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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통해 16세기 사림시대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당시 사림들의 일상사를 살펴 봄으로써 역사적 교훈을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편집자말]
16세기 무렵에는 남자가 처가 집으로 장가드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한동안 처가에 살다가 분가를 하여 나올 때까지는 처가의 장인, 장모와 함께 살았다.

또한 이 시기에는 제사도 남녀 형제가 모두 돌아가면서 모시는 윤회봉사(轮回奉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관습 때문인지 사위와 처가의 관계는 매우 친밀했다. 아들보다 오히려 사위와 관계가 더 친숙한 것을 볼 수 있다.

미암 유희춘은 아들 유경렴과 딸을 두었는데 아들은 자신과 막역한 친구였던 하서 김인후의 사위가 되었고 딸은 해남윤씨 윤항의 아들 윤관중과 결혼하였다. 윤관중은 해남의 유력한 재지사족 가문인 해남윤씨 윤항의 아들이었다. 그의 형인 윤구는 호남 3걸 중에 한명으로 학문에 출중하였으며 그의 동생인 윤행과 윤복 또한 과거에 합격하여 이 시기는 해남윤씨가 재지사족 명문가의 기틀을 확고히 다질 무렵이다. 윤항은 벼슬길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유희춘은 해남윤씨가와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를 통해 지방에서 재지사족의 위치를 굳건히 유지할 수 있었다.

사위 윤관중을 사랑한 유희춘

<미암일기>를 보면 유희춘은 아들인 유경렴보다 사위 윤관중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매일이다시피 언급하고 있다. 서로 함께 생활하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미암이 유배가 있는 동안이나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윤관중은 미암을 대신해서 여러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인지 유희춘은 사위 윤관중을 각별히 챙긴다. 윤관중은 스스로 과거에 합격할 만큼 그리 학식이 뛰어난 자가 아니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미암은 당시 경렴이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사위 윤관중을 아들 못지않게 관심을 기울이며 관직을 갖게 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사위가 선전관으로 임명된 것도 유희춘이 노력한 결과였다.
  
유희춘의 사위 윤관중의 묘가 해남읍 금강산 서쪽 능선 모목동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유희춘의 아버지 유계린과 형 유성춘의 묘가 있었던 곳이다.
▲ 유희춘의 사위 윤관중의 묘역 유희춘의 사위 윤관중의 묘가 해남읍 금강산 서쪽 능선 모목동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유희춘의 아버지 유계린과 형 유성춘의 묘가 있었던 곳이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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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사에서 학문에 정진한 윤관중

윤관중은 공부하는 것보다 사냥이나 노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 때문에 아버지 윤항과 유희춘을 걱정하게 만들었는데 유희춘은 이런 사위에게 학문에 열중할 것을 타이른다. 이에 윤관중은 마음을 다잡고 인근 사찰에 들어가 학문에 정진하게 된다.

윤항이 자식의 달라진 모습에 대해 사돈인 유희춘에게 편지로 "감격하오니 어떻게 영공의 은혜를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윤관중은 명망 있는 장인의 보살핌 아래서 학문과 인격을 닦는 기간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1570년 12월 28일
윤탄지의 편지가 다시 왔다. 내가 답하기를 관중이 참판의 깨우침에 발분하여 파래공罷萊公처럼 사냥을 그만두고 독노천讀老泉처럼 글을 읽게 되었으니 뱀이 용이 되는 날을 곧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가문의 경사가 이보다 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였다.

윤관중이 공부를 하기 위해 들어간 곳은 해남에 있는 큰 사찰인 대둔사였다. 윤관중은 이곳에서 참고 견디며 결국 대성할 것이라고 하자 유희춘은 그 뜻이 장하다고 칭찬한다.

1570년 12월 21일
사위 윤관중이 대둔사에 있으면서 사람을 보내와 말을 전하기를 "제가 마땅히 가서 뵈어야겠지만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왔기 때문에 참고 견디어 가며 결국은 대성할 작정입니다"라고 하였다.

윤관중에 대한 배려는 아들 하나를 맡아 교육시키는 것과 같았다. 유희춘 내외는 꿈을 꾼 것을 두고 벼슬을 할 징조라고도 하였는데 1573년 1월 드디어 선전관이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듣는다. 아들이 선전관이 되자 윤항은 매우 기뻐하며 여러 가지 선물을 유희춘에게 보낸다.

1572년 12월 22일
未人이 꿈에 하늘이 맑고 날이 밝은데 노랑개가 하늘을 돌면서 소를 쫓아다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는 윤관중이 벼슬을 할 징조다.

1573년 2월 3일
윤목사 행이 관중의 기쁜 소식을 듣고 아주 기뻐하여 5승 무명베 10필과 큰 전복 1첩과 양정구화(구죽신) 1부를 주었다.

미암과 해남윤씨가는 윤관중을 통해 혼맥관계가 이루어짐으로써 수시로 서울과 지방의 교류가 이어진다. 이는 미암이 귀양가 있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윤관중은 미암의 대리인으로서 집안의 대소사 일을 거의 맡아 하였다.

아버지 윤항은 아들이 머물고 있는 서울의 사돈댁에 쌀, 목화, 생선 등을 보냈으며, 어려울 때는 윤관중이 도움을 청하여 생활하기도 하였다. 또한 윤항은 유희춘이 집 짓는 데 필요한 물품과 노비를 보내거나 유희춘이 빌린 집의 내청을 내주도록 주선해 주기도 하며, 유희춘이 귀양 가 있는 동안 책을 맡아 주기도 한다. 이렇게 도움을 주는 윤항에게 유희춘은 인사 부탁을 들어 주거나 장지壯紙를 보내는 것 등으로 보답하였다.
유희춘은 유배에서 해배된 후 관직에 있으면서도 해남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 간다. 그것은 해남지역 사족들과의 교유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해남윤씨 사위 윤관중과의 관계, 해남에 살고 있는 누이, 그리고 첩에 대한 관심과 책임감 때문이기도 하였다.

미암은 결혼 후 담양으로 거쳐를 옮기기는 하였지만 사위 윤관중과의 혼인 관계로 인해 서울과 해남은 끊임없이 인편이 오간다. 먼 변방의 땅끝 해남이었지만 16세기 무렵 서울과 지방의 교류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사위 윤관중의 묘는 유희춘이 묻힌 해남 모목동에 있다. 유희춘은 이곳 모목동 묻혔다가 지난 1972년 담양군 대덕면 비차리로 옮겼다. 윤관중의 묘 아래는 금남 최부의 사위였던 김분의 묘가 있다. 금강산 서쪽 줄기의 중턱쯤에 자리하고 있어 아래를 내려다 보면 명당자리임을 알 수 있다.
 
윤관중 묘역 바로 아래에는 최부의 사위였던 김분의 묘가 있다. 최부는 유희춘의 조부로 이곳 모목동 일대에 친족들이 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최부의 사위 김분의 묘역 윤관중 묘역 바로 아래에는 최부의 사위였던 김분의 묘가 있다. 최부는 유희춘의 조부로 이곳 모목동 일대에 친족들이 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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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미암일기, #윤관중, #선전관, #최부, #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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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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