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연일 영화 <미나리>의 해외 영화제 시상 소식에 각종 매체가 뜨겁다. 작년 제36회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상과 관객상을 동시 수상하고도 70개가 넘는 각종 해외 영화상을 수상했는데 아직 현재진행형이라는 데 놀라움을 더한다.

영화 <미나리>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던 우리나라 이민자 1세대의 고난했던 삶 속에서 '가족'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영화다. 태생적으로 이민자들의 나라인 미국에서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큰 공감을 얻는 이유일 것이다. 이미 유수의 전문 해외 영화 비평가들과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으며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까지 수상했으니, 작품의 진정성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겠다.
 
영화 < 미나리 > 중
 영화 < 미나리 > 중
ⓒ 판씨네마㈜

관련사진보기

 
내가 주목하는 것은 배우 '윤여정'이다. 영화 <미나리>의 수상 실적 중 그녀는 이미 '여우조연상'으로 26관왕을 차지했다. 93회 아카데미상 여우조연 후보로까지 거론되는 그녀에게 거는 기대가 커지는 이유다(올해 아카데미상 시상식은 지난 2월 28일 열릴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의 여파로 오는 4월 25일로 연기되었다).

47년생으로 70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배우로서 뿐만 아니라, TV 예능 프로그램 <윤스테이>로도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데뷔 55년 차 대배우 윤여정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녀가 배우로 데뷔했던 1960년대는 아직은 여성에게 사회적인 편견과 제약이 많았을 때였다. 그런 시대에 그 세대에 흔치 않았던 대학 교육까지 받은 그녀가(비록 중퇴였으나) 배우의 길을 걷기로 작정했을 때, 그녀는 이미 당시 보통 한국 여성들의 삶과는 다른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떠밀려 사는 삶이 아닌, 스스로가 선택한 삶에서는 부딪히는 모든 힘겨운 삶의 장애물에 남 탓을 할 수가 없다. 내가 택한 삶의 결과는 오롯이 나의 책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한 영화주간지에서 한 인터뷰 내용이 더 마음에 와 닿는다.
 
"나는 살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목숨 걸고 한 거였어요. 요즘도 그런 생각엔 변함이 없어. 배우는 목숨 걸고 안 하면 안 돼. 훌륭한 남편 두고 천천히 놀면서, 그래 이 역할은 내가 해 주지. 그러면 안 된다고. 배우가 편하면 보는 사람은 기분 나쁜 연기가 된다고. 한 신, 한 신, 떨림이 없는 연기는 죽어 있는 거라고." - 2005년 <바람난 가족> 개봉 후 <씨네21>과 인터뷰 중

윤여정이 이혼 후 두 아들을 홀로 키우면서 "쌀독에 쌀이 있던 때보다 떨어졌던 때가 더 많았다"던 시절이 없었대도, 그녀에게 '연기'가 이토록 절박한 것이었을까. 실제로 결혼 전까지 주, 조연급 연기 생활을 중단 없이 해 왔던 그녀가 20대 때는 연기 생활에 큰 애착이 없었다고 하니(위키백과 참고), 위기는 기회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형편이 어렵던 시절에 일을 가리지 않았다는 그녀의 인터뷰를 보며 내 20대 때의 기억도 소환된다. 20대 시절, 교사가 되고 싶었으나 노력의 결과물이 지지부진하자, 사립학교로의 채용 기회도 기웃거렸다. 내가 교사가 되고자 한다는 말을 어디서 전해 들었던지, 학교 선배가 모 사립고등학교의 채용 공고를 알려주었다.

감사히 여기며 서류 제출 날짜를 기다리는 중, 선배를 아는 사람이라며 학교 측 관계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가 제안한 내용은, 학교 측에 제출할 수 있는 '비용'에 대한 것이었다.

교사 임용의 배후에 '돈' 문제가 개입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무지했던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지만, 초면인 그분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생각해 보고 연락드리겠다고 전화를 끊었다. 그 일은 그때까지만 해도 순수한 마음으로 교직을 바라보던 내게 찬물을 끼얹는 일이었다.

소개해 주었던 선배에게 그런 내용을 전하니 자신은 전혀 모르는 내용이었다고, 몇 번을 미안하다고 하여 마음의 부담을 덜었다. 그러나 이 내용을 아시게 된 친정 엄마께서는 어떻게든 비용을 마련해 보겠다시며 다시 연락해 보라고 하셨다. 없는 형편에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임용을 준비하던 딸이 좋은 결과를 못 내는 것이 못내 안타까우셨던 모양이었다. 그런 엄마에게 나는 말했다.

"엄마,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돈 내고 선생 되면 학생 하나, 하나가 돈으로 보일 텐데. 돈 낼 생각도 하지 마."

물론 엄마의 걱정을 물리치게 하려는 마음에서였지만, 그때 나의 소신은 뚜렷했다. 그렇지만 이 나이가 되어 되돌아보면 다른 생각도 든다. 우리 집 형편이 넉넉하여 쉽게 수락할 수 있는 조건이었으면 나는 소신을 지킬 수 있었을까. 소신을 지킬 수 있도록 나를 지켜 준 나의 '가난'에 감사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가난은 혼신을 다 하게도, 어부지리로 소신을 지키게도 해 주는 것인가. 대배우 윤여정에게 삶의 자세를 배운다.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을 걸고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보는 이가 기분 나빠지는 일은 꼭 연기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누군가가 편하려고 작정하면 다른 누군가는 불편해지는 시소 같은 삶의 무게추. 이 추의 균형을 잘 맞추기 위해서는 내가 입고 있는 나의 역할의 한 신(scene), 한 신에 마음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 비로소 떨림이 있는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을.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 함께 게시된 글입니다.


태그:#영화 미나리, #배우 윤여정, #삶의 자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년 넘은 공립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아이들에게서 더 많이 배웁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