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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베이어벨트라고 다 위험한 거 아닙니다. 공항에도 컨베이어가 있잖아요."

원청인 한국서부발전의 변호인이 재판정에서 한 이야기다.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 석탄이 운반되는 화력발전소의 컨베이어 벨트를 공항에 있는 캐리어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와 비교한 건가?' 다른 참관인들에게 내가 들은 게 맞는지 확인했으나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대형 로펌 소속의 그 변호사는 증인 심문 때도 시종일관 집요했다. 그가 사업주의 책임이 없음을 주장하기 위해 증인들에게 하는 질문들은 결국 피해자의 행위에 의문을 제기해 피해자의 과실로 몰아가기 위한 것이다.

점검업무를 위해서는 점검구 안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주는 수많은 증언과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는 관련된 거의 모든 증인에게 반복적으로 저 작은 점검구에 몸이 들어갈 수 있는지(사고가 났던 곳보다 더 입구가 작은 다른 라인의 점검구를 예로 들며!), 그곳에 몸을 넣고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다른 사람들도 몸을 넣고 일을 하는지 질문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고인은 대체 왜 (그 어둡고 위험해 보이는 곳에) 몸을 넣은 것일까요?" 고인이 일부러 그러기라도 했다는 듯이.
 
 2022년 5월 10일 대전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고 김용균 산재사망 한국서부발전과 대표이사를 엄중 처벌하라!" 기자회견
  2022년 5월 10일 대전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고 김용균 산재사망 한국서부발전과 대표이사를 엄중 처벌하라!" 기자회견
ⓒ 김용균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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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26일부터 2022년 2월 10일까지 진행된 1심 재판과 2022년 6월 7일 시작된 항소심 재판까지 한 달에 한 번꼴로 이어지고 있는 공판 때마다, 꼬박꼬박 서산(1심)으로 대전(항소심)으로 쫓아다니며 하루를 할애해서 재판정에 참석하고, 그런 억지와 거짓말을 참아내야 하는 것은 유족도 예외 없었다.

원청 변호인은 유족을 앞에 두고도 고인을 모독하는 질문을 퍼부었다. 듣고 싶은 얘기가 나올 때까지 집요하게 구는 그 변호인에게 어느 날엔가는 증인으로 나온 한 동료가 왜 자꾸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지 되물었고, 어느 날엔가는 판사도 제지하는 듯했다(물론 판사가 직접적으로 "적당히 하라"고 한 것은 아니다).

변호사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고 현장이 어둡고, 소음이 심하고, 앞이 잘 안 보일 정도로 분진이 날린다는 사실이 뻔한 상황에서도 어떤 피고인은 단호한 어조로 "2인 1조로 일해야 하는 위험한 공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작업매뉴얼에 있는 2인 1조로 일해야 한다는 지침이 특수한 경우 그럴 수도 있다는 의미이지 해당 공정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재판정에 앉아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들을 몇 시간씩 듣다 보면 유족이 아닌 나조차도 뒷목이 쭈뼛쭈뼛 해지고 두통이 심해졌다. 초반에 속기해보겠다고 노트북에 받아 적던 걸 포기하고 괜스레 화장실에 들락거리며 바깥 공기를 쐬기도 했다.

위험의 외주화를 끊을 수 있도록, 원청에 책임 물어야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얼마나 할 얘기가 없으면 말 같지도 않은 소릴 반복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청업체는 권한이 없는 게 눈에 보이게 명확하고, 김용균이 사고를 당한 화력발전소의 현장은 실제로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안전하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문제는 어느 악덕 변호사가 아니라 그 악덕 변호사를 쓸모 있게 만드는 법 적용의 현실이다. 산업안전보건법의 취지를 제대로 해석하지 않고, 산업재해로 인한 노동자의 죽음을 일반 형사사건과 같은 논리로 바라보는 사법기관이다.

매일 6명씩 죽어 나가는 인재가 계속돼도, 사람부터 살려보자고 산업안전보건법을 전면 개정하고 중대재해처벌법을 제정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그렇게 아우성을 치며 목소리를 내도, 재판부는 여전히 산업재해를 담당 실무자의 과실일 수는 있어도 사업주의 고의성 없는 불운한 사고로 본다.

원청 기업과 원청 사업주의 책임은 매우 협소하게 해석해서 지금까지의 관행대로 판결하고 양형을 정하고 있다. 그 판결이 노동자의 생명보다 기업의 이윤추구가 더 중요한 가치라는 사회적 인식에 힘을 실어 주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말이다.

말단 관리자 한 명 한 명의 처벌 역시 문제 해결의 핵심 고리가 아니다. 기업은 그런 식으로 꼬리를 자르고 싶겠지만 안전관리자가 기업의 방침을 넘어 안전을 책임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용균의 죽음은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석탄화력발전소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아래 특조위)의 진상조사와 산업안전보건법 전면 개정, 중대재해처벌법 제정까지 수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동의했듯이 '위험의 외주화'라는 구조적인 문제로 인한 죽음이다. 따라서 이러한 죽음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 구조를 만들고 실질적인 권한이 있으며 그로 인한 이윤을 취한 자 즉, 원청 사업주와 원청 기업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원청이 "설비에 대한 운영 전반을 실질적으로 관리·감독하고 있고 전반적인 업무와 관련하여 하청 소속 근로자들의 생명과 안전을 확보하여야 할 업무상 주의 의무가 있었다"라면서도 하청업체 노동자들과 "실질적인 고용관계로 보기 어렵다"라는 이유로 산안법상 안전조치 의무는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원청 사업주인 김병숙 당시 한국서부발전 대표이사에 대해서도 2018년 3월에 취임해서 사고가 난 2018년 12월까지 기간이 짧아서 "컨베이어벨트의 위험성이나 한국발전기술과의 위탁용역 계약상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인식했다고 보기 어렵다"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2021년 1월 26일부터 진행된 1심 재판에 이어, 지금 항소심 재판까지, 한 달에 한 번 꼴로 재판이 이어지고 있다.
 2021년 1월 26일부터 진행된 1심 재판에 이어, 지금 항소심 재판까지, 한 달에 한 번 꼴로 재판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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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후 4년이 흘렀다. 항소심은 한 차례의 공판과 선고가 남아있다. 대법원까지는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사고 후 기소까지 8개월이 걸렸고, 기소 후 첫 재판까지 6개월이 걸렸다. 지켜보는 유족은 하루하루 피가 마른다. 특조위 진상조사 결과를 받아보고도, 산안법을 개정하고 중대재해처벌법이라는 새 법을 만들고도 유족의 투쟁은 법정에서 계속되고 있다.

이만큼이나 사회적 관심이 쏠리고, 공신력을 가진 특조위 진상조사가 이뤄져 죽음의 원인에 대한 증거도 차고 넘치는 이 사건조차 한국서부발전이라는 대기업에 벌금 1000만 원, 대표이사에게 무죄 판결이 나올 거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주변 사람들에게 애써 웃으며 "재판 결과에 연연하지는 않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유족에게 우리는, 그리고 2심 재판부는 뭐라고 답할 것인가.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조혜연 님은 김용균재단 상임활동가 입니다.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월간지 일터 12월호에도 실립니다.


태그:#김용균, #산재_사망, #위험의_외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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