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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2700m 정상에 펼쳐진 광활한 땅, 아씨 고원
▲ 아씨 고원 해발 2700m 정상에 펼쳐진 광활한 땅, 아씨 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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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를 태우던 카자흐스탄 알마티행 항공기는 오후 늦게 인천공항을 이륙했다. 애초보다 5시간 늦은 출발이었다. 모처럼 나선 여행이라는 걸 알기라도 하듯 항공기는 몸을 사리며 연착을 거듭했다. 이륙하는 순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떠났던 소소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인천공항을 찾은 건 2년 8개월 만이다. 지구촌을 휩쓴 코로나19 탓에 그동안은 옴짝달싹 못했다. 10년 만에 찾은 알마티는 상전벽해였다. 풍부한 자원을 팔아 번 돈으로 한껏 치장한 모습이다. 추레했던 옛 흔적은 간데없고 사람도 건물도 세련미로 넘쳤다. 올해 1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던 공화국 광장 주변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붙잡혔다는데 시민들 표정은 평온했다.

다채로운 자연경관의 카자흐스탄 
 
국립공원 입구부터 비포장 도로를 50여분 달린 끝에 오를 수 있는 아씨고원에서 관광객들이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 아씨 고원 국립공원 입구부터 비포장 도로를 50여분 달린 끝에 오를 수 있는 아씨고원에서 관광객들이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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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공존한다. 카자흐스탄을 필두로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까지 발음도 쉽지 않은 나라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 옛 소련연방에 속했던 이들 나라는 1991년 독립했다. 카자흐스탄은 이 가운데 가장 넓고 가장 잘 산다. 한반도 12배, 남한 27배 크기다.

그런데도 인구는 1900만 명에 불과해 시가지를 벗어나면 사람 보는 게 쉽지 않다. 그 중심에 위치한 카자흐스탄은 한때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교역 통로였다. 중국 시안(長安)에서 출발한 대상 행렬은 사막과 설산을 지나 로마까지 6400km를 오갔다. 훗날 실크로드로 명명된 이 길을 따라 사람과 물자, 문명, 종교가 섞였다. 지금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에서 맏형이다.

알마티는 경제 수도, 북쪽 누르술탄(옛 아스타나)은 행정 수도다. 1997년 12월까지는 알마티가 행정수도였다. 한여름 알마티를 찾은 건 설산과 사막, 초원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매력 때문이다. 서울 한낮 기온이 33~34도를 오르락내리락할 때 만년설을 볼 수 있다는 건 특별한 경험이다.
 
해발 3200m 침블락 산까지는 케이블 카를 타고 4500m를 이동해야 한다. 산 정상에 쌓은 눈 위에서 즐거워 하는 동남아시아 관광객들 모습이 보인다.
▲ 해발 3200m 침블락 산 해발 3200m 침블락 산까지는 케이블 카를 타고 4500m를 이동해야 한다. 산 정상에 쌓은 눈 위에서 즐거워 하는 동남아시아 관광객들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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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수많은 인종과 문화가 뒤섞인 까닭에 발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고려인 강제 이주 역사를 되짚어 볼 생각도 했다. 체류하는 동안 아씨(Assy) 고원과 차른(Charyn) 협곡, 침블락(Shymbulak) 산을 다녀왔다. 고려인 강제 이주 역사와 우슈토베 이야기는 기사 '고려인 유랑 85년, 이제는 끝내야'에 소개했으니 오늘은 자연경관을 중심으로 여행기를 적는다.

카자흐스탄은 넓은 땅덩어리만큼 자연경관도 다채롭다. 불타는 사막지대부터 한여름에도 한기가 느껴지는 고산지대, 그리고 말과 양이 풀을 뜯는 초원까지 다양하다. 알마티에서 250km 떨어진 아씨 고원은 해발 2700~3000m에 위치한 고원이다. 텐산(天山)산맥 자락에 위치한다.

가는 길은 순탄치 않다. 비포장을 포함해 3시간 30여 분을 달려야 한다. 국립공원에 들어서 뚜르겐 협곡을 끼고 40여 분을 오르는 비포장 길은 아찔하다. 깎아지른 절벽은 낙석 위험이 도사리고, 마주 오는 차량과 교행하려면 비켜서야 한다. 4륜 SUV만 운전할 수 있다. 그렇게 거친 길을 오르다 보면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인다. 해발 2700m 산 위에 이렇게 넓은 평원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능선을 덮은 초원, 바람에 흔들리는 야생화는 그대로 수채화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 아래서 사람과 자연은 하나가 된다. 고원에 오른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양팔을 벌린 채 바람에 몸을 맡긴다. 양과 소, 말 떼가 어우러진 아씨 고원은 우리말 '아씨'처럼 곱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천문대 너머로 말로만 듣던 만년설이 눈부시게 빛난다.
 
해발 2700m 아씨 고원에는 6~8월이면 유목민들이 유르타를 설치하고 소와 양, 말을 방목한다.
▲ 아씨 고원 해발 2700m 아씨 고원에는 6~8월이면 유목민들이 유르타를 설치하고 소와 양, 말을 방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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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씨 고원 저편은 키르기스스탄이다. 산을 사이에 두고 국경이 마주하고 있다는 게 우리에게는 생경하다. 갑자기 정상에서 BTS 노래와 우리말이 들려왔다. 말로만 듣던 BTS 아미였다. 한국에서 왔다는 내게 그들은 "BTS를 통해 한국말을 배우고 있다"며 수줍게 말했다. '국뽕'일망정 뿌듯했다. '정치만 잘하면 좋을 텐데'라는 한탄이 절로 나왔다.

