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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주살이 4년차에 접어들었다. 그 사이에 거셌던 제주 러시 현상은 다소 진정된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제주 이주를 꿈꾸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제주 1년 살이 혹은 1달 살이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이 글은 동아일보 기자와 세종대 초빙교수를 지내고 은퇴한 후 제주로 이주한 한 개인의 일기이자 제주에서의 생활을 소재로 한 수필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제주도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제주의 자연환경,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라 할 제주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읽을거리가 되길 기대한다.[편집자말]
 
비 온 다음날이면 반나절만 수고해도 싱싱한 고사리를 한 바구니 가득 채워 올 수 있다.
▲ 꺾어온 고사리  비 온 다음날이면 반나절만 수고해도 싱싱한 고사리를 한 바구니 가득 채워 올 수 있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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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생활에 새로운 재밋거리가 생겼다. 고사리 꺾기다. 4월이 되자 마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고사리 꺾으러 다니기에 따라나섰더니 재미가 쏠쏠하다. 제주가 고사리 천국인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지천으로 고사리가 많이 나는 줄은 몰랐다. 집에서 나와 숲길로 10분쯤만 걸어가면 고사리가 깔려 있다. 남들처럼 차를 타고 고사리 많이 나는 곳을 찾아갈 필요도 없다. 아무 때나 가고 싶으면 고사리 담을 배낭 하나 둘러메고 장갑 끼고 나서면 된다.

고사리 꺾는 것도 요령이다 보니 몇 번 경험을 하고 나서부터는 제법 속도가 붙는다. 아직도 숙련된 '선수'들에 비하면 똑같은 시간에 채취 실적이 절반 정도에 불과하지만 처음보다는 많이 익숙해졌다. 고사리 하나 발견하면 꺾는 동시에 눈길은 또 다른 고사리가 주위에 있는지를 짧은 시간에 스캔하는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풀 속에서 고사리를 얼른 구별해내는 것은 기본이다. 우거진 덤불 속에 키가 큰 고사리가 많다는 것도, 양지바른 곳보다는 음지에 많다는 것도.

나에게 고사리 꺾기의 묘미는 한마디로 발견의 즐거움이다. 목표로 정한 대상을 찾다가 마침내 발견했을 때의 가벼운 희열! 이 발견의 즐거움을 어쩌다가 한 번씩 누리는 게 아니라 순간순간 경험할 수 있으니 만족감은 더 커진다. 재수가 좋으면 고사리를 한 자리에서 연속으로 10개 이상을 꺾는 경우도 흔하다. 발견의 기쁨이 10배가 되는 행운이다.

또 고사리철 숲 속에선 유난히 휘파람새 우는 소리가 귀를 즐겁게 한다. 날씨 좋은 날, 숲 속 고사리 꺾기는 정말이지 오감만족 체험이다. 단, 말똥 밟지 않고, 가시에 찔리지 않고, 길 잃지 않는다면 말이다.
 
꺾어온 고사리는 끓는 물에 7-10분 정도 삶는다.
▲ 생고사리 삶기 꺾어온 고사리는 끓는 물에 7-10분 정도 삶는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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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신문 기사를 보니, 제주에서 길 잃었다는 신고가 1년에 120여 건씩 들어오는데 그중 절반이 4월에 발생한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고사리 찾아 조금씩 숲 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나중에는 방향 감각이 둔해져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가 어렵게 된다. 숲 속에 들어가면 특별히 랜드마크라 할 만한 게 없으니 자칫 길을 잃기 십상이다.

우리 마을 주변이야 익숙한 곳이니까 길을 잃을 염려가 없지만, 한 번은 아내와 둘이 고사리가 많다는 큰노꼬메 오름 부근으로 원정 갔다가 방향을 잃어 애를 먹은 적도 있다. 오름이 바라보이는 시야와 방향을 단단히 머릿속에 새기고 숲 속으로 계속 들어갔는데, 한참 정신없이 고사리를 꺾다 보니 어느새 안개가 깔려 시야가 흐려진 것이다.
 
족은노꼬메 오름에서 본 큰노꼬메오름
▲ 큰노꼬메오름 족은노꼬메 오름에서 본 큰노꼬메오름
ⓒ 김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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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노꼬메가 보이지 않으니 방향감각이 마비됐다. 저녁때가 가까워지는 무렵이었다. 이렇게 해서 길을 잃는 것이구나, 갑자기 긴장감이 엄습했다. 고사리 꺾기를 중단하고 길을 찾아 나섰다. 숲 속 길을 이리저리 헤쳐 나오자 저 멀리 송전탑이 보였다. 송전탑에 무언가 위치정보가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가보니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119로 전화해 송전탑 번호를 말하면 해결책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긴 것이다.

그 순간 저 멀리서 자동차가 지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반가웠다. 한걸음에 다다르니 산록도로에서 숲 속으로 난 좁은 길이었다. 산록도로로 나가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 갓길을 30여 분쯤 걸으니 큰노꼬메 주차장이 나온다. 이날의 행적을 그려보니 시계방향으로 크게 한 바퀴 돌아 원위치로 온 것이다.   

제주의 고사리 철인 4월에는 비가 많이 온다. 그래서 이때 내리는 비를 고사리 장마라고 부른다. 비가 오고 나면 고사리들이 부쩍 많아진다. 하룻밤 사이에 고사리들이 쭉쭉 올라오는 것이다. 우후죽순이라지만 우후고사리라고 해도 될 정도다. 비 온 다음날엔 새벽같이 고사리 선수들이 숲 속을 훑는다. 몇 시간이면 짊어진 배낭이 불룩해지고, 고사리 앞치마(고사리 담기에 편리하게 만든 것으로 오일장에 가면 몇천 원에 판다)도 빵빵해진다.

3월 말에서 5월 초 사이 제주의 중산간도로나 산록도로변에 자동차가 주차돼 있다면 거의가 고사리 꺾으러 온 사람들이 타고 온 차라고 보면 틀림없다. 요즘은 제주 '청정고사리'라고 알려지면서 관광객들도 고사리 꺾으러 숲으로 몰려든다.

사실 한라산 기슭 일대가 모두 고사리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한라산 국립공원 지역과 시험림 혹은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곳은 피해야 한다. 그리고 출입금지 표시가 있는 사유지도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된다. 간혹 고사리 재배지를 만날 수 있는데 당연히 꺾어가면 문제가 된다.
 
삶은 고사리는 그대로 햇볕에 한나절 정도 말려야 한다.
▲ 고사리 말리기 삶은 고사리는 그대로 햇볕에 한나절 정도 말려야 한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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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 무렵 제주도의 들판과 숲으로 가면 도처에 고사리가 흔하다. 이때면 나이 지긋한 제주 '삼춘'들이 고사리로 목돈을 마련한다고 한다. 말린 고사리 100그램에 1만 원 이상 하니까 고사리철에 일삼아 고사리 꺾으러 다니면 수백만 원 정도는 모은다는 것이다.

고사리를 꺾어 오면 곧바로 삶아서 햇볕에 말린다. 다 말린 고사리는 비닐봉지에 넣어 보관하는데, 육지에서 지인들이 찾아오면 한 봉지씩 선물로 준다. 돈으로 쳐봐야 얼마 안 되지만, 받은 사람은 무척 고맙게 여긴다. 바로 이 맛이 고사리 꺾기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발견의 즐거움에 이어 나눔의 기쁨을 누리는 순간이다. (2018.4)

태그:#고사리, #고사리꺾기, #고사리 장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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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봄 제주로 이주했다.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제주현대사의 아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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