화를 했는데 혹시 삼성에서 일하셨냐고 묻더라고요. 반올림을 만난 게 천운이었어요."

은희씨는 반올림에 루푸스를 처음 제보한 직업병 피해자다. 반올림의 도움으로 2014년 산업재해(산재) 신청을 했다. 은희씨는 포토공정에서 일했다. 포토공정은 반도체 칩이 될 얇은 원판인 웨이퍼에 회로가 새겨질 길(회로패턴)을 만드는 공정이다.

회로패턴을 만드는 과정에 감광제가 사용되는데, 문제는 이 감광제에 몸에 해로운 다양한 유기용제가 들어 있다는 점이다. 감광제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휘발된 유기용제는 암을 비롯해 여러 질병을 일으킨다. 일하는 내내 유해화학물질에 노출됐는데도 위험하다고 알려주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6년을 일했다.

근로복지공단은 5년이 흐른 2019년 은희씨의 루푸스를 산재로 인정했다. 발병 24년 만이다. 삼성 직업병 피해자들에게 산재 승인은 인색한 행운처럼 더디게 찾아왔고 산재보험은 그보다 더 인색했다.

기업의 고객은 사랑받지만, 근로복지공단의 고객은 사랑받지 못한다. 산재 노동자가 어떻게 해야 산재보험 급여를 받을 수 있고 어떤 급여를 받을 수 있는지 안내받지 못한다. 생전 처음 보는 전문용어가 난무하지만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노동자는 그 복잡한 암호를 혼자 알아서 풀어야 한다. 전문가의 도움 없으면 산재 신청부터 막막하다, 그러니 애초부터 산재 신청을 포기하거나 받을 수 있는 산재보험 급여인데도 미처 챙기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반올림을 만나기 전, 은희씨는 근로복지공단의 잘못된 안내로 산재 신청조차 포기했었다. 진단 시부터 3년이 지나면 신청할 수 없다고 안내받은 것이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 보험급여를 청구할 권리는 3년의 시효를 가진다고 돼 있다. 진단 시부터 3년이 지났다고 청구권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진단 시점이 오래되었어도 진행 중인 병에 대해서는 언제든 보험급여(요양비 등)를 청구할 수 있다. 다만 시효로 인해 산재 신청일로부터 3년이 지난 분까지 소급해 보험급여를 받을 수는 없다(은희씨의 경우 2014년에 산재 신청을 했으니 3년 소급한 2011년분 보험급여부터 받을 수 있다).

긴 기다림으로 어렵게 산재 승인 문턱 넘었지만

일터에서 얻은 병으로 다시 일할 수 없게 된 은희씨는 8년분 휴업급여를 신청했다. 그런데 근로복지공단은 76일의 통원기간에 대해서만 휴업급여를 지급했다. 아파 일할 수 없게 된 오랜 시간에 대한 부정이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휴업급여 부지급에 대해 공단 본부에 심사청구를 했다. 230장이 넘는 서류를 일일이 출력해서 보냈다. 직접 찾아가 심사 담당자와 첨부 자료목록을 보면서 빠진 게 없는지 일일이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루푸스 합병증으로 발생한 뇌경색, 쇼그렌 증후군 등 추가 상병에 대한 자료도 제출했다.

그러나 제출했던 여러 의사 소견서와 의무기록 등 중요한 자료가 누락된 채 심사가 진행되었고 결과는 불승인이었다. 자료누락 문제는 공단 심사 이후 노동부 재심사위원회에서도 반복되었다.

"담당자가 필요한 자료는 다 받았다고 했어요. 제가 전화로 더 필요한 서류 없냐고 몇 차례 확인했거든요. 나중에 확인해 보니까 21장의 자료를 추가로 냈는데 16장을 넘겼다고 하더라고요. 나머지 5장은 어디로 갔는지도 몰라요. 결국 해당 차트를 확인할 수 없다는 의견서가 날아왔어요. 도대체 어디서 왜 누락된 건지 알 길이 없어요. 그나마 제출된 자료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거예요."

언니 은미씨가 그나마 꼼꼼하게 챙긴 덕분에 여기까지라도 왔다. 보통의 경우, 일반의사들은 산재보험제도를 잘 모른다. 산재보험제도를 잘 모르니 적합하지 않은 소견서를 써주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반올림 이종란 노무사가 덧붙여 설명한다.

