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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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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기(기강)의 문란이었을까,
출중한 능력일까,
맏형의 뒷배였을까,
임금 선조의 남다른 총애였을까.

5월에 삼척 부사에서 파직되었다가 7월에 내자시정, 12월 9일에 공주 목사가 되었다. 목사(牧使)는 관찰사 밑에서 크고 중요한 고을의 각 목(牧)을 맡아 다스리는 정삼품의  외직으로 세칭 원님 또는 사또라 불렀다. 오늘의 시장ㆍ군수급에 해당한다. 

목사는 관리들이 한결같이 바라던 자리이고 초야의 선비들도 원하던 벼슬이었다. 당시 공주는 충청도 지방행정 및 경제의 중심지로서 계란의 노른자위와 같았다. 

공주 목사는 그의 생애에서 하나의 변곡점이 된다. 울혈한 성격의 그가 서얼들과 본격적으로 어울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얼(庶孼)이란 '서자'와 '얼자'를 말하는데, '서자'는 그 어머니가 양민, '얼자'는 그 어머니가 천민인 아들을 뜻한다. 

허균이 공주 목사로 있을 때가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것은 평소에 교분이 두텁던 서류들과 더욱더 가깝게 사귀면서 개혁의 꿈을 키운 때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이때에 그는 처의 외삼촌인 심우영과 친구인 이재영을 식객으로 데리고 있었고 이경준 등이 자주 드나들었다. 그래서 그들의 불행을 늘 가슴 아파하던 허균은 그들의 기운을 북돋워주고 생활까지도 돌보아주었다. (주석 12)

허균의 운명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심우영과 이재영을 알아둬야 할 것 같다. 처외삼촌인 심우영(沈友英,?~1613)은 관찰사 심절의 서자로 태어나 재능이 있었음에도 관직에 들지 못한 '강변칠우'의 일원이다. 김제남의 옥사에 연루되어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하고 아들과 함께 참형되었다.

이재영(李再榮,?~1623)은 판서 이선의 서자로 태어나 허균과는 어릴적부터 벗이었다. 1599년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원까지 지냈으나 출신이 미천하다하여 차별대우를 받다가 1623년 과거에서 남의 글을 대신 지어주었다가 매 맞아 죽었다. 

공주 목사로 부임한 허균은 이들을 불러 모았다. 이재영에게 쓴 편지다.

나는 큰 고을 원이 되었네. 마침 자네가 사는 곳과 가까우니 어머님을 모시고 이리로 오게. 내가 절반의 봉급으로 대접하리니 결코 양식이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네. 자네와 나의 처지는 다르지만 취향은 같으며 재주는 나보다 10배이지만 세상에 버림받음은 나보다 심하니 내가 매양 기가 막히네. 내 비록 운수가 기박하나 몇 차례 고을 원이 되어 목구멍에 풀칠은 할 수 있지만 자네는 입에 풀칠도 못하는구려. 이런 것은 모두 우리의 책임이네. 밥상을 대할 적마다 부끄러워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네. 어서 오게. 비록 이 일로 비방을 받더라도 나는 마음을 쓰지 않겠네. (주석 13)

큰 고을의 사또가 '불한당' 쯤 되는 인물들을 관아로 불러들여 숙식을 제공하고 술판을 벌이면서, 기생들이 따라오고 풍기와 기강이 문란해졌을 것이다. 교조화된 관료사회에서 이같은 행위는 당연히 질타의 대상이 되었다. 허균은 예불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허균은 서얼(서자ㆍ서출)이 아니었다. 아버지 허엽은 정부인이 죽은 뒤 재혼하여 허봉ㆍ허난설헌ㆍ허균 삼남매를 낳았다. 어머니가 첩이 아닌 본부인의 사망으로 혼인한 것이어서 서자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서얼들에 남다른 관심과 동류의식을 가졌다. 

유학의 덕목 중에 사불범정(邪不犯正)의 정신은 서생은 물론 선비들이 어릴적부터 배우고 익히는 식자의 가치관에 속한다. 하지만 현실은 늘 딴판이었다. 허균의 아버지는 동부승지에 있을 때 경연에 참석하여 정암 조광조의 신원(伸寃)을 청하다가 파직당할만큼 강직한 분이었다. 

조광조가 누군가. 이상적 개혁정치(책)를 펴다가 수구세력에 몰려 37세의 젊은 나이에 저자에서 육신이 찢기는 비극의 주인공 아닌가. 조정에는 그를 죽인 후대 세력이 포진하고 있는 터에, 조광조의 신원 제기는 섭지고 불구덩으로 뛰어든 격이었다. 이런 아버지의 의기가 오롯이 아들에게 전해진 것이리라. 조광조의 비극이 뒷날 아들에게 이어진다는 것을 허엽이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허균에게 조광조는 롤 모델이었다. 둘은 닮으면서도 달랐다. 

조광조 자신은 조선왕조의 명문에서 태어났으며 그 사회가 베풀 수 있는 모든 이점을 다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왕조체제의 한 가운데 있는 사람이었지만, 조선의 정치적 현실을 과감하게 개혁하고자 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는 조선 왕조의 퇴색된 유교 이념을 재확립하고, 그 이념에 투철한 인물을 등용하기 위해 과거제도를 혁신하고자 하였다. 현실적인 제약 속에서 그가 주장했던 현량과는 과거제도를 완전히 대체하기보다는 이를 보완하는 수준으로 조정되었지만 이것마저도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주석 14)


주석
12> 이이화, 앞의 책, 69쪽.
13> 이이화, 앞의 책, 69~70쪽.
14> 정두희, 『조광조』, 297쪽, 아카넷, 2000.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허균 , # 허균평전, #자유인_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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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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