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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의 표지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의 표지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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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안 군수에서 파직된 이듬해 1월 명나라에서 또 사신이 오게 되면서 조정은 다시 그를 불렀다. 원접사 유근이 그를 종사관으로 추천한 것이다. 사신 중에는 명나라 3대 문사 중의 하나라는 한림수찬의 직에 있는 주지번이 끼어 있었다. 

허균은 주지번을 접대하면서 시와 글씨는 말할 것도 없고 불교와 도교 얘기에서 제자백가에 이르기까지 한껏 재주를 뽐냈다. 최치원 이후의 시 팔백삼십 수 쯤을 소개하였고 스승 이달의 시와 누이 난설헌의 시도 보여주었다.

주지번은 허균의 글재주와 넓은 학식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며, 다른 이의 시를 보고도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 시들을 중국에 가져가 소개하였다. 이에 허균은 나라 안팎에서 그 탁월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주석 7)

 
박연옥이 쓰고 그린 책 '조선의 여류시인 미인도'에 나오는 허난설헌 그림
▲ 여류시인 허난설헌 박연옥이 쓰고 그린 책 "조선의 여류시인 미인도"에 나오는 허난설헌 그림
ⓒ 배남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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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후반에 그는 모두가 인정하는 조선 최고의 문사가 되었다. 불교를 믿는 이단자이고 '거상압기'의 패륜아로 지탄하면서도 나라에 중대한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그를 불렀다.

선조는 이듬해(1607년) 4월에 허균을 삼척 부사로 임명했다. 부사(副使)란 대도호부사와 보호부사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지금으로 치면 부시장급이다. 하지만 5월에 삼척 부사에서 파직되고 말았다. 관아 별실에 불상을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예불을 하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고변에 따른 사헌부의 탄핵이었다. 

모처럼 얻은 지방관직을 18일 만에 내쫓김 당한 심경을 「문파관작(聞罷官作)」에서 술회한다. 시의 끝에 나오는 이두(李杜)는 중국의 대표시인 이태백과 두보를 일컫는다. 

       문 파 관 작

 예부터 불경 읽었던 것은 
 마음 붙일 곳 없어서였다.
 주처(周妻)는 아직 보내지 못했고
 하육(何肉)은 다시 금하기 어렵다.
 내 분수 벼슬과 멀어 졌으니
 어찌 탄핵을 근심하랴.
 인생을 운명에 맡기리니
 꿈은 오히려 사원(寺院)으로 돌아간다. 
 예교(禮敎)에 어찌 구속되랴
 부침(浮沈)은 다만 정에 맡기겠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대로
 나는 나대로 살아가리라.
 벗들은 찾아와서 위로를 하고
 처자들은 원망을 한다.
 혼연히 얻은 것이 있는 듯해
 이두(李杜)처럼 이름이나 같았으면 다행이겠다. (주석 8) 

 
초당이라는 마을 이름은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의 호에서 유래되었다.
▲ 초당 허난설헌 생가 초당이라는 마을 이름은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의 호에서 유래되었다.
ⓒ 권정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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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는 고려조의 불교정책에 반대하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개국하여 태조 이성계의 승려에게 신분증명서를 발급하는 도첩제(度牒制)를 시작으로 태종의 사사노비(寺社奴婢)의 혁파, 세종의 선교양종(禪敎兩宗)의 정리 등 억불정책으로 일관하였다.

임진ㆍ정유왜란의 국난기에 승려들의 큰 기여에도 조정과 유생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다음은 사헌부가 허균이 불교는 믿는다는 이유로 탄핵한 기록이다.

삼척 부사 허균이 유가의 자제로서 불교를 숭상하여 벼슬을 하지 않을 때는 승복을 입고 배불(拜佛)을 하며, 수령으로 있을 때는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설제(設齊)를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며, 중국 사신이 왔을 때 불경에 관한 이야기를 하여 극히 놀라운 이야기를 많이 했으니 파직을 시켜 사습(士習)을 바로 잡아야 한다. (주석 9)

이로써 보면 허균의 호불은 단순한 흥미로 불경을 본 것이 아니었다. 사헌부의 이 같은 계청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옛날부터 문장을 좋아하는 자들이 불경을 섭렵하기도 했는데 허균도 그러한 정도가 아니겠는냐"며 파직을 시키진 않았다. 선조의 이러한 태도에 사헌부가 승복하지 않고 허균을 '승도(僧徒)'라 규탄하며 파직을 거듭 주청하자 선조는 마침내 그를 파직시켰다. 

허균은 삼척 부사에서 파직되기 전이나 이후에도 불교에 대한 신심은 달라지지 않았다. 명승대찰의 비문을 거침없이 지었다.

사명대사 비문을 비롯하여 법천사기(法泉寺記)와 「토솔원이타전 중수비문」 등 사찰의 기문과 비문을 지었고, 이와 같은 산문뿐만 아니라, 시에서도 「장안사벽 이정(李楨) 화상 급 산수가」, 「팔각전 간화불」, 「옥준선사 오개가」등에서 그의 불교에 대한 신심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주석 10)


허균의 한 연구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균이 불교에 혹신했거나 심후한 신앙을 가졌던 것은 아니고 그는 여전히 유자였음을 주장한다.

벼슬길이 평탄하지 못하고 또 소탄했던 성격이 당시의 권력을 가진 인물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자 일시적으로 호불을 하게 되었으며, 그것도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지난날의 인물들을 이야기할 때 특수한 사유가 없는 한 일시적인 사실로서 일생에 결부시켜 규정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교산은 유가적인 가정에서 성장하였고, 후기에는 불교에 대해 상당히 회의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유교에 대해 오교(吾敎), 오도(吾道)로 지칭했고, 자신을 오유(吾儒)ㆍ견유(堅儒)ㆍ유자(儒者)로 자처한 그에게 중년에 한동안 불교에 접근했던 것으로 그가 불교에 혹신했고, 또 심후한 신앙을 가졌던 것으로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하며, 불교에 대한 그의 지식과 신앙이 꼭 일치한다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주석 11)


주석
7> 이이화, 앞의 책, 68쪽.
8> 『성소부부고』 권2, 시부(詩部) 2.
9> 『선조실록』 권 201.
10> 차용주, 『허균연구』, 172~173쪽, 경인문화사, 1998.
11> 앞의 책, 178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허균 , # 허균평전 , #자유인_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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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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