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경술국치날 경복궁에 걸린 일장기
▲ 경복궁에 걸린 일장기 경술국치날 경복궁에 걸린 일장기
ⓒ 추준우

관련사진보기

 
1910년 8월 22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이 날 서울의 최고 기온은 섭씨 29도(일본 신문 보도)가 넘는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날의 을씨년스러웠던 날씨와는 또 달랐다.

이날 이른 아침 용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분주하게 한성(서울)부내로 이동하였다. 완정무장한 일본군은 한성부 내의 요소요소에 분산 배치되었다.

서울 남산에는 일본군의 대포가 창덕궁과 덕수궁 등 왕궁을 겨냥하고 시민들이 많이 모이는 종로 거리를 향해 정조준을 하고 있었다. 서울 거리에 15보(步) 간격으로 일본 헌병 한 명씩이 배치되어 삼엄한 경계망을 펴고 있었다. 계엄령과 같은 분위기였다. 일본 헌병과 경찰은 한국인 두 세 명만 모여도 강제로 해산시키고 저항하면 사정없이 폭행하면서 끌어갔다. 

일제는 위협과 강압 그리고 황제의 서명도 없는 병탄조약을 쿠데타적 수법으로 강행하였다. 대한제국을 병합한 문건은 형식상으로는 대한제국의 황제가 일본의 황제에게 통치권의 양여를 자청하여서 일본 황제가 이 요청을 수락한 것으로 꾸며져 있다. 

병탄조약에 서명한 '경술7적'은 다음과 같다.

    경술 7적

 총리 이완용
 내부대신 박제순
 탁지부대신 고영희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궁내부대신 민병석
 시종원경 윤덕영
 중추원의장 김윤식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할 때 얼마나 교활하고 강압적이었는지, 그리고 경술7적의 반민족 행위는 역사의 필주를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8월 22일 늑약을 체결하고 1주일 뒤인 29일 발표하였다. 이유는 순종황제의 즉위 3주년 축하행사를 치룬 다음에 해달라는 요청 때문이다. 나라를 망치고도 순종의 즉위 행사를 거행하려는 망국군주와 매국대신들의 행태는 차마 역사에 기록하기도 부끄러운 비사(悲史)라 하겠다. 

망국의 비보를 들은 신규식은 다시 음독자결을 시도하였다. 그런데 함께 있던 나철의 제지로 이번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살아 남아서 광복운동을 벌이자는 설득이었다. 병탄 후 하루가 다르게 급속히 황폐되어가는 조선사회의 시대상을 「생각한 바를 읊노라」는 제하의 시를  지었다. 

 청산은 옛 모습을 잃고
 낙엽은 지는 가을 알리네
 밉살스럽구나 돈에 미친 장삿군들
 다투어 관장사에 달라붙으니. (주석 2)


망국노의 신세가 된 그는 향후 해야 할 일을 구상하면서 나라가 망하게 된 원인을 분석하였다. 중국 망명 초기에 쓴 『한국혼』의 한 대목이다. 

아아! 우리나라가 망한 원인은 법으로 다스려야 할 정치가 문란해지고 기력이 쇠약해지고 지식이 트이지 못하는 데다 쓸데없이 남에게 아첨하며 게으르고, 공연히 자존심만 세우거나 지나치게 열등감을 느끼며, 파벌을 만들어 싸우는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이런 여러 가지 원인은 모두 하늘이 주신 양심을 잃은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 양심을 잃은 것은 또한 일종의 건망증을 낳게 하였으니, 

 첫째 선조들의 가르침과 종법을 잊었고, 
 둘째 선민(先民)들의 많은 공로와 쓸모 있는 재능을 잊었고, 
 셋째 국사(國史)를 잊었고, 넷째 국치(國恥)를 잊어버렸으니, 

이렇게 잊기를 잘하면 나라는 망하기 마련이다. (주석 3)


주석
2> 김동훈 외 편역, 『신규식 시문집』, 6쪽, 민족출판사(북경), 1998.
3> 『전집①』, 54~55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독립운동의 선구 예관 신규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신규식, #신규식평전 , #예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