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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2022년 10월 20일 영국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밖에서 사임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2022년 10월 20일 영국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밖에서 사임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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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총리 리즈 트러스가 사퇴 의사를 표했다.

그는 지난 9월 6일 보수당 당원투표를 통해 영국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과제는 산적해 있었다. 당시 영국의 노동조합은 역사적인 규모의 파업에 돌입해 있었고, 1920년대 이후 100년 만의 총파업에 돌입할 것이라는 예측까지 나왔다. 취임 후 이틀만에 국왕 엘리자베스 2세가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장례식과 찰스 3세의 즉위식 비용을 두고 여러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인플레이션으로 위기를 맞은 경제와 브렉시트 이후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외교 관계까지 생각한다면 트러스는 분명 어려운 시기에 총리직에 올랐다.

격동의 6주

하지만 트러스의 임기는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욱 혼란스러웠다. 국왕의 장례식이 끝나고 트러스가 내놓은 첫 번째 안건은 '감세'였다. 트러스 총리와 쿼지 콰텡 재무장관은 450억 파운드 규모의 감세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재원 확보 계획은 불분명했고, 이는 곧 대규모 국채 발행으로 이어질 것이란 예측이 나왔다. 파운드화는 폭락했고, 금리는 급등했다.

결국 트러스는 감세안을 철회했고, 재무장관 쿼지 콰텡은 경질됐다. 트러스는 보수당 경선에서 리시 수낵(Rishi Sunak) 전 재무장관을 누르고 총리직에 올랐다. 그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리시 수낵의 법인세 인상을 비롯한 증세안이 보수당 기층 지지층에게 반감을 불러왔기 때문이었다. 결국 감세안을 철회한 순간, 리즈 트러스의 정통성은 사라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재무장관뿐 아니라 내무장관도 곧 경질됐다. 수엘라 브레이버먼(Suella Braverman) 내무장관은 정부 공식 문서를 개인 이메일로 보내 보안 문제로 해임됐다. 하지만 브레이버먼 장관은 해임 뒤 "실수를 저지르지 않은 것처럼 위장하고, 모두가 그 실수를 볼 수 없는 것처럼 계속하는 것은 진지한 정치가 아니"라며 사실상 트러스를 향한 쓴소리를 남겼다. "이 정부가 공약을 존중하고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보수당 내에서는 트러스에 대한 반발이 빗발쳤다. 정부 직책을 맡지 않는 평의원(Backbencher)을 중심으로 정부 정책과 총리의 불통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Politico)>의 여론조사에서는 리즈 트러스 총리의 지지율이 12%까지 떨어졌다. 영국 보수당의 지지율은 23%, 노동당의 지지율은 52%로 30%p 가까운 격차가 생겼다.

결국 보수당의 평의원회, '1922 위원회' 위원장 그레이엄 브래디(Graham Brady) 등과의 논의를 거쳐 리즈 트러스는 총리직 사임을 발표했다. 두 달도 되지 않는 짧은 임기였다. 트러스는 영국 역사상 최단기간 재임한 총리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다음 총리는?
 
왼쪽부터 리시 수낙 전 영국 재무장관, 수엘라 브레이버먼 전 영국 내무장관, 벤 월러스 영국 국방장관, 페니 모돈트 보수당 원내대표, 보리스 존슨 전 총리.
 왼쪽부터 리시 수낙 전 영국 재무장관, 수엘라 브레이버먼 전 영국 내무장관, 벤 월러스 영국 국방장관, 페니 모돈트 보수당 원내대표, 보리스 존슨 전 총리.
ⓒ AP/AFP/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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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보수당은 다음주까지 총리직에 오를 후임자를 결정하기로 했다. 영국은 내각책임제 국가로, 제1당의 당수가 곧 총리가 된다. 현재 제1당은 보수당이므로, 보수당에서 선출한 당대표가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영국 보수당은 곧바로 차기 당대표이자 총리를 선출하는 방식을 공표했다. 후보자는 최소 100명의 하원의원의 추천을 받아야 입후보할 수 있다. 영국의 현직 하원의원은 357명이므로, 최대 3명의 후보까지만 입후보할 수 있다. 세 명의 후보 가운데 하원의원의 투표로 한 명을 탈락시키고, 나머지 두 명을 당원 온라인 투표에 부친다. 입후보자가 두 명이면 바로 당원투표가 진행되고, 한 명이면 무투표 당선된다. 추천인의 수를 늘리고 당원투표를 온라인으로 실시하는 것은, 트러스가 당선된 지난 경선과 달리 신속하게 절차를 완료하기 위한 것이다.

