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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서울 은평구의 다짐 스터디카페에서 학생들이 마스크를 쓴 채 공부를 하고 있다.
 지난 27일 서울 은평구의 다짐 스터디카페에서 학생들이 마스크를 쓴 채 공부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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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엔 방과 후 수업도, 야간자율학습(야자)도 없다. 지난 2016년 말 광주광역시교육청이 학생들의 선택권을 존중하겠다며 관 내 모든 고등학교에 일괄적으로 하달한 조치다. 학교마다 반강제적으로 참여하도록 한 오랜 관행이 2017년 벽두부터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교육청의 지침을 위반하는 학교는 행정, 재정적 불이익을 주겠다며 엄포를 놨다. 방과 후 수업을 개설해 선행학습을 진행하거나, 야자를 강제해 학생들의 선택권을 침해하는 사례가 접수되면 곧장 해당 학교를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공교육 혁신 방안의 일환이었다.

7교시 정규수업이 끝나면, 학생과 교사 모두 이후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였다. 굳이 야자를 희망하면 학교 도서관 등을 개방하고, 동아리 활동을 원하면 교육청이 나서서 지원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수요일을 '광주교육 공동체의 날'로 명명했다. 

그러나 강제적인 방과 후 수업과 야자가 사라지는 대신 학교에서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지게 될 거라는 교육청의 핑크빛 전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는' 우리 교육의 현실을 얕잡아본 게 패착이었다. 지금 수요일은 그저 일찍 귀가하는 날일 뿐이다. 

시행 후 도서관을 개방해 달라고 요구하는 아이도 없고, 남아서 동아리 활동을 하고 싶다는 경우도 없다. 물론, 학교에 남아서 교재 연구를 하거나 연수를 받고 교사 동아리 활동을 하는 교사도 거의 보질 못했다. 그저 매주 수요일을 '반공일(半空日)'이라며 좋아할 뿐이다. 

아이들이 가장 늦게 잠자리에 드는 날

사실 교사에겐 꿀맛 같은 휴식을 주는 날이다. 매일 네 시간 안팎의 정규수업과 한두 시간의 방과 후 수업에다 밤 10시까지의 야자 감독 업무가 겹치는 날이면 그야말로 파김치가 돼서 귀가한다. 주중 닷새 중 단 하루일 뿐이지만, 수요일의 휴식과 위로는 더 없는 활력소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수요일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놀랍게도 그들에겐 '반공일'이기는커녕 주중의 다른 요일보다 더 바쁘고 고통스러운 날이 된 듯하다. 아이들은 이구동성 심드렁한 얼굴로 수요일은 학교와 학원 숙제가 겹쳐 가장 늦게 잠자리에 드는 날이라고 대답했다. 

아이들에게 수요일은 학원 가는 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상담 도중 똑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었다. 국영수사과 등 수강 과목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수요일 하루만도 학원 세 곳에 다닌다는 한 아이는 귀가하면 얼추 자정 무렵이라고 말했다.

매주 수요일 하굣길 교문에는 아이들을 학원에 실어나르기 위한 미니버스가 늘어서 있다. 수요일은 주말과 더불어 학원에겐 '대목'이다. 학원마다 홍보물에는 어김없이 '수요일 특강'을 뽐내고 있다. '월화목금'은 학교에서, '수토일'은 학원에서 공부하는 날이라는 글귀도 보인다.

학부모라고 눙치며 교무실로 전화를 걸어 월별 학사일정을 묻는 이들의 태반은 학원 운영자들이다. 인근 학교의 학사일정을 고려해 특강을 개설하려는 의도다. 대놓고 학교의 방과 후 수업과 야자는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훈계하는 이들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학원은 학교에서 방과 후 수업과 야자를 운영하는 걸 극력 반대한다. 

아파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아이들

수요일 방과 후에 악기를 배우거나 친구들과 함께 모여 운동을 즐기는 아이는 없었다. 대입을 앞둔 고등학생이 악기를 배우는 건 사치라고 말하는가 하면, 운동을 즐기려고 해도 함께할 친구들이 없다고 했다. 학원에 가거나 집에서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거나, 둘 중 하나라는 거다. 

주중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되지 않느냐는 내 말에 아이들은 모두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도입 당시의 취지를 설명했더니, 대번 '공자님 말씀'이라며 비아냥거렸다. 다른 친구들 모두가 함께 쉰다면 모를까, 다 학원에 가는데 혼자만 안 갈 수는 없지 않으냐고 되레 반문했다. 

