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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랑에 빠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나는 종종 만화가 안내하는 세계와 사랑에 빠진다.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거부할 수 없는 '덕질'의 대상이다.

30년 전에는 빨간 머리 강백호와 북산의 아이들(<슬램덩크>, 다케히코 이노우에)이 그 대상이었고, 토토로와 하야오의 친구들도 빼놓을 수 없다. 올 봄에는 기어이 카마도 탄지로와 귀살대의 모험(<귀멸의 칼날>, 만화 원작가 고토케 코요하루)으로 이어졌다. 점점 나이 50에 가까워지는 반백의 중년임이 분명하지만, 나는 다시 만화의 주인공이 얘기하는 긍정과 희망 그리고 언젠가 이루어질 인연을 기대한다.

30년 전 슬램덩크를 떠올리게 만들다
 
활활 타오르는 주황색 불꽃의 렌코쿠 코쥬로.
 활활 타오르는 주황색 불꽃의 렌코쿠 코쥬로.
ⓒ 워터홀 컴퍼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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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2021년 1월 27일 국내 개봉, 아래 '극장판 귀멸의 칼날')을 주목하게 한 것은, 극장에 걸려 있던 활활 타오르는 주황색 불꽃의 렌코쿠 코쥬로였다. 기사를 통해 얻은 정보로는 일본에서의 <극장판 귀멸의 칼날> 수익이 지금껏 나의 최애 작가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2021년 상반기 누적 관객 200여만명을 기록하며 국내 최고 흥행 영화로 등극했다는 소식이다.

<극장판 귀멸의 칼날>은 이미 스물 세 권의 원작 만화가 출간된 작품이었다. 코로나19로 오랫동안 극장에 가지 못하던 날이었지만, 나는 어딘가 숨어 있던 용기를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려서 지난 2월 영화를 예매했다. 영화를 예매했을 뿐이지만, 나는 내가 몰입할 수 있는 덕질의 대상을 발견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영화를 보기도 전부터 설렜다. 

새로운 세계를 보기 위한 준비는 길고도 험난했다. 원작 만화로는 이미 스물 세 권이 출판되었지만, 이번 극장판은 만화책 8권의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긴 것이라고 했다. 극장판 이전의 이야기는, 이미 2019년에 티브이용 애니메이션으로 26부작이 제작되어 방영이 완료되었다고도 했다. 어쩔 수 없다. 극장판을 만나러 가기 전에 밤을 새워서라도 그들이 그려내는 세계에 대해 충분히 알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덕질의 대상에 대한 예의일 테니 말이다.   

마침 구독하던 OTT 서비스에서 스물여섯 편의 티브이 애니메이션을 발견했고, 그대로 밤을 새워서 그들의 이야기에 몰두하는 동안, 30년 전에 <슬램덩크>를 처음 만났던 스무 살 즈음의 내가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그렇게 스무 살의 열정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방문한 극장. 나는 목숨을 걸고 동료를 지켜내는 그들의 삶과 죽음에 눈물을 쏟아내었다. 엔딩 크레딧 말미에 등장한 주인공을 보면서 그대로 극장에 주저앉아 통곡을 했을 정도였다.  

<극장판 귀멸의 칼날>은 메이지 유신 이후 격변기의 일본을 배경으로 욕망에 사로잡혀 스스로 도깨비가 되어버린 인간들이 존재하는 세상을 그린다. 내가 본 이 영화는 욕망에 빠진 어른들을 되돌리려는 젊은이들의 용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세상을 지켜내기 위한 우리 모두의 연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죽음에도 굴하지 않고 긍정과 희망을 얘기하는 주인공들이 순진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욕망이란 것에 잡아먹힌 지금의 세상을 보고 있자니 스물이 되지 않은 그들에게서 포기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발견하는 나를 본다.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높은 요즘 이 영화가 이 정도의 성공을 거둔 것은 '충성 관객들의 호감도' 때문이겠지만, '미래에 대한 긍정과 희망의 이야기가 지금의 시대와 들어맞는 부분'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 무거운 주제를 경쾌하고 가볍고 매력적인 작화로 그려낸 작가의 능력도 대단하고. 

오랜만에 느껴보는 덕질의 쾌감
  
슬램덩크 포스터는 예전에 후쿠오카의 점프샵에 들렀다가 사온 것이고, 후안 미로가 그려준 FC 바르셀로나의 75주년 기념포스터, 왕가위의 <해피투게더> 포스터까지 있습니다. 그 뒤로 보이는 것이 이번에 새로 모아놓은 카마도 삼총사들입니다.
▲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찬 거실 슬램덩크 포스터는 예전에 후쿠오카의 점프샵에 들렀다가 사온 것이고, 후안 미로가 그려준 FC 바르셀로나의 75주년 기념포스터, 왕가위의 <해피투게더> 포스터까지 있습니다. 그 뒤로 보이는 것이 이번에 새로 모아놓은 카마도 삼총사들입니다.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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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퉁퉁 부은 채 극장을 나오자마자, 덕질은 진화를 거듭했다. 집에 넘칠 만큼 많은 피규어들과 포스터들을 덮어버리겠다는 기세로, 나를 울린 그들을 찾기 시작했다. 결국, 지난 2019년 한-일 무역분쟁 이후로 거들떠보지도 않던 일본 아마존의 문까지 열어 버렸다. 수많은 귀살대의 물건들이 거기에 있었고, 장바구니는 금세 가득 찼다.

