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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여 전 제주로 이주해 살면서 그 어떤 이슈보다도 관심을 끈 것은 바로 제주4·3이었다. 그 이전까지 4·3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곤 현기영 선생의 소설 <순이삼촌>을 읽은 것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인식수준에 머물렀으니 막상 제주에 와서 4·3과 관련한 참혹한 사건의 기록을 접하거나 관련 현장을 볼 때마다 그 참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북촌 너븐숭이 학살 현장이나 오라리 방화사건 현장이 그랬고, 다랑쉬굴의 기막힌 비극의 전말이 그러했다. 당시 제주도 인구 30만의 10분의 1로 추산된다는 희생자 규모에서도 4·3은 나의 상상력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4·3이 안겨준 충격을 나름대로 소화하면서 관련기록을 열심히 찾아 읽었고, '잃어버린 마을' 같은 현장에도 가 봤다. 이제는 어느 정도 4·3의 대체적인 윤곽은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아직도 4·3은 의문투성이다.

그중 하나가 4·3 당시 마을에 성(城)을 쌓았다는 사실이다. 토벌대가 성을 쌓아 한라산을 거점으로 게릴라전을 전개하는 무장대가 주민들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인데, 어디에, 어떻게 쌓아, 어떤 식으로 활용했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바닷가 마을이든 중산간 마을이든 광범위하게 성을 쌓았다고는 하는데 아직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다.

4·3 유적지 돌아보기에 나섰다

마침 좋은 기회가 생겨 지난 주말, 축성 현장을 둘러보고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제주4·3연구소가 마련한 2022 열린 시민강좌 '양조훈의 <4·3 그 진실을 찾아서> 함께 읽기' 중 '사연 많은 4·3 유적지 돌아보기'에 따라나선 것이다.

이날의 현장답사 코스는 ▲오라리 방화현장 ▲다랑쉬굴 ▲선흘리 낙선동 4·3 성 순으로 진행했는데, 몇 차례 가 본 앞의 두 군데보다는 낙선동 4·3 성에 가장 관심이 갔다. 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30여 명의 답사팀이 마지막 현장 낙선동으로 향했다.

1948년 11월 21일 선흘리가 초토화작전으로 불타버리자, 마을 사람들은 인근 야산에서 생활하거나 해변마을로 소개됐다. 이듬해 봄 낙선동에 성을 쌓고 집단거주하게 되는데, 2009년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해 4·3 성의 대표적인 유적지가 된 곳이다.

낙선동 4·3 성은 한마디로 주민들과 무장대를 분리시킨 후 토벌한다는 작전개념에 따른 것이다. 들판의 모든 먹거리와 가옥을 철거하여 적에게 양식과 거처의 편의를 주지 않으면서 성벽을 지켜내는 견벽청야(堅壁淸野)의 토벌작전이었다.

이런 초토화 작전이나 전략촌 구축은 1930년대 일본군이 만주에서 항일투쟁기지를 섬멸하기 위한 수단으로 감행한 만행이었다. 그런데 바로 독립한 대한민국 땅에서 일본군 지원병 출신 지휘관들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점이 아이러니 하지 않을 수 없다.
 
안시택 선흘4.3유족회장이 어렸을 때 목격한 성 안팎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현장 증언 안시택 선흘4.3유족회장이 어렸을 때 목격한 성 안팎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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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읍 중산간 마을인 선흘리 낙선동에 도착하니 안시택 선흘4·3유족회장이 답사팀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시택 회장의 가이드로 성을 따라 돌면서 설명을 들었다. 성은 가로 150미터, 세로 100미터, 높이 3미터, 폭 1미터 크기로 총 둘레가 500미터에 달하고, 거의 직사각형의 형태였다. 안 회장은 "성 내부는 약 5천평 정도고, 많을 때는 250세대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어렸을 때 이곳에서 무장대와 토벌대가 교전하는 것도 목격했다"고 말했다.

