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내가 사골곰탕, 김치찌개, 멸치볶음 등 먹을 것을 만드느라 분주하다. 오늘따라 주방에 오래 머무는 게 이상하다 싶었다. 이어 나를 불러 냉장고의 여러 밑반찬을 가리키며 설명한다. 그러고 보니 2주 전 달력에 표시한 아내 모임 날짜가 다가온 것이다. 1박 2일 동창모임이다.

아내의 여행 준비는 남편 먹을 것부터

집을 잠시 비울 일이 생기면 아내는 내가 먹을 것들을 미리 준비하는 습관이 있다. 하루 이상 멀리 여행갈 때는 가짓수가 더 늘어난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고 누차 말하지만 아내는 막무가내다. 어떨 때는 먹지 않아 음식이 상할 때도 있다. 어린아이처럼 만들어 놓은 음식도 못 먹는다며 아내는 전전긍긍한다.

아내는 집을 나설 때까지 채근한다. 문제는 그렇다고 내가 음식을 챙겨 먹는 것도 아니다. 은퇴하고 노후를 즐기는 사람들은 집밥을 먹지 않고 사 먹는다고 하는데 난 그런 것도 아니다.

내가 너무 호사를 누린 탓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없던 이상한 '느낌'이 생겼다. 허투루 듣던 아내의 잔소리가 다르게 들리는 것이다. 괜히 미안한 마음도 든다.

지난 주말 오전 아내는 1박2일 여행을 떠났다. 초등학교 절친들이다. 다들 할머니가 된 친구 10여 명이 밤새 수다를 즐기는데 이런 연례행사가 벌써 20년이 넘었다.

말을 들어보면 손자손녀 자랑에 학교 다닐 때 추억을 소환하는 것이 전부인데 긴 하루를 어떻게 그것도 오랜 세월 함께 하는지 내겐 신기하게 보인다.

이런 모임이 지겨울 법한데 아내는 그렇지 않다. 여행 가면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고 한다. 샘물처럼 솟는 이야기와 눈만 마주쳐도 통하는 사이를 자랑하기 바쁘다.
 
아내 초등학교동창들이 해마다 즐기는 윷놀이 기구
 아내 초등학교동창들이 해마다 즐기는 윷놀이 기구
ⓒ 이혁진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이들 모임에 특이한 행사가 빠지지 않는다. 편을 갈라 '윷놀이'를 한다. 명절도 아닌데 이들은 1박2일 윷놀이판 벌이는 것이다.

약간의 내기를 거는데 모두가 환영하는 시간이다. 윷놀이를 오래하면 얼굴 붉힐 일 있는데 그런 법은 결코 없단다. 해마다 윷놀이 기구를 챙겨 가져오는 친구는 귀한 대접을 받는다.

화투나 카드 등 요새 재미난 놀이와 게임이 많고 많은데 하필 윷놀이라니 흥미롭다. 목숨 걸고 즐기는 여인들의 윷놀이판을 따로 연구해보고 싶을 정도다.

나 홀로서기, 아내를 이해하는 것부터

나는 집을 나서면 귀가할 생각부터 하는데 아내는 집을 까맣게 잊는 것 같다. 그럴만도 하다. '삼식이'나 다름없는 내게 종일 인질로 잡혀 있다 벗어났으니 당연하다.

젊을 때와 달리 나는 모임을 줄이거나 가급적 외출을 자제하는 편인데 아내는 수 십년을 만나는 모임이 여럿 있다. 비법이 있는지 정말 진득하게 오래 만나고 우정이 깊다.

이제야 아내 걱정을 조금 이해할 것 같다. 먹을 것을 바리바리 준비한 것은 내 건강을 위한 것이며 가족이란 울타리를 지키는 '양면전략'이다. 매사 이기적인 나로선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아내에게 집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오라 격려하고 비상금을 쪼개서 여비라도 보탰어야 했다.

아내는 친구모임에 다녀와 "다들 저녁까지 먹고 가자는데 자기만 먼저 왔다"는 말을 자주 한다. '립서비스' 같은 빈말에도 이제는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깨달은 게 있다. 친구들과 함께 하는 아내의 외출은 소위 '자유'와 '해방'을 의미한다. 아내의 '일탈'도 만들어 응원할 필요가 있겠다.

해서 아내가 돌아오면 무조건 "고생 많았다"는 말부터 건넬 것이다. 그리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을 타야겠다.

집이 오늘따라 절간처럼 고요하다. 아내에게 문자를 보낸다. 반응이 없다. 평소 같으면 재깍 답을 하는데 그렇지 않다. 윷놀이 승부에 정신이 팔린 모양이다.

여러 생각이 꼬리를 문다. 우리 나이가 되면 혼자 노는 법, 먹는 법 등 <홀로서기>를 강조한다. 외로움과 무료함에 대비하라는 것이다. 아내의 치성은 어쩌면 날 미리 교육하는 건지 모른다.

하루가 지난 일요일, 늦은 점심을 혼자 먹는다. 아내 생각에 벽시계를 무심코 바라본다. 아내 말이 귀에서 맴돈다.

"내가 없더라도 밥 잘 챙겨 먹고 있지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게재할 예정 입니다.


태그:#1박2일, #윷놀이, #진보초등학교, #아내, #동창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일상을 메모와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기존 언론과 다른 오마이뉴스를 통해 새로운 시각과 영감을 얻고 있습니다. 주요 관심사는 남북한 이산가족과 탈북민 등 사회적 약자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