'앗! 일본 물건은 사지도 쓰지도 않기로 했는데, 어쩌지?'

잠시 머뭇거렸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슬램덩크나 토토로 때부터 계속 주문처럼 외쳐대었던 '일본은 미워하되, 일본 사람들을 미워하지는 말자'며 죄책감을 달랬다(제발, 일본과의 관계가 제대로 풀려서, 이런 죄책감이나 미안함 없이 마음껏 좋아하는 것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결국, 몇 주가 지나지 않아 일본에서는 귀살대 삼총사와 그들의 스승인 렌코쿠 코쥬로, 토미오카 기유가 집안 여기저기에 자리를 차지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행복감이었다. 그렇지, 이런 게 덕질의 쾌감이었지, 하는 감각이 되살아났다. 
 
귀멸의 칼날 주인공들의 피규어를 사들이는 중입니다. 집안이 좋아하는 아이들의 피규어들로 넘쳐나는 중인데, 이 즐거움을 거부할 수가 없네요. 아! 토미오카 기유의 피규어는 다른 아이들보다 몇 배나 더 비싸게 주고 샀는데, 제일 작아요. 엉엉.
▲ 뿌듯한 덕질의 산물 귀멸의 칼날 주인공들의 피규어를 사들이는 중입니다. 집안이 좋아하는 아이들의 피규어들로 넘쳐나는 중인데, 이 즐거움을 거부할 수가 없네요. 아! 토미오카 기유의 피규어는 다른 아이들보다 몇 배나 더 비싸게 주고 샀는데, 제일 작아요. 엉엉.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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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만화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시카고 불스와 마이클 조던을 알려준 것도 슬램덩크였고, 무엇이든 결국 하고 싶은 것은 해야만 한다는 것도 정대만을 통해 배웠다. 30년 전 스무 살이었던 나는, 그가 안 선생님께 무릎을 꿇고 '농구가 하고 싶다'며 눈물을 흘릴 때 같이 울었고, 지금의 나는 렌코쿠 코쥬로가 '마음을 불태우며 이를 악물고 앞을 바라보라'고 말하며 죽어갈 때도 카마도 소년 삼총사와 함께 울었다. <슬램덩크>를 읽은 후로 30년이 지났지만, 나는 좋아하는 덕질의 대상 안에서 여전히 소년이었다. 
 
"모두의 힘입니다. 누구 하나라도 없었다면 이기지 못했을 거예요. 살아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기적, 당신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소중한 사람입니다. 최선을 다해 살아주세요. 사랑하는 동료들이여." - <귀멸의 칼날> 23권 중

만화 <귀멸의 칼날>은 지난 4월에 23권을 발매하며, 카마도 소년들의 이야기를 끝냈다. 인간끼리 잡아먹는 세상을 경고한 작가는, 살아남아 서로에게 희망이 되는 우리 모두의 연대를 응원하며 그의 세계를 마무리했다.

나의 덕질도 완결된 스물 세 권의 만화책을 사들이며 뿌듯해하는 것으로 일단 멈췄지만, 그들을 만날 미래를 기다리고 있다. 극장판 이후의 이야기를 티브이 애니메이션 2기로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 들린다. 언젠가는 내 최고의 캐릭터인 토미오카 기유의 스핀 오프 극장판도 만날 수 있을지도.   
 
30년 전에 온 가족이 함께 읽었던 <슬램덩크>는 그 후로도 몇 번이나 판형이 바뀌는 것들을 여러번 다시 사서 모았고, 일본 여행에서는 일본어 판으로 다시 출판된 것들도 한 질을 들였었습니다. 이번에는 <귀멸의 칼날>이 그 뒤를 이어 책장을 차지했네요. 뿌듯합니다.
▲ 슬램덩크에서 귀멸의 칼날까지...  30년 전에 온 가족이 함께 읽었던 <슬램덩크>는 그 후로도 몇 번이나 판형이 바뀌는 것들을 여러번 다시 사서 모았고, 일본 여행에서는 일본어 판으로 다시 출판된 것들도 한 질을 들였었습니다. 이번에는 <귀멸의 칼날>이 그 뒤를 이어 책장을 차지했네요. 뿌듯합니다.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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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활짝 펴고 살아라. 자신의 나약함이나 무능함에 아무리 좌절하고 쓰러져도, 마음을 불태우며 이를 악물고 앞을 바라봐. … 너희를 믿는다." - <귀멸의 칼날:무한 열차의 비밀> 중

덕질에는 대가가 따른다. 대상을 좋아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좋아하는 대상을 닮고 싶다는 숙제를 남긴다. 나는 코쥬로에게서 내가 되고 싶었던 어른을 보았고, 카마도 소년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았다. 나이가 오십이 되어간다고 스무 살 때 기대하던 삶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선, 이번의 덕질이 가르쳐준 대로, 제대로 멋진 어른이 되려는 나를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것만이 '언젠가 죽는' 나약한 인간이 수천 년의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유일한 동력일 테니 말이다. 그럼, 언제나처럼, 최선을 다해서 살아볼까!

태그:#귀멸의 칼날, #덕질, #슬램덩크, #오십의 덕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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