축성에 쓰인 돌은 불에 탄 집터의 돌담이나 밭담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1949년 4월 한달만에 성을 완공했는데, 해안가인 함덕리 수용소 등지에서 생활하던 선흘 주민들뿐 아니라 조천면 관내 타지역 주민들도 축성작업에 동원했다. 부녀자는 물론 국민학생들도 동원했다고 한다. 안시택 회장은 당시 성을 쌓았던 주민들은 하나같이 등짐을 져서 돌을 날랐기 때문에 어깨나 등이 다 벗겨질 정도였다고 증언했다.

'함바집'이라는 임시가옥은 수용소나 마찬가지
 
3미터 높이의 성벽을 쌓고 그 외곽에 깊이 2미터 폭 2미터의 해자를 팠다.
▲ 성벽과 해자 3미터 높이의 성벽을 쌓고 그 외곽에 깊이 2미터 폭 2미터의 해자를 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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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외곽으로는 폭 2미터, 깊이 2미터 정도의 도랑을 파서 해자를 만들었다. 해자 하면 보통 성 주위를 파고 물을 채워 적의 침투를 저지하는 용도로 만들지만, 낙선동의 해자는 물 대신 가시덤불을 채워 넣었다고 한다.

축성의 목적이 무장대와 주민의 접촉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던 만큼 성은 하나의 전략촌 개념으로 구성돼 있다. 그래서 1949년 4월 성이 완공되자 '함바집'이라고 부른 허술한 임시가옥을 지어 선흘리 주민들을 집단적으로 생활하게 했다. 감시와 통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함바집은 일종의 수용소나 마찬가지였다. 길게 돌담을 쌓고 군데군데 나무기둥을 세워 나뭇가지를 얹은 지붕에 띠를 덮었다. 한 동마다 5세대가 살았는데, 칸막이는 억새를 엮어 대신했고 방, 마루, 부엌의 구분도 없었다. 처음엔 50세대가 여기서 살았지만 점점 불어났다.
 
제주도의 전통적인 화장실 형태였던 통시를 성벽에 덧붙여 만들었다.
▲ 통시 제주도의 전통적인 화장실 형태였던 통시를 성벽에 덧붙여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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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전통적인 화장실에 해당하는 통시는 성벽 곳곳에 붙여 15개 정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성 담벼락에 반원 모양으로 돌을 쌓아 사람이 들어가서 앉을 수 있게 2개의 디딤돌을 놓았다고 하니 얼마나 열악한 구조인지 짐작할 수 있다.

성 안에는 무장대의 침투를 감시하기 위한 군사시설(?)도 산재해 있다. 우선 사각형 모양의 성 모서리마다 2층 구조의 경비망루를 지어 16살 이상의 여성과 노약자들이 주로 보초를 섰다고 한다. 당시 마을주민 중 젊은 남자들은 무장대 동조세력이나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이미 많은 희생을 치른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청년들은 이듬해 발발한 6.25전쟁 때 대부분 자원입대했다(빨갱이로 몰리지 않으려고 해병대 등에 자원 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5명으로 구성된 보초 가운데 1명이 보초를 설 동안 나머지 4명이 대기하던 곳이다.
▲ 보초대기소 5명으로 구성된 보초 가운데 1명이 보초를 설 동안 나머지 4명이 대기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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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2미터 높이에 구명을 내 총을 겨누거나 밖을 살펴볼 수 있게 했다.
▲ 총안 성벽 2미터 높이에 구명을 내 총을 겨누거나 밖을 살펴볼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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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는 보초대기소도 있었다. 하룻밤에 5명씩 배치되어 1명씩 교대로 보초를 설 동안 나머지 4명이 대기하던 곳이다. 또 성벽 2미터 높이에 총안(銃眼)을 만들어 바깥을 향해 무기를 겨누거나 내다볼 수 있게 했다. 이 총안은 사람의 키보다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계단으로 올라와야 했다. 각 성벽마다 2개씩 사방에 모두 8개가 있었다.
 
