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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단 한 번도 공을 만져본 일 없던 여성이 축구를 시작했습니다. 축구하면서 접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함께하면 이렇게 따뜻하고 재밌다고, 당신도 같이 하자고요. [기자말]
'별로'는 인사이드(발 아치쪽)와 아웃사이드(발 바깥쪽)도 구분 못 하던 시절의 나를 지금에 이르게 해준 축구 친구다. 그를 만날 때마다 "엄마!"라고 외친다. 별로의 지정 성별은 남성이지만 뭐, 당신 덕에 축구인으로 거듭났으니 내 엄마 맞다.

그를 만난 건 축구를 접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였다. 공을 처음 발에 댄 순간부터 이 운동에 푹 빠져버린 나는 누구든 만나면 "축구 할 줄 아세요? 저 좀 가르쳐주세요!"라고 외치고 다녔다. 동네 친구 기린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기린에게 한껏 수다를 떨었다.

"기린님 축구 해보셨어요? 진짜 재밌어요! 스트레스가 다 풀린다니까? 매일매일 공차고 싶어. 근데 나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네? 진짜 누가 축구 알려줄 테니 따라오라고 하면 지구 끝까지 쫓아갈 수 있는데 말이죠!"

내 격앙된 말투에 함께 달뜬 기린은 그렇게 재미있다면 같이하자고 화답해주었다. 그때 기린이 '별로'라는 친구를 언급했다. 그 친구가 축구뿐 아니라 웬만한 운동은 다 잘하니 우리의 코치가 되어달라 졸라보기로 한 것이다.

"축구를 가르쳐 달라"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우리는 곧장 별로네 집으로 들이닥쳤고, 거기서 그를 처음 만났고, 그에게 "나를 가르쳐라!"고 요구했다. 어쩐 일인지 별로는 낯선 이의 막무가내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열린 별로의 축구교실 첫 날. 여기저기서 그러모은 동네 친구 일곱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대부분 공을 처음 만져보는 이들이었으나 우리는 마냥 신났고, 별로는 그날 친절과 최선을 다해 축구 기본기를 가르쳤다. 
 
별로가 트래핑 시범을 보이고 있다.
▲ 트래핑 배우는 중 별로가 트래핑 시범을 보이고 있다.
ⓒ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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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재미와 지속이 함께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자의 이유로 여섯 명의 제자는 금세 모두 사라졌고, 나 하나만 남았다. 별로도 이 모임이 오래 가지 못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 보는 나의 가르침 요구에도 흔쾌히 "오케이"라고 외쳤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남은 한 명이 1년 가까이 매주 자기 집 앞에 대기하며 "나를 가르쳐라!" 요구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한번은 그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별로님의 금요일 저녁 6시부터 7시까지는 내 거야, 이지은 고정이야! 약속 잡지 마요. 내게 지분이 있으니까!"

나도 안다. 새파랗게 젊은 청년에게 가장 뜨겁게 즐길 시간인 금요일 저녁을 할당해달라니, 이 얼마나 이기적인가. 그런데 의외로 별로는 순순히 그 시간을 내게 나누어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1년 가까이 매주 같은 시간에 함께 공을 찬다. 어떤 부분은 그를 소개해준 기린보다 더 친밀해서, 축구 외의 삶도 일정 부분 공유하고 고민과 조언을 주고받기도 한다.

관계 문제로 한껏 힘들어하던 시기에 별로에게 이를 털어놓았다가 의외의 해답을 얻기도 했다. 축구 가르쳐주는 것만으로도 황송해서 업고 다닐 판인데, 그에게 인생도 배운다. 그러니 그가 소중할 수밖에.

그와의 대화 끝에 머릿속이 개운하게 정리된 날, 고마운 마음을 한껏 담아 "별로님 나한테 너무 소중하다! 업어줄게. 내 등에 업혀요!" 외쳤다. 그는 기꺼이 내준 내 등 뒤로 점프해 나를 찍어 눌러 바닥에 고꾸라지게 만들더니 이윽고 겨우 일어난 내게 허리후리기를 시연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당해본 허리후리기 덕분에 고마운 마음은 산산이 부서졌다. 자신에게 너무 많은 애정을 쏟지 말라는 무언의 배려인가. 덕분에 바닥으로 고꾸라진 나는 그를 향해 눈으로 레이저를 쏴붙였다. "축구 엄마고 뭐고 가만 안 둬, 진짜."

이 다채로운 관계가 기껍다
 
금요일 저녁은 늘 어둡다.
▲ 축구 끝나고 밤이 된 풋살장. 금요일 저녁은 늘 어둡다.
ⓒ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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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별로와 나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연인도 아니고 고용주와 피고용인도 아닌 데다가 핏줄로 엮이지도 않았는데 금요일 밤마다 함께 공을 차고, 서로를 '님'이라 부르며 존대하면서도 땅바닥에 패대기치는 허리후리기를 시전하며, 구장 안에 들어서면 듣도 보도 못한 데시벨로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는 사이.

서로를 적당히 아끼지만 일정 거리를 적절히 유지하는 사이. 이 모든 것들이 통용되는 관계는 일반적인 관계망에 없을 테니 말이다. 이를 들은 개울어멈은 말했다.

"그런 관계, 한국 사회에서 엄청 희귀하고 소중하지 않아요? 웬만한 남녀는 '잠재적 애인'이라고 치부되는 판국이잖아. 너무 좋다. 마음껏 잘해줘요."

우리는 세상이 생각하는 남과 여에서 벗어나 좀더 다채로운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게 아닐까. 오해 살까 싶어 깻잎 한 장조차 제대로 떼주지 못하는 강퍅한 세상에서, 주어진 성별을 벗어나 친구라는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우리가 기껍다. 

요즘 들어 자꾸 별로는 내게 "나도 너무 하수라… 이제 더는 알려줄 게 없어요. 졸업하세요"라는 말을 반복한다. 그때마다 "싫어요. 나 별로스쿨 대학원까지 다닐 건데요!"라고 대꾸하곤 한다. 미안하지만, 졸업을 유보한다. 이 다채로운 관계를 조금이라도 더 길게 이어나가고 싶다.
 
별로의 축구교실 수업은 복습을 위해 늘 영상으로 남겨놓는다.
▲ 한낮의 풋살장. 별로의 축구교실 수업은 복습을 위해 늘 영상으로 남겨놓는다.
ⓒ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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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네 집 앞에서 그를 기다릴 때마다 나는 마치 초등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하교 후 친구네 앞에서 "OO야, 놀자! 놀이터 가자!" 소리치던 시절 말이다. 이번 주도 퇴근하자마자 별로네 집 앞으로 달려가야지. 그의 집 앞에서 "별로야 놀자! 공차러 가자!" 소리쳐야겠다.

태그:#축구, #생활체육, #풋살, #축구왕,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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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노동자. 두 권의 책을 낸 작가. 여성 아마추어 풋살선수. 나이 든 고양이 웅이와 함께 살고 있으며, 풋살 신동이 되고 싶습니다. <편집자의 마음>, <들어 봐, 우릴 위해 만든 노래야> 두 권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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