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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래형 사고라는 오래된 진단

흔히들 한국사회 산재사고의 특징으로 '재래형 사고'를 꼽는다. '후진국형 혹은 재래형 사고'는 떨어짐, 끼임, 부딪힘 등과 같은 유형으로, 노동자들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안전난간을 설치하는 등의 간단한 조치만으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사고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예방이 가장 쉬운 재해'로 간주되지만 지금까지 산재사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가장 흔하고, 가장 오래됐고, 가장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재해'이기도 하다.

'재래형 사고'라는 말의 의미는 한국사회가 이뤄낸 과학기술의 발전과 민주주의의 진전이 '산업안전' 영역에서 지체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전에 대한 국가적 책임과 사회적 관심이 증가하는 반면 상식의 수준에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위험천만한 노동이 사망사고를 계기로 언론에 보도되는 순간, 그 사고의 반시대적 낯설음에 대한 언어적 표현 중의 하나인 '재래형 사고'.

그래서 '아직도'와 '여전히'의 수식어를 달고 등장하는 재래형 사고는 간단한 안전조치만으로도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는 진단과 함께 그조차도 무시하고 이윤을 쫓는 기업의 행태에 대한 강력한 사회적 비난을 일으키기 쉽다. 그러나 이는 지난 시기 강화되어온 법적 규제에도 산재사고는 어떻게 오랫동안 반복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문제의 확장적 사고를 제한하기도 한다.

반복은 동일한 것의 연속이 아니다. 반복되려면 이전과 다른 것을 포함해야 한다. 따라서 사회구성적 관점에서 '재래형 사고'는 절반만 맞는 이야기이다. 떨어짐과 같은 사고 유형은 반복되지만 재래형 위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낙후된 기계장치와 설비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기업의 규제를 완화하며 추진된 '구조개혁' 혹은 '기업혁신'이 만들어낸 적극적인 조치의 결과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험의 외주화'라는 말은 '재래형 사고'가 반복되는 이유를 '안전 불감증'에 대한 도덕적 비난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신자유주의가 적극적으로 생산해낸 위험으로 정의한다는 면에서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위험'은 늘 시민과 노동자의 영역에서 먼저 제기되지만, 종종 '비과학적 주장'으로 폄하되어왔다.

질병분류표에는 근골격계질환에 대한 질병코드가 부여되어 있지만, 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추진된 기업 구조조정이 노동강도 강화로 이어지고, 이것이 노동자의 신체에 집단적인 고장을 일으킨 2000년대 초반의 그 사회적 질병에 대한 질병코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위험의 외주화'는 '재래형 사고'에 대한 시대적 명명을 갱신한다. 즉 현재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50인 미만 사업장, 50대 이상, 비정규직 노동자로 집중되는 위험은 산업의 재구조화가 마련한 차별의 계단 맨 아래에 집중되며, 위험은 과학적, 법률적으로 정의된 '유해·위험요인' 만으로 파악 불가능한 노동 내부의 차별과 혼합체가 된 새로운 위험의 양상을 띠고 있다.

위험의 외주화, 새로운 위험을 둘러싼 싸움

노동조합과 시민·노동단체가 산재사고를 고용구조와 연동해 본격적으로 문제제기한 계기는 2011년 인천공항철도의 심야 선로작업으로 하청노동자 5명이 사망한 사고였다. 이 사고는 '열차진입 정보'가 철로 위에서 작업 중인 하청노동자에게 전달되지 않아 발생했다. "어떤 기술공학적인 문제도, 막대한 비용도 원인이 아니었다. 안전 관련 법과 지침, 수많은 매뉴얼을 무력하게 만드는 현실을 목도한 것"(최명선, 2016, '위험의 외주화 방지를 위한 20대 국회의 과제' 토론회 토론문)이었다. 사망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하청노동자의 위험에 대한 문제제기와 언론보도가 이어져왔지만 사회적으로 확산되지 못했다.

그러다 2016년 '구의역 '김군' 사망사고'로 알려진 스크린도어 하청 정비원의 사망사고가 이전과는 다른 빠른 속도로 사회에 전파됐다.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열차에 치인 원인에 대한 원인을 빠르게 거슬러 올라가며 이명박 정부 시절 공기업 선진화라는 명목으로 진행된 스크린도어 유지보수 업무의 외주화가 지목되었다. 비로소 '위험의 외주화'라는 용어가 사회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에 대한 사회적 문제가 들끓던 시기였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만들어낸 말의 길을 따라 구의역 '김군' 어머니의 목소리에도 힘이 실렸다.

"메트로 설비처장이란 사람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보고를 안 한 아이의 과실이라 했습니다… 우리 아이의 잘못이 아님을 반드시 밝혀 주십시오."

서울시는 노동조합, 노동·시민단체, 전문가 집단이 참여한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했고, 조사보고서를 제출했으며, 제출된 권고안에 대한 이행계획을 수립, 이행보고서를 제출했다. 우리사회에서 처음으로 '위험의 외주화'에 대한 종합적이고 구조적인 원인 분석을 해 보고서가 제출된 것이다. 그러나 보고서의 이행주체는 서울시와 서울메트로로 한정되었다. 이 보고서의 사회적 효과가 중앙정부의 안전보건관련 법의 정비와 감독행정의 강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 하청노동자 김용균의 사망사고는 구의역 '김군' 사고로 촉발된 '위험의 외주화'에 대한 제도적 지체를 사회적으로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정치적·사회적 요구로 급진전시켰다. 같은 해 12월 여당의 미온적인 태도로 무산될 뻔한 산업안전보건법 전부 개정안이 '위험의 외주화 방지법', '김용균법'이라는 사회적 이름을 얻어 통과되었다.