만년설 쌓인 정상, 거대한 냉장고
 
미국 그랜드 캐니언을 닮은 불타는 차른 협곡 사이로 관광객들이 걷고 있다.
▲ 차른 협곡 미국 그랜드 캐니언을 닮은 불타는 차른 협곡 사이로 관광객들이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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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은 차른 협곡으로 운전대를 돌렸다. 미국 그랜드 캐니언을 방불케 하는 불모의 땅이다. 서울은 폭염이라는데 이곳은 더했다. 하늘에 가까운 탓이다. 차른 협곡까지는 고속도로가 잘 나 있다. 협곡으로 내려선 순간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지구별이 아닌 4차원 풍광이다. 154km에 이르는 협곡은 물과 바람과 햇볕이 빚은 걸작이다. 안내 표지판은 1억 8000만 년 침식과 퇴적 결과라고 적고 있다.

협곡 양옆으론 붉은 사암이 울창한 숲을 이뤘다. 동물 형상부터 다양한 형태다. 걷는 내내 모퉁이를 돌 때마다 펼쳐진 풍광에 압도됐다. 협곡 끝에는 차른 강이 흐른다. 이렇게 건조한 땅, 어디에서 물이 솟았는지 생각할수록 수수께끼다. 풍부한 수량에다 물은 차갑다. 손을 담고, 얼굴을 씻으며 지구별에 새긴 오랜 역사를 되짚었다.

협곡은 작은 트럭을 개조한 차량이 오가며 관광객을 실어 나른다. 돌아갈 때는 대부분 차를 이용한다. 이글거리는 태양을 맞으며 온 길을 되짚어갈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차른 협곡에서 돌아오는 길, 혹성 탈출을 떠올리게 했던 풍광이 내내 잊히지 않았다. 아씨 고원과 차른 협곡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관광자원이다.
 
젊은 이들이 가장 많이 찾는 알마티 아르바뜨 거리. 주변은 세련된 카페와 로드숍이 즐비한 핫한 거리다.
▲ 아르바뜨 거리 젊은 이들이 가장 많이 찾는 알마티 아르바뜨 거리. 주변은 세련된 카페와 로드숍이 즐비한 핫한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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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관광 인프라는 열악하다. 아직은 인식이 미흡한데다 먹고사는 데 치중해야 하는 때문이라고 짐작해본다. 마지막 날은 침블락 산에 올랐다. 2012년 동계 아시안게임이 열린 곳이다. 가파른 스키 슬로프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아이스링크 '메데우'로 유명하다. 케이블카로 4500m를 이동해 해발 3200m 산에 올랐다. 40여 분 만에 천산(天山)을 오른다는 게 불경스럽지만 문명의 이기에 감사했다.
 
알마티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콕토베 언덕. 석양이 물든 알마티 시가지가 아스라하다.
▲ 콕토베 언덕 알마티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콕토베 언덕. 석양이 물든 알마티 시가지가 아스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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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설이 쌓인 정상은 닭살이 돋는 거대한 냉장고나 다름없었다. 온난화 탓에 많이 녹아내려 이전만 못 해도 한여름에 눈을 볼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평생 눈 구경을 못 하는 동남아에서 온 관광객들은 신기한 듯 깡충댔다. 담요를 두른 이들도 많다. 침블락에서 내려와 콕토베 언덕에 올랐다. 석양과 야경을 감상하기 좋아 현지인들에게 사랑받는 곳이다. 콕토베 언덕은 다양한 사람들로 빼곡했다.

카자흐스탄은 공식 통계에 따르면 120~130개 민족이 공존한다. 내 눈은 5~6개밖에 구분하지 못하는데 120~130개라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아무튼 다민족 다문화 국가답게 카자흐스탄에서는 민족차별이라는 개념이 희박하다. 국민들도 민족화합 정책을 적극 반긴다.
 
관광객들에게 야간 포토존으로도 이름났던 알마티 시청사. 올해 초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에 습격 당해 불에 타고 파괴돼 보수에 들어갔다.
▲ 알마티 시청사 관광객들에게 야간 포토존으로도 이름났던 알마티 시청사. 올해 초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에 습격 당해 불에 타고 파괴돼 보수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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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알마티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250여 명이 숨지고 4500여 명이 체포될 만큼 극렬했다. 시위는 장기 집권에 따른 부패와 소수가 부를 독점하는 양극화에 대한 반발이었다. 전임 대통령 나자르 바예프는 2019년 3월 물러날 때까지 30년 동안 통치했다. 후임 토카예프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토카예프는 러시아군을 투입해 시위를 진압하고 반대파를 숙청했다. 진압군 발포로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다. 불에 탄 대통령궁과 시청, 방송사 건물에서 긴박했던 당시를 가늠해 본다.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고,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자국민을 진압한 카자흐스탄 사태는 국가란 무엇인지 돌아보게 한다. 오아시스 문명의 후예들에게 필요한 성장통이라고 여기고 싶다.

다시 카자흐스탄에 올 때면 지금보다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경제발전에 그치지 않고 사람과 자연을 배려하는 긍정적 변화가 있기를 소망한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입니다.


태그:#텐산산맥,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국뽕, #다민족 다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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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문, 여행, 한일 근대사, 중남미, 중동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중남미를 여러차례 다녀왔고 관련 서적도 꾸준히 읽고 있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 중심의 편향된 중동 문제에는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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