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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나는 1884년 6월 2일 밤 늦게 미국 공사관의 별채에 들어간 후 이틀 동안 마음을 가다듬고 짐을 정리하며  휴식을 취했습니다. 공사관은 담으로 둘러싸인 넓은 공간이었고 총 8채의 집이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공사관 구역은 재미있게 작은 뜰로 나뉘어져 있고 각각의 경계에 기이한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습니다. 담장 문을 통과하지 하지 않으면 들어가기 어렵게 되어 있지요. 문은 기와로 된 작은 지붕을 이고 있고 곡선을 이루는 원뿔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나의 집은 그림같이 아름답습니다. 방은 두 개인데 창호문이 밝고 쾌적하였습니다. 방안에 그림,  커튼, 깨꿋한 매트, 야영 침대, 테이블과 의자를 놓으니 멋져 보였습니다.  공사관에 같이 사는 사람으로는 푸트 공사 부부, 비서관 스커더Scudder, 문물 수집차 와 있는 버나도우Bernadou 해군 소위, 그리고  한국인 통역으로 재기 발랄한 청년 윤치호 등이 있었습니다.

공사관의 내 거처는 좋았지만, 나는 곧 그곳을 떠나 조선인들이 사는 동네로 들어갈 것이었습니다.  
 
"이곳 저의 거처는 좋기는 하지만, 단지 임시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곧 서울 도심 속으로 옮겨, 토박이 조선인들 속에서 살 것입니다. 저는 가능한 많은 시간을 그네들 생활 가장 깊숙한 곳(heart of their life)에서 지낼 볼 생각이랍니다…….이 곳은 저의 모든 예상을 뛰어넘는 이상한  땅이랍니다. 제가 한 평생 결코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매우 매우 이상한 곳입니다. 앞으로 종종 편지로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1884.6.15일자 편지)


나는 조선에서 안전하고 쾌적한 공사관 거처가 아닌 조선인들 속에서 생활하겠다는 생각을 벌써부터 품고 있었답니다. 나는 그 문제를 이미 선상에서 서광범과 상의한 바 있었지요. 서광범은 좋은 생각이라며 서울 도심에 집을 한 채 마련해 보겠노라고 흔쾌히 대답했습니다. 얼마 후면 나는 서광범 등이 마련해 줄 집으로 옮겨갈 겁니다.

이제 처음으로 왕궁에 들어가 고종 임금을 만났던 일을 이야기 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조선에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조선 정부에서 아직 제물포에 정박중인 트렌톤호의 士官들을 초청하였습니다. 이에 사관들은 서울로 이동하여 엉성궂은 이국 스타일의 숙소 한 동(a tong)을 점유하였답니다.

나는 그들과 함께  고종 임금을 알현하였습니다. 정장을 차려 입은 미국인들을 짙은 자색 예복을 입은 고관들이 에스코트하였습니다. 조선 관리의 의상은 지난번 방미사절단이 뉴욕 5번가 호텔에서 미 대통령을 예방할 당시 입었던 것과 같았습니다.

우리는 왕궁으로 들어갔는데 곡선 형태의 기와를 이고 있는 웅장한 지붕 아래 세워진 단壇platform이 나타났습니다. 단의 중앙에 서 있는 왕의 얼굴은 햇살처럼 밝았습니다. 왕은 황금색 실로 수놓은 장엄한 비단 홍포를 입고 있었습니다. 왕의 양측으로는 환관이 한 명씩 시립 侍立하고 있었고 무장을 갖춘 두 명의 무관이 곁에서 호위하고 있더군요. 왕의 앞으로는 좌우에 두 줄로 고관들이 열을 지었는데 관복이 눈부셨습니다.

미국 사관들은 한 명씩 푸트 공사의 소개에 따라 왕에게 소개되었습니다. 소개가 다 끝나자 Phythian 함장이 임금에게 간단한 인사말을 한 후에 방문단은 물러났습니다. 왕은 우리를 매우 정중하게 맞아주었습니다. 고종의 첫 인상은 무척 좋았습니다. 나는 고국에 부친 편지에 이렇게 썼지요.
 
"나는 여태껏 조선의 왕보다 더 매력적인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왕은 작은 체구에 얼굴은 밝게 빛납니다. 언제나 미소를 띠고 있고, 천진스럽지만 지극히 지성적입니다. 여자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의 얼굴과 기품 있는 매너를 대하면 사랑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을 거예요."

 
알현이 끝난 뒤 우리는 다른 누각(pavillion)으로 이동하여 왕자를 만났습니다. 왕자는 열 두 살 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었습니다. 그의 용모도 또한 매우 매력적이었지만 궁중에 갇혀 있어서인지 창백해 보였습니다.

며칠 후에 왕이 선물을 보내왔습니다. 선물은 사관 전원은 물론 선상에 남아 있던 모든 인원들에게도 배분되었습니다. 가장 큰 몫은 함장과 내가 받은 것이었는데 그 품목을 보면,  굉장히 큰 화문석 돗자리, 정교하고 아름다운 대나무 주렴, window sreen 한 세트, 호피 두 장, 보통 부채 열 개, 접이식 부채 열 개, 감촉이 비누 같고 부드러운 녹색 凍石 두 박스 등이었지요. 다른 사관들에게는 각기 작은 돗자리 한 장, 짐승 가죽과 부채 몇 개가 배분되었고 그와는 별도로 배에 남은 인원들을 위해 280개의 부채가 할당되었지요.

트렌턴호 사관들이 서울을 떠나기 하루 전날 저녁에 민영익과 홍영식이 만찬을 베풀었습니다. 나도 물론 참석했지요.

16명의 기생이 연회장에 출연했습니다. 기생들은 몹시 화려한 옷으로 치장을 했고 행동은 얌전했습니다. 춤사위는 매우 우아하지만 동작이 몹시 느려 춤이라고 부르기도 좀 뭐할 정도였지요. 손과 발의 놀림 그리고 몸동작이 모두 매우 느렸습니다. 기생들은 흘러나오는 음악 반주에 맞춰 춤을 추었습니다. 음악 밴드는 세 개의 북, 하나의 가야금, 세 개의 피리로 이루어졌더군요.

나로서는 그 음악을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듣고 있으니 기묘한 느낌에 빠져들더군요. 전반적인 정조는 비탄에 젖어 있었습니다(mornful). 나는 왠지 모르게 그런 음악을 좋아합니다. 그런 음악은 내가 나고 자란 문명권으로부터 아득히 먼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갑니다.

어떤 불교신자가 말하더군요. 전생에 내가 조선인이었거나 동양인이었으며, 내가 이렇게 동양 문화를 좋아하는 것은 전생에 동양인으로서 즐겼던 바의 희미한 반향이라는 것입니다.

트렌턴호 사람들이 서울에 와 있는 동안에도 나는 매일 공사관 일로 눈코 뜰 새가 없었지요. 내가 유일한 한국어 소통 도구였기 때문이죠. 조선 고관들이 공사관에 종일 드나드는데 그들과 의사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은 저 밖에 없었지요. 트렌턴호 사람들이 서울을 떠나자 나는 녹초가 되었고  이틀 동안 몸져눕고 말았습니다.

태그:#조지 포크, #고종, #트렌턴호, #서광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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