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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가구 여성들이 혼자 살면서 알게 되는, 새롭게 깨닫고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들에 대해 씁니다.[편집자말]
자취만 16년째 '1인 가구 고인물'인 나이지만, 혼자 사는 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취를 시작할 때부터 함께한 16년차 밥그릇과 국그릇, 대형폐기물 딱지를 붙일 뻔한 위기에서 A/S 기사님의 노련한 기술 덕에 부활에 성공한 12년차 전기밥솥, 인천아시안게임 마스코트로 어쩌다 우리 집으로 들어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지내는 10년차 인형들까지, 난 나의 물건들과 함께 산다.

나의 손때가 묻은 세월만큼이나 나의 물건에 대한 애착과 정도 깊어져 가끔은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 애정 어린 손길로 쓰다듬어 보기도 한다. 혹자는 '이게 무슨 정신 나간 말인가' 싶겠지만, 난 물건에 정을 주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집에 들이는 모든 물건과 정을 나누는 건 아니고, 정을 주는 물건에는 나만의 기준이 있다.

첫째, 나의 손을 많이 탔을 것.
둘째, 오랜 시간동안 나와 함께 했을 것.


들어올 땐 쉽게 들어와도 나갈 땐 맘대로 못 나간다는 우스갯소리처럼 우리 집에 한번 발을 들인 물건들은 쉽게 나갈 수 없다. 우리 집에 정착한 물건은 함부로 굴리지 않고, 오래 쓰며, 쉽게 버리지 않는 게 언제부터인가 나의 철칙이 되었다. 그래서 5년 정도 된 물건은 우리 집에선 완전 '새삥'이다. 이렇게 오래된 것들 천지인 물건 중에서 단연 으뜸을 찾으라 한다면, 우리 집에 단 하나뿐인 칼, 과도이다.

오래된 물건 중에 으뜸
 
전화번호의 국번이 두 자릿수로 적혀있는 과도의 나이는 어림잡아도 서른이다.
 전화번호의 국번이 두 자릿수로 적혀있는 과도의 나이는 어림잡아도 서른이다.
ⓒ 변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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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본가에서 반찬을 보내줄 때 같이 끼어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과도에는 출생의 비밀을 풀 만한 단서가 적혀 있다. 법원 우체국 예금보험. 그리고 우체국의 전화번호 65-0100. 몇 년을 생각 없이 쓰다 우연히 발견한 전화번호를 보고는 턱이 빠지게 놀란 기억이 난다. 전화번호의 국이 무려 두 자릿수라니!

1990년대 전화번호 국번을 두 자리에서 세 자리로 단계적으로 변경하다 1998년 전국적으로 세 자릿수 국번으로 바꿨다는데, 내가 고등학생 때 청주에서는 이미 세 자릿수 국번을 사용하고 있었으니 이 과도의 나이는 어림잡아도 서른이다. 30년을 살아남은 과도라니, 왠지 여기저기 갖다 쓰기가 송구할 지경이다.

태생은 과도이나, 집에 칼이 이거 하나인 관계로 온갖 요리에 동원된 과도는 세월과 함께 날도 무뎌지고 작게 이도 빠져 있다. 동강을 내거나 자르는 건 문제가 없지만, 세밀함이 추가되는 껍질 깎기 같은 작업을 할 때는 칼이 껍질을 깎는 건지, 내가 미는 힘으로 껍질이 깎여 나가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과도는 나이가 들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빠는 칼을 가는 돌, 숫돌을 집에 구비해두고 날이 무뎌진 칼들을 모아 칼날을 갈아주셨다. 내가 어릴 땐 "칼 갈아요~"라는 외침과 함께 동네를 돌며 칼을 갈아주시던 프로 칼갈이 아저씨가 계셨는데...

그 아저씨만큼은 아니어도, 아빠가 칼을 갈면 무뎌지고 삐뚤삐뚤 이가 나가있던 칼들이 매끈하게 갈려 쨍하게 날이 서 있었다. 나의 과도도 몇 차례 아빠의 부름을 받아 새 것처럼 날을 세우고 위풍도 당당하게 다시 나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몸을 쓰는 게 예전 같지 않으신 아빠는 더 이상 칼을 갈지 않으신다. 칼을 가는 것도 기술이 필요한지라 아빠가 더는 매끈하게 칼날을 세우지 못하게 되면서 아빠의 '방구석 칼갈이'는 폐업 상태다. 아빠의 폐업과 함께 나의 과도도 더 이상 무뎌진 칼날을 세우지 못하고 세월과 함께 늙어가고 있다. 그렇다고 이 과도를 버리고 새 칼을 살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날렵한 새 칼이 대체할 수 없는 것들

칼이야 마트에서 몇 천원이면 쉽사리 구입할 수 있지만, 새로 산 칼이 우리 집 과도의 자리를 메울 수 있을까? 혼자 살 딸을 위해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 찾아낸 과도를 고이고이 싸매어 딸에게 보낸 엄마의 사랑을, 딸이 무뎌진 칼을 쓰는 게 불편할까 고도의 집중력으로 칼을 갈아주던 아빠의 마음을, 해먹는 요리라고는 김치찌개와 김치볶음밥이 전부지만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끼니를 준비하던 나의 16년의 시간을, 푸르게 날이 선 새 칼이라 해도 대체할 수는 없을 거다.

무엇보다 과도와 함께 했던 시간 속엔 '집에 뭔 칼이 과도밖에 없냐' 타박을 하며 요리를 만들어주던 젊은 엄마가 있고, 문제가 생기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 해결해주던 건강한 아빠가 있다. '그깟 요리 뭐든 할 수 있다'며 세상 무서울 것이 없이 날뛰던 젊은 날의 나도 있다. 그때의 기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과도는, 반짝이던 시절을 잔상처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난, 나의 오래된 과도에 정을 준다. 아빠의 '방구석 칼갈이'가 다시 화려하게 개업해 어르신 과도의 뭉뚝해진 칼날이 다시 쨍하게 서는 날이 오길 바라지만, 그저 낡은 대로, 이가 빠진 대로라 해도 그 안에 들어있는 나의 추억과 이야기들이 담겨있는 과도를 난 오래도록 사용할 생각이다.
 
내가 물건에 정을 주는 이유 세 번째, 그 안에 내가 사랑했던 시간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1인 가구 여성들이 혼자 살면서 알게 되는, 또 새롭게 깨닫고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들에 대해 씁니다.
태그:#과도, #정, #1인 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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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에도 여전히 꿈을 꾸는, 철없는 어른아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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