그러나 개정된 산안법은 '김용균법'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위험작업에 여전히 도급을 광범위하게 허용하고 있었다.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이라는 비판이 법 개정과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개정된 산안법'을 둘러싼 사회적 쟁점이 '위험의 외주화'를 해결할 수 있는 법인가 여부를 두고 벌어졌다. 즉 재래형 사고라는 일반적인 접근에 대한 시대적 대체였다.

완고한 안전전문가들은 여전히 '위험의 외주화'라는 고용상의 차별적 위험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위험은 하청 뿐만 아니라 정규직에게도 발생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안전시스템'의 문제이며, 비정규직의 문제는 고용정책의 문제이지 안전정책에서 다뤄야할 범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위험의 외주화'는 다분히 대중선동적이고 비과학적인 말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스템의 문제'를 짚기 위해서는 위험의 비균질적 메커니즘을 살펴야 한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주디스 슈클라는 <공포로부터의 자유주의>에서 "그 체제가 참을만한 것인지는 거기서 희생을 겪을 가능성이 가장 큰 이들, 그 사회의 권력으로부터 가장 거리가 먼 이들에게 물어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안전은 '공간'적 특성이 내포된 개념이다. 따라서 작업장 전반의 안전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원·하청 구조에서 공간은 차별적으로 할당되며, 공간을 지배하는 지배력은 공간을 넘어서는 도급계약상의 하청노동의 사물화와 관련이 깊다.

김용균 사고 1년 후 태안발전소를 찾았을 때 원청의 안전담당자는 김용균 사망사고 현장을 알지 못했다. 사고 현장을 끝내 찾지 못한 그는 '한 번도 와 본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청노동자들이 작업하는 공간에 한 번도 와 볼 필요가 없는 안전시스템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김용균 사고 이후 정부와 노동계, 전문가 그룹이 모여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석탄화력발전소의 원하청 구조가 안전시스템을 취약하게 만드는 구조적 원인을 조사했다. 이후 3년간 정부와 5개 발전사, 김용균 특조위원들이 이행점검을 진행했고, 3주기에 맞춰 이행점검 보고서를 발간했다.

많은 제도적 보완이 이뤄졌으며 그만큼 제도적 절차가 증식했다. 이것으로 안전시스템이 진전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가? 슈클라의 지적대로 발전소 안전시스템의 현재 상태는 그것으로부터 가장 거리가 먼 이들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그러나 특조위원이 정부의 이행점검단에 참여하기 전 2년간 정부는 단 한 번도 하청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바가 없었다.
 
발전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전태일 다리에서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발전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전태일 다리에서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 공공운수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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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의 외주화, 수행되지 않은 과학

'위험의 외주화'를 둘러싼 싸움은 언던 사이언스(undone science)1), 즉 '수행되지 않은 과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정부, 산업의 제도 속에서 어떤 지식은 지식으로 생산되며, 동시에 특정 지식은 '체계적 비생산'이 이뤄진다. 특정 지식의 '체계적 비생산'은 특정 집단의 사회적 배제를 전제한다. 하청노동, 여성노동, 장애노동, 이주노동의 형태들이 야기하는 위험의 고유성과 복합성이 배제되면 위험은 단순해지면서 편파적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적어도 최근 우리 사회에서 안전과 관련된 과학과 지식의 진전이 있어왔는가를 따져보기 위해서는 사이언스의 영역이 아니라 언던 사이언스의 영역, 수행되지 않은 채 배제되어 지식으로 간주되지 않은 지식의 영역을 살펴봐야 한다. 현재 수행되지 않은 과학의 영역을 사회적으로 제기하고 그 지식을 생산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제도는 이러한 비생산된 지식에 얼마나 열려있는가?

구의역 '김군'과 김용균에 이어 이천 한익스프레스 냉동창고 화재참사로 38명의 노동자가 사망했고 이를 계기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운동이 일어났을 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안전을 위해서는 처벌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완고한 교과서적 원칙을 내세워 법 제정의 효과를 의심했다. 기업처벌의 강화보다는 예방을, 즉 산업안전보건법 개정과 안전감독의 전문성을 강화해야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산재 유가족들의 단식과 노동조합, 노동단체들의 집요한 싸움으로 중대재해법이 통과된 이후, 처벌이냐 예방이냐의 이분법 대신 처벌과 예방의 상호적 효과가 발생했다. 정부 차원에서 산업안전보건청 논의가 본격화된 것이다.

반면에 한익스프레스 화재참사에 대해 해당 발주처는 무죄판결이 확정되었고, 김용균 1심 판결에서 원청 경영자의 책임 역시 무죄 판결되었다. 지연된 정의는 체계적으로 배제된 특정 지식의 공백을 포함한다. 지식은 생산되고 유통되며, 사회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위험의 외주화'에 대한 지식 생산은 이제 막 시작인지도 모른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위험의 외주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이전보다 확산되었지만, 정작 '정규직화'에 대한 요구는 그만큼 힘이 실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고용문제는 빠진 안전대책이 강화되었지만 외주화에 따른 구조적 위험은 강화된 안전규제 아래로 더 깊숙이 숨어들었거나 더 복잡한 절차의 증식으로 메워지고 있는 중이다. 사회적으로 '정규직화'만 빼고 취할 수 있는 안전조치의 가이드라인이 작동되는 듯이 위험의 외주화를 제기하는 모든 영역에서 정규직화는 더디게 진행되거나 멈추어져있다.

1) 언던 사이언스(Undone Science)란 연구될 필요성이 있음에도 연구되지 않은 채 외면당하는 과학의 영역을 뜻한다. 경제사회학자 데이비드 헤스(David Hess)가 낸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전주희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으로,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이기도 합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4월호에도 실립니다.


태그:#산재_사망, #언던_사이언스, #위험의_외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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