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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의 꽃 소식이 강화까지 올라왔다. 빈 산에 노란 생강나무 꽃이 피기 시작하더니 매화도 곧 필 기세다. 발그스름하게 물이 오른 매화 꽃봉오리들을 보노라니 어느새 봄이 훌쩍 다가온 느낌이다.

꽃샘추위가 문 앞을 서성거려도 매화나무는 꽃을 피운다. 이른 봄에 홀로 깨어 봄을 알리는 매화의 기개는 선비의 지조를 뜻하기도 했다. 그래서 조선시대 선비들은 매화를 사랑했다. 홑겹 홍매를 특별히 더 사랑해서 '월사매'라 불렀다.

매화를 사랑했던 선비들

조선 선조 29년(1596)에 사신으로 중국에 갔던 월사 이정구(1564~1635)는 명나라의 황제에게 홍매를 선사받았다. 조선의 선비들은 이 매화를 접붙여 서로 나누어 가졌고, 이후 매화라고 하면 이 '월사매'를 뜻한다.
 
매화꽃
 매화꽃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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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대문장가인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1852-1898) 역시 월사매를 사랑해서 한양 서강 근처에 있던 자신의 집 사랑채 곁에 심어두고 완상했다. 매화가 피면 벗들을 불러 시회(詩會)를 열었다고 하니 그 흥취와 고졸함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이건창은 벼슬길에서 물러나 고향인 강화로 낙향할 때 이삿짐 위에 매화나무를 얹어 가져왔다. 서울 양화나루에서 강화까지 싣고 온 매화나무를 강화 사기리의 사랑채 앞마당에 심었다. 그러나 매화는 새로운 땅에 뿌리를 잘 내리지 못하고 시들시들했다. 본향인 강화로 돌아온 지 몇 해 안 지나 이건창은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까지도 매화는 영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이건창이 사랑한 월사매, 다시 피다

을사년(1905년) 봄에 이건창의 동생인 이건승이 전라도 구례로 편지를 보냈다. 구례에는 이건창의 벗인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이 살고 있었다. 황현은 이건창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천 리 길도 넘는 길을 걸어서 강화까지 찾아왔던 사람이었다. 이건승은 황현에게 말라 죽었던 매화가 다시 살아나 꽃을 많이 피웠다는 기별을 보냈다.

지난 3월 말에 이건창이 사랑했던 월사매를 찾아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 있는 이건창 생가에 갔다. 영재가 심었다는 월사매의 흔적이라도 찾아보려고 갔지만 매화는 고사하고 이건창 가문의 고졸한 향기를 맡기에는 부족했다. 집 앞의 두 그루 장대한 편백나무만이 이 집이 예사롭지 않은 집임을 나타내 줄 뿐 고적하기 짝이 없었다.
 
아름드리 편백나무 두 그루가 이건창 생가를 지키고 있다.
 아름드리 편백나무 두 그루가 이건창 생가를 지키고 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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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에 복원한 이건창 생가.
 1996년에 복원한 이건창 생가.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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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창의 가문은 대대로 양명학을 가학(家學)으로 삼은 학자 집안이었다. 양명학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중시하는 학문으로 마음이 곧 이치라 하여 주체성을 강조하였다. 계급 질서를 중시한 성리학과 달리 양명학은 백성을 계도의 대상이 아니라 동등한 존재로 보았다. 인간은 누구나 도덕적 본성과 합리적 이성을 갖추고 태어난 평등하고 존귀한 존재라고 양명학은 봤던 것이다.

양명학은 '앎은 함의 시작이며 함은 앎의 완성'이라 보며 실천의 지극함을 강조했다. 이러한 지행합일의 정신은 이건창 가계에 면면이 이어 내려왔다. 그것은 이건창의 조부인 이시원에게서 발현되었으니, 그는 병인양요 때 후손에게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않겠다며 자결했다.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

이건창의 조부인 이시원(李是遠, 1790~1866)은 이조판서, 예문관제학, 대사헌 등을 역임한 조선시대 문신이다. 벼슬길에서 물러나 고향인 강화로 돌아온 이시원은 병인양요 때 강화도가 프랑스 군에게 함락되어 약탈과 살육을 당하는 상황을 보고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다. 

강화읍성이 프랑스군에게 함락됐을 때 관리들은 모두 도망쳤다. 이시원은 "나라가 도탄에 빠졌을 때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는가. 나라의 녹을 먹었던 사람으로서 후세 사람들이 부끄럽지 않게 해야 하지는 않겠는가"라며 동생 이지원과 함께 비상을 마시고 자결했다. 당대의 이름났던 학자가 '역사 앞에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었다.
 