차기 총리 후보로는 여러 사람이 지목되고 있다. 지난번 경선에서 마지막까지 리즈 트러스와 경쟁했던 리시 수낵 전 재무장관이 가장 유력한 후보다. 인도계 영국인인 리시 수낵은 보리스 존슨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역임했으나, 세금 회피 문제와 미국 영주권 문제로 곤혹을 치렀다. 특히 리시 수낵은 지난번 경선에서 15%p라는 큰 차이로 트러스에게 패했다. 이번 선거에서 당원들이 얼마나 그의 편을 들어줄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법무장관과 내무장관을 역임한 수엘라 브레이버먼 역시 후보로 떠오르는 인물이다. 언급했듯 브레이버먼은 리즈 트러스 정부에서 해임되며 정부에 비판적인 언사를 남겼지만, 이민자 문제 등에서 강경한 색채를 드러내는 인물이다. 덕분에 트러스의 대안을 찾아야 하는 보수당 내 우파 진영에게는 유력한 대안이 된다. 브레이버먼은 동아프리카계 부모를 둔 이민자 2세로, 스스로 불교 신자이며 42세의 젊은 여성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그러나 브레이버먼은 지난 경선에 출마했을 때 1차 선거에서 32표를 얻으며 6위에 그쳤다. 이번 선거에서 100명이 넘는 의원의 지지를 얻고 당원투표에서도 승리할 수 있을 만큼의 결집력을 보여주기에는 여전히 많은 과제가 남아 있는 셈이다.

오히려 보수당의 우파, 특히 보리스 존슨 총리를 지지했던 강경한 우파 세력은 국방장관 벤 월러스(Ben Wallace)를 대안으로 지지할 수도 있다. 군인 출신의 벤 월러스는 보리스 존슨 총리의 사임 뒤 유력한 총리 후보로 떠올랐으나 리즈 트러스를 지지하며 경선에 출마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보에 중점을 둔 인사인 벤 월러스가 경제 문제로 사퇴한 트러스 이후의 위기를 적절히 수습할 수 있을 지에는 의문을 표하는 목소리도 있다.

보수당의 하원 원내대표를 맡고 있는 페니 모돈트(Penny Mordaunt)도 유력한 후보 중 하나다. 페니 모돈트 역시 국방장관을 역임했지만, 과거 여성평등부장관, 국제통상부부장관 등 다양한 직책을 맡은 바 있는 인사다. 지난번 경선에서도 1차 투표에서는 트러스 후보보다 더 많은 표를 얻고 2위에 올라 의회 내 결집력도 충분히 증명한 바 있다. 그러나 정책적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는 역시 페니 모돈트에게도 따라붙는다.

결국 여기서 더 나아가, 리즈 트러스의 전임자였던 보리스 존슨 총리가 다시 한 번 총리직에 도전할 것이라는 예측까지도 나오고 있다. 보리스 존슨 총리는 어찌됐든 2019년 총선을 압도적 승리로 이끌었던 거물 정치인이므로, 혼란스러운 정치상황을 신속하게 정리하기 위해 다시 총리직에 오를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으로, 지금의 혼란상에 보리스 존슨 총리의 책임은 없을 수 없다. 코로나19 대응이나 측근의 비리 등 여러 문제에 휘말리며 보수당 평의원단의 불신임투표에까지 직면했던 존슨 전 총리다. 그간의 인종차별적 발언이나, 대안 없은 강경한 브렉시트 주장 등은 지금 영국 정치의 혼란상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가 돌아온다고 해서 이 상황이 잠재워질 것이라는 기대는 허상에 가깝다.

총리직이라는 독배
 
2022년 10월 20일, 총리 관저인 다우닝가 10번지의 모습
 2022년 10월 20일, 총리 관저인 다우닝가 10번지의 모습
ⓒ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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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영국 보수당 내에서 의원단과 당원, 시장과 국민 전체를 아우르는 리더십을 발휘할 법한 인사는 눈에 띄지 않아 보인다. 2016년 브렉시트 문제로 물러난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 총리를 포함해 6년 만에 벌써 다섯 번째 총리다. 영국 내에서는 "총리의 재임 기간이 상추 유통기한보다 짧다"는 농담까지 오가고 있다.

결국 노동당에서는 즉시 의회를 해산하고 재선거를 치르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영국 하원의원의 임기는 기본적으로 5년이지만, 의원내각제 국가인 만큼 총리가 언제든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다시 치를 수 있다.

물론 2019년 12월 총선에서 큰 승리를 거둔 보수당은 이 의석수를 유지하고 싶을 것이다. 이대로만 간다면 앞으로 2년 넘게 총선을 치르지 않고 버틸 수 있다. 지금처럼 지지율이 폭락한 상태에서 보수당이 순순히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치를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말했듯 보수당 내에서 이 위기를 수습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은 썩 눈에 띄지 않는다. 한 사람의 능력으로 쉽게 수습될 수 있는 위기도 아니다. 결국 지난 3명의 총리 모두에게 그랬듯 지금 선출하는 총리직은 당선자 개인의 정치적 경력에는 독배가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영국의 정치는 언제나 날것의 반전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지금처럼 급작스러운 총리직 사퇴와 같은 형태가 될 수도 있지만, 정치적인 위기를 영광의 시대로 바꿔내는 형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보수당의 인재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을까. 그렇지 못하다면, 다음 총리는 당장 총선을 치르라는 노동당의 목소리를 지금처럼 무시하고 넘어갈 수만은 없을 것이다. 또 그렇다면, 그 다음의 총리는 더 이상 보수당 소속이 아닐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영국, #리즈 트러스, #보수당,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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