"산재 보험급여 종류 중에는 요양기간 동안 평균임금의 70%를 지급하는 휴업급여 제도가 있어요. 아픈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해 꼭 필요한 보험급여예요. 그동안 휴업급여를 지급받으려면 취업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에 대해 주치의 소견에 따라 결정했어요. 그런데 주치의가 휴업급여 제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니, 겨우 움직이는 정도만 돼도 취업 가능하다고 해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휴업급여를 못 받거든요. 노동자는 아파서 혹은 투병으로 허약해져서 실제 일할 수 없는 몸인데도 말이에요.

주치의 소견에만 의존하다 보니 부당하게 지급 못 받는 사례가 제법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2019년에 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은 휴업급여 처리 지침을 새로 만들어요. '퇴직한 노동자의 경우 주치의 판단대로 하는 게 아니라 공단소속 병원에 특진을 의뢰하고 노동자가 원래 했던 업무를 기준으로 작업능력평가를 시행해 취업 가능 여부를 결정하도록. 은희님 경우, 이 제도를 만들어놓은 공단이 그게 있는지도 모르고 주치의 소견만 보고 휴업급여를 지급하지 않았어요."


은희씨는 처음 산재 인정받던 날 꺼억꺼억 울면서 언니에게 전화했다. 긴 기다림으로 어렵게 산재 승인의 문턱을 넘었지만, 그뿐이었다.

"어렵게 인정받았잖아요. 그만큼 혜택도 많고 설명도 알아서 잘해 줄 거로 생각했어요. '이러 이런 게 있으니 신청하세요'라고 안내해줄 줄 알았어요. 산재 인정됐으니 네가 다 알아서 하라는 식이에요. 황당했어요. 내가 알아서 다 찾아봐야 하고 신청 안 하면 못 받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거에 괜한 힘 썼다는 회의가 들어요."

막히고 또 막히는 산재보험에서 벗어나려면   
  
반올림은 삼성 직업병 문제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 2015년 10월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농성을 시작해 1023일 동안 이어졌다. 삼성 직업병 피해자인 은희씨는 2015년 10월 14일 ‘반올림 농성장’을 방문해 “몸이 불편하여 늘 함께하지 못하지만 마음은 늘 함께 있습니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반올림은 삼성 직업병 문제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 2015년 10월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농성을 시작해 1023일 동안 이어졌다. 삼성 직업병 피해자인 은희씨는 2015년 10월 14일 ‘반올림 농성장’을 방문해 “몸이 불편하여 늘 함께하지 못하지만 마음은 늘 함께 있습니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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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보험은 건강보험과 같은 사회보험이다. 건강보험의 경우 환자가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면 관련 행정절차를 의료기관과 국민건강보험에서 환자를 대신해 처리한다. 환자가 병원에서 수많은 서류를 다 떼서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일일이 제출하지 않는다.

하지만 산재보험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사자가 다 챙겨야 한다. 전문노무사를 통하면 일이야 훨씬 수월하겠지만 비용부담이 크다. 중간에서 친절하게 안내해주고 행정 부담을 줄여줄 산재 신청 도우미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은희씨는 지난 1월 반올림을 통해 근로복지공단에 휴업급여 재심사 서류를 보냈다.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 기대하지만 여전히 불안 불안하다.

"언니가 없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은희씨가 언니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반올림은 등대 같은 존재예요. 반올림이 없었으면 어떻게 여기까지 왔겠어요."

언니 은미씨가 반올림에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차마 말로는 다 전할 수 없는 마음들이다. 마지막으로 자매에게 어떤 바람이 있는지 물었다.

"큰 사거리에 신호등이 없는 상황이에요. 위험하고 답답한 사각지대죠. 이 사각지대를 어떻게, 얼마나 빨리 없애느냐가 중요해요. 산재 승인 받는 것도 너무 힘들었는데, 후처리는 더 힘들어요. 산재보험이 지금처럼 어렵고 복잡하지 않고 좀 더 신속하고 편하고 쉬웠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방치돼 왔던 산재보험제도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은희, 은미 자매가 겪은 과정을 통해 현행 산재보험제도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조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막히고 또 막히는 산재보험에서 벗어나려면, 산재보험이 폭넓게 적용되도록 건강보험처럼 신청과 승인 절차가 없어야 한다는 논의도 있다. 결국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 긋기는 제도개선 설계자의 의지에 달려 있다. 그 의지가 노동자에게 더 다가가도록 획기적인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시끄럽게 나와야 할 시점이다.

* 뒷이야기 : 지난 2월 9일 은희씨의 휴업급여 재심사 결과가 나왔다. 통원한 기간(76일)만 지급한 것은 문제가 있으니, 전체 요양 기간에 대해 다시 휴업급여를 지급하라는 결정이다. 희망이 보인다.

태그:#산재보험, #근로복지공단, #반올림, #산업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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