이건창 생가의 '명미당' 현판
 이건창 생가의 "명미당" 현판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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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원의 자결은 아는 것을 실행(知行合一)한 조선 선비의 꼿꼿한 정신이었다. '참됨만이 가야 할 길이며 결과의 대소고하는 따질 일이 아니'라고 했던 이시원이었다.

할아버지의 이러한 정신은 이건창에게 큰 영향을 끼쳐 그는 불의에 적당히 타협하지 않았다. 그의 삶은 추위를 무릅쓰고 꽃을 피우는 매화의 지조와 의리를 닮았다. '매화는 춥게 살더라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고 했다. 이건창의 삶이 그러했다. 

이건창은 15세에 과거 급제를 했다. 조선 과거 사상 최연소 급제였다. 나이가 어려 바로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몇 해 기다렸다가 19세 때에 비로소 관로로 나갔다. 23세에는 충청우도 암행어사가 되어 충청감사의 비행을 들춰냈다가 오히려 모함을 받아 귀양을 가기도 했다. 이후에도 그는 여러 차례 암행어사를 제수 받았다.

암행어사 이건창

고종 임금은 지방에 관리를 내려 보낼 때 "그대가 가서 잘못하면 이건창이 (암행어사로) 가게 될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이건창은 당당하고 공정하게 공무를 집행하였다.

38세(1890년)에 한성부윤이 된 이건창은 당시 청국인과 일본인이 우리 땅과 가옥을 마구 사들이는 것을 보고 외국인에게 우리나라 부동산을 팔아넘기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실시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소유권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이 문제를 일으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강화 양도면 건평리 이건창 묘소.
 강화 양도면 건평리 이건창 묘소.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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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고 참된 길을 걷고자 했던 이건창이었다. 참됨만을 따랐던 탓으로 그의 벼슬길은 유배로 끝나곤 했다. 세상과 불화하지 않고 편히 살려면 적당히 타협도 해야 하는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벼슬길은 순탄하지가 않았다.

사회적 모순이 극도로 치닫던 구한말이었다. 양심을 지키며 살기에는 버거웠을 시대였다. 이건창은 나라에서 내리는 벼슬을 모두 사양하고 고향인 강화도로 내려왔다. 한양을 떠나 강화로 온 이건창을 임금은 계속 불렀다. 그러나 그는 나가지 않았다. '벼슬이냐 유배냐'고 고종은 최후통첩을 했지만 그는 차라리 유배를 택했다. 
  
이건창은 구한말시대 지식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맑고 고운 시문으로 구한말 시단을 빛낸 문장가였으며 대쪽 같은 기개와 신념으로 불의와 타협하기를 거부한 전통시대 관리의 모범이었다. 

맑고 밝은 사람, 이건창

강화 화도면 사기리의 이건창 생가는 대대로 지행합일의 정신을 지킨 양명학자들의 가택이었다. 1996년에 복원한 이건창 생가는 구한말 명문가의 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박하다. 백성을 계도의 대상이 아니라 평등한 존재로 보았던 양명학자의 집이라서 이렇게도 단출하고 질박한 걸까.

정승과 판서를 지낸 명문가의 집이 일반 백성들이 살았을 집과 별다르지 않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은 고사하고 좁고 나즈막한 초가집이다. '명미당' 현판만이 홀로 또렷하게 남아 '맑고 밝은' 이 집의 정신을 나타낼 뿐이다.
 
탱자나무 가시와 이건창 묘소.
 탱자나무 가시와 이건창 묘소.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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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목숨을 바치고, 대쪽 같이 곧은 결의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던 삶이었다. 또 나라를 찾기 위해 만주로 떠났던 이건창 가문의 정신을 사기리 이건창 생가에서 찾아본다. 아는 것을 실천한다는 지행합일의 정신을 느껴본다. 

남녘에서 올라오던 꽃 소식이 강화에까지 당도했다. 그 사이에 매화 꽃잎도 벙긋 입을 벌렸다. 사기리 이건창 생가에는 어떤 꽃이 피었을까. 매화를 사랑했던 이건창이었다. 한양을 떠나 강화로 올 때 애정하던 매화나무를 이삿짐 위에 얹어서 왔던 그였다. 이건창 생가에 매화나무를 심는 것은 어떨까. 이건창과 그의 가문의 올곶은 기개와 자존을 한 그루 매화나무가 나타낼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강화뉴스'에도 게재합니다.


태그:#이건창, #이건창생가, #월사매, #명미당, #양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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