"일주일 동안 학원에 못 가고 집에 머물러 있으려니 불안해 안절부절 못하겠더라고요."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고 격리됐다 등교한 한 아이의 말이다. 그는 격리된 기간을 '잃어버린 일주일'이라고 표현했다. 교과별로 인터넷 강의를 찾아 듣는 등 나름 충실하게 보냈지만, 학교와 학원의 진도를 따라가지 못해 친구들보다 뒤처지지 않을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아파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거다. 일단 책상에 앉아 교과서라도 펼치고 있어야 안심된다고 말한다. 학원에 가는 것도 공부하는 데 도움이 돼서라기보다 가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정답지를 보고 베낄지언정 밤늦도록 문제를 풀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아이도 있다.

'광주교육 공동체의 날'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걸었지만, 만 6년이 지난 지금 껍데기만 남았다. 취지는커녕 그 이름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다. 매주 수요일 방과 후를 비워 자신의 꿈과 끼를 찾아 다양한 과외 활동을 장려하겠다는 건 지나치게 나이브한 발상이었다. 

교육청이 내세운 '학생 선택권 존중'은 사실상 '학원 선택권'을 보장하는 것으로 귀결됐다. 심지어 학부모들 사이에서 '사교육을 돕기 위한 공교육의 빅픽처'라는 우스갯소리마저 나오는 실정이다. 매일 밤 10시까지 아이들을 학교에 잡아두면 학원 영업에 지장이 클 수밖에 없다.

다른 요일에도 악영향 끼치는 '수요일 학원 러시'
 
지난 22일 종로학원 강북본원에서 수험생들이 수업을 듣고 있다.(자료사진)
 지난 22일 종로학원 강북본원에서 수험생들이 수업을 듣고 있다.(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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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 구조가 온존한 현실에서 성적에 대한 불안감이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않는 한 학원은 늘 승자일 수밖에 없다. '영업시간'만 보장된다면, 아이의 성적이 오르든 떨어지든 상관없다. 성적이 올랐다면 더 없는 홍보 수단이 될 테고, 떨어졌다 해도 문제 될 건 없다. 학원에 다니지 않았다면 더 곤두박질쳤을 거라고 둘러대면 그만이다.

아이들의 '수요일 학원 러시'는 다른 요일에까지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교육청의 지침에 따라 방과 후 수업과 야자 참여 여부를 자유롭게 정하도록 하고 있는데, 언제부턴가 학원 수업이 선택의 기준이 돼 버렸다. 학원 수업 시간표가 학교의 학사일정에 우선하는 셈이다. 

학급별 야자 출석부가 요일별로 들쭉날쭉한 것도 그들의 학원 수업 시간표를 배려할 수밖에 없어서다. 주중 사흘은 학원에 가고, 나머지 이틀은 야자에 참여하겠다는 아이를 막을 순 없다. 그렇듯 요일을 달리하는 경우가 허다해 감독하며 출석을 부르다 보면 헷갈릴 때가 많다.

학원 가는 날로 전락한 '광주교육 공동체의 날'. 이는 몸통을 그대로 둔 채 꼬리만 흔들어서는 게도 구럭도 다 잃게 된다는 교훈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아무리 취지가 바람직하다고 한들,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이상은 신기루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부디 교육청에 바란다. '학생 선택권'을 존중하라고 일선 학교를 다그치기보다 대학 서열화를 해체하는 등 학벌 구조를 혁파하는 데에 힘써 달라. 아이들의 입에서 'SKY, 서성한중경외시' 따위의 흥얼거림이 사라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학생 선택권'이 보장될 것이라 확신한다.

한때 '광주교육 공동체의 날'이 교사들을 위한 복지 차원에서 기획된 거라는 억측이 난무하기도 했다. 닷새 중 하루는 아이들을 학원에 내맡기고 쉬겠다는 의도 아니냐는 거다. 하긴 시행 초기 일부 교사들이 친목 도모를 빙자한 일탈 행위를 저질러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했다.

교육은 교사의 수준을 넘을 수 없고, 교사가 행복해야 아이들도 행복하다는 것 역시 틀린 말은 아닐 테다. 그러나 아이들이 학교에서 야자를 하는 대신 밤늦도록 학원에서 보내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나 몰라라 하는 건 무책임하다. 교육청을 탓하라며 뒷짐 지는 것도 비겁하다. 

수요일이 교사들에겐 주말과 같고, 아이들에겐 주중과 다를 바 없다. 오후 4시 40분. 퇴근길 학원행 미니버스에 오르는 아이들의 퀭한 눈을 보면서 괜히 미안해진다. 어쩌면 아이들이 행복해야 교사도 행복해질 수 있음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어야 진짜 교사 아닐까 싶어서다. 

태그:#광주교육 공동체의 날, #방과 후 수업, #야간자율학습, #학벌 구조, #학생 선택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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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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