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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풍경
 교실 풍경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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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배움의 연속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삶에는 배움이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에게 일을 배울 수도 있고, 공부를 배울 수도 있고, 인격과 인성을 배울 수도 있다. 우리가 살면서 그 배움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접하는 때가 학창 시절일 듯하다.

모든 사람들이 학교에서 자신의 평생 잊지 못할 은사님이나, 잊히지 않는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자신에게 평생 영향을 주는 선생님을 만나는 것 또한 자신의 복인 것 같다. 좋은 사제 지간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막상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영향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자식을 둔 부모 입장에서 이렇게 아이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선생님을 만난다는 건 무척이나 행운이다. 우리 아이들도 학교를 다니면서 이렇게 만난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금 고등학교 3학년인 아들도 초등학교 5, 6학년 때 만났던 선생님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합리적, 논리적 사고와 자기주장 및 표현력이 좋은 아이로 커 갈 수 있었던 것도 그 2년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아들에게뿐만 아니라 부모인 우리에게도 오랜 시간 잊히지 않는 멋진 아들의 스승님으로 기억 속에 머물 것 같다.  

전교생 앞에서 웅변대회, 그 나비효과 

어릴 적 내게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나는 학창 시절 선생님이 계셨다. 초등학교 5학년 담임이셨던 선생님은 다른 또래 애들보다 작았던 내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이야기들을 많이 해 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매사에 포기가 쉬웠던 내게 적당한 승부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게 내기를 걸어오시기도 했었고, 4학년 때까지 학업 성적이 그다지 우수하지는 않았던 내게 공부하는 방법도 알려주셨다. 

다른 애들보다 일찍 학교를 입학했던 내겐 같은 반 친구들이 동급생임에도 불구하고 한 살 많은 형, 누나나 다름이 없었다. 평소 외향적인 성격도 아니었고, 이런 나이 차까지 한몫 더해져 조금은 더 주눅 든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내게 리더십은 내 속 어딘가를 모두 뒤져도 나올 것 같지 않았던 성향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런 내게 늘 '할 수 있다'를 말씀해 주셨고, 친구들을 많이 배려하는 좋은 어린이로 착한 어린이 상도 추천해 주셨다. 

이런 선생님 덕에 학급 부반장의 소임도 맡았던 나였지만 제일 기억에 남는 건 남들 앞에 서는 게 늘 자신 없었던 내게 가장 큰 변화를 준 사건이 발생했다. 선생님의 추천으로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게 됐다. 학급에서 반장이 빠지면 반장을 대신해 조회, 종례 인사도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던 내게 전교생 앞에서 웅변을 한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원고 작성까지야 어떻게든 했지만 웅변대회에 나갈 생각을 하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웅변대회 연습보다 오히려 웅변대회 날에 학교를 빠질 수 있는 방법을 더 많이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졌을 정도였다. 하지만 선생님은 매일 학교 수업이 끝나면 날 교실에 남겨 선생님이 직접 웅변 지도를 해 주셨고, 결국 웅변대회 당일까지 선생님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으며 전교생 앞에 서게 됐다. 

단상에 선 나는 긴장감에 머릿속이 아득해지고,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기까지 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게 내 떨리는 다리가 들키지 않도록 큰 단상이 전교생 학생들과 작은 내 몸 사이에 놓여있어서 내 다리는 보이지 않았었다. 하지만 내 떨리는 목소리까지는 감출 수가 없었고, 그렇게 내 떨리는 목소리는 마이크를 따라 학생들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정말 어디에라도 숨고 싶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라 멈출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때 우연히 고개를 돌리다 선생님을 바라봤고, 선생님은 입 모양으로 '자신 있게 해(그때는 그렇게 보였다)'와 오른손 엄지 척 포즈로 긴장했던 내 마음이 조금씩 자신감을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다. 

"이 연사 힘차게, 힘차게 두 손 모아 외칩니다~"

그렇게 내 생애 첫 웅변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요즘이야 웅변 학원이나 스피치 학원들이 있지만 1984년 그 시절 특히 지방에는 특별히 돈을 받고 사설로 웅변을 가르쳐주는 곳은 없었다. 당연히 내게 웅변대회를 추천한 것도, 지도한 것도 담임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의 지도와 배려로 교내 대회지만 첫 웅변대회에서 입상까지 할 수 있었고, 그 이후로 많은 학생들 앞에 서거나 발표를 할 때에도 부끄러워하거나, 떠는 일이 없어졌다. 

학교를 졸업하고도 한동안은 선생님과 연락을 하면서 지냈고, 내 어머니께서도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달라졌던 아들을 지켜봐 왔기에 10여 년을 선생님과 연락을 하고 지낼 정도로 감사의 마음을 항상 갖고 계셨다. 내가 군대에 갔을 때도 어머니는 선생님과 연락을 하고 지내셨고, 다 큰 제자가 늘 기특하고 대견하셨던 선생님은 어머니를 통해 내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어머니 생전에 말씀하셨다. 

선생님이 정년 퇴임을 하고 나서는 연락이 끊어졌지만 숫기 없고, 수줍음 많던 11살 그날부터 내겐 늘 감사하고, 고마운 스승님이셨다. 살아계신다면 이젠 일흔이 훌쩍 넘으셨을 나이일 테지만 내 머릿속에는 아직도 선생님의 온화한 미소와 제자를 위해 아낌없이 엄지 척을 보내주셨던 선생님의 믿음에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든다. 스승의 날의 의미가 많이 퇴색하기는 했지만 5월의 중심의 어느 날 빨간색 카네이션을 가슴에 한가득 달고 활짝 웃으시던 그 날의 선생님 얼굴이 생각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개인 브런치에도 함께 연재됩니다.


태그:#스승의날, #스승, #선생님, #멘토,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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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일상과 행복한 생각을 글에 담고 있어요. 제 글이 누군가에겐 용기와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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