통행증이 없으면 출입이 금지됐으며, 야간에 통행금지시간이 넘으면 성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 정문초소 통행증이 없으면 출입이 금지됐으며, 야간에 통행금지시간이 넘으면 성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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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하는 초소도 설치했다. 성벽 중앙에 높이 1.5미터의 원추형으로 지어진 4개의 초소가 있었다. 특히 정문초소는 주민들이 출입할 때 통행증을 검사하는 곳으로, 야간에는 통행을 금지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성 안의 주민들을 통제하고 경비순찰을 담당하는 경찰지서도 설치해 얼마나 삼엄한 상황이었는지 짐작케 한다. 지서 건물은 20평 가량의 초가집으로, 성 내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1.5미터의 내성(內城)을 쌓아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무장대 습격에 대비했다. 주민들은 파견경찰의 부식 마련에도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토벌대는 왜 이곳에 성을 쌓았을까? 성이 들어선 자리는 '뱅듸왓'이라는 농토였는데, 지형이 높아 무장대의 근거지였던 선흘곶 등 사방을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자가 전망대에 올라보니 한라산은 물론, 반대편으로는 멀리 함덕바다까지 보였다.

팽나무라는 슬픈 역사의 목격자

선흘리 주민들은 1954년 통행제한이 풀리면서 비로소 고향마을로 돌아가 집을 지어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일부는 그냥 성 안에 정착해 오늘날의 낙선동을 이루고 있다. 성을 쌓는 데 이용한 돌은 다시 원래의 밭담이나 돌담의 용도로 되돌아갔는데, 낙선동 성벽은 마을을 지켜주는 방풍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으로 꼽힌다.

4·3 당시 기존 마을에 축성을 하고 성문 입구에 초소를 세워 감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반해 낙선동 유적지는 인위적으로 성을 축조해 새로운 마을(?)을 이루게 하고 주민들을 감시, 통제했던 당시의 모습을 재현했다는 특성 때문인지 다크투어리즘 유적지로 꼽힌다. 이날도 순례객들이 찾아와 인증 스탬프를 찍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날 유적지 해설을 맡은 양조훈 전 4·3평화재단 이사장은 "성 안에 재현한 함바집 등 유적들이 너무 튼튼하게 잘 지어져 당시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고 지적하며 좀더 원래 모습에 충실하게 꾸밀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안시택 선흘 4·3유족회장은 "원형대로 허름하게 복원해 놓으면 쉽게 망가지는 등 관리에 어려움이 있어 그렇게 만든 것 같다"고 밝혔다. 가능하면 원래의 모습대로 재현하되, 관리의 효율성을 높일 방안을 찾아야 할 듯싶다.

4·3 때 만들어진 성은 다랑쉬 오름의 은신처와 같이 당시의 비참했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유적지다. 선흘리 낙선동 성을 돌아보면서 묘한 생각이 들었다. 4·3 때 불탄 집이 제주도 전역에 무려 4만여 채에 달하고, 그로 인해 '잃어버린 마을'로 지정된 곳이 130여 곳에 달한다고 한다. 사람뿐 아니라 집도 마을도 엄청나게 사라진 것이다.

반면 낙선동은 척박한 농토에 불과했지만 1949년 성 완성 이래 어느새 설촌 73년의 역사를 지닌 어엿한 마을로 자리잡았다. 성의 정문 앞에는 1949년 봄 토벌대가 한라산으로 무장대를 추적하러 나갔다가 캐다 심었다는 커다란 폭낭(팽나무)이 서 있다. 엄혹했던 시기에 이곳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을, 사라진 것과 생겨난 것들을, 모두 굽어본 역사의 목격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의 정문 입구에 서서 엄혹한 시절의 참상을 지켜본 팽나무
▲ 폭낭(팽나무) 성의 정문 입구에 서서 엄혹한 시절의 참상을 지켜본 팽나무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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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의 언론계 생활과 7년의 대학 초빙교수 생활을 끝내고 2018년 봄 제주로 이주했다.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제주현대사의 아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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