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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동문 산악회가 주관하는 청계산 등산에 참가했다. 코로나로 3년 만에 열린 봄맞이 시산제라 반갑다. 기다렸다는 듯 많은 동문들이 청계산입구역 옛골 집결지에 모였다. 서로 인사하기 바쁘다. 시산제 장소는 이수봉 근처 헬리콥터장, 과거에도 몇 번 오른 익숙한 곳이다. 때가 되어 동문들은 삼삼오오 산을 타기 시작했다.

나는 동기 한 명과 걸었다. 봄 내음 가득한 날씨도 좋았다. 두런두런하며 30분은 쉼 없이 가뿐히 올랐다. 몸이 가볍고 컨디션도 괜찮다. 경칩을 지나니 청계산에만 자생하는 봄꽃들이 물 머금은 듯 푸르다. 제법 웃자란 버들강아지도 오가는 길손을 환영하는 눈치다. 이정도 여유를 부리면 목적지까지 두세 번 쉬면서 가도 충분했다.
 
청계산 등산길
 청계산 등산길
ⓒ 이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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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웬일, 가파른 계단을 얼마나 올랐을까 10분도 안 돼 숨이 가쁘기 시작했다. 오랜만의 산행 탓으로 여겼다. 체력이 이상하게 갑자기 떨어졌다. 본격적인 산행을 앞두고 변고가 생긴 것이다. 앞으로도 갈 길이 멀다. 적어도 깔딱고개 서너 개가 남았다. 100보 이상을 나가지 못했다. 하늘을 보고 걷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헐떡였다. 인터벌 걷기를 자주 하고 심호흡을 거듭해도 소용이 없다. 마음은 조급하고 이러다 주저 앉을 것 같았다. 이번에 나름대로 기대와 각오도 컸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겁도 났다. 그렇다고 동창에게 자존심을 팽개치고 내색하기는 싫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태가 벌어졌다. 동기가 머리가 어지럽다며 털석 앉았다. 근 10년 동안 함께 산에 오른 친구가 중도에서 포기할 듯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도 나처럼 힘들고 지쳤나 보다 정도로 여겼지만 의외였다. 그는 산에서 '내비게이션'이라 할 정도 등산을 즐기는 친구다. 

친구는 혼자라도 산행을 재촉했지만 나도 솔직히 포기하고 싶었다. 쓰러질 정도는 아니지만 오늘따라 너무 지쳤기 때문이다. 친구의 상태는 조금 나아지는 듯했지만 더 이상 산행은 무리로 보였다. 실제 그는 귀가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청계산 버들강아지
 청계산 버들강아지
ⓒ 이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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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와 시산제 현장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뒤로하고 산행을 계속했다. 이제는 홀로 산행이다.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오르기 시작했다. 3~4분 걷다 1분씩 쉬는 식으로 걸었다. 가쁜 숨은 여전했다. 친구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혹시 친구가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을까 말이다. 가는 걸 포기하고 친구에게 도로 가는 것도 생각했었다. 

와중에도 끝까지 가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산에서 욕심이 바로 이것이다. 그보다 더 문제는 힘든 친구를 남겨두고 떠난 것이다.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갈등하다 보니 길을 잘못 들어 이수봉까지 등정하고 말았다. 1시간 반이면 충분한 산행을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2시간 이상 걸려 시산제 현장에 도착했다. 

시산제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왜 혼자 왔느냐'고 동문들이 묻기에 친구가 조금 뒤에 온다는 말로 얼버무렸지만 창피해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가 무사히 당도하기만을 기다리며 뒤만 바라봤다. 친구는 시산제가 마무리 될 무렵 소리 없이 나타났다. 반가웠다. 전장에서 헤어진 전우를 다시 만난 심정이었다. 
 
시산제 현장
 시산제 현장
ⓒ 이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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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산제에서의 여흥은 기억에 없다. 하산도 문제였다. 한번 풀린 몸은 굳고 움직이지 않았다. 전에 없이 무릎 관절 통증도 빨리 왔다. 코로나 이후 처음 겪는 일이다. 스틱에만 의존해 산을 내려왔다. 내가 산행하면서 이렇게 정신없고 힘든 적은 없었다.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친구가 사고(?)친 것도 충격이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70 나이를 감안하더라도 갑자기 맥없이 체력이 떨어진 것은 아직도 미스터리다. 앞으로 산행을 계속할 수 있을지 혼란스럽다. 산에서 역시 체력이 최고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80대 고령의 학교 선배가 아직도 끄덕 없이 산행하는 데는 그만의 내공이 있었다. 50년간 꾸준히 단련하고 매달 산에 오른 결과다. 

동료 중에는 산행을 그만두고 둘레길만 찾는다는 친구들이 제법 있다. 나이 들어 점점 기운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가소롭게도 그들을 속으로 무시했었다. 그러다가 오늘 내가 호되게 당했다. 후회가 막급하다. 이게 시산제의 교훈일지 모른다. 생기를 되찾은 친구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 이제 무리하지 말자. 산보다 둘레길을 걷자." 

시산제 산행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아직도 후유증이 심하다. 봄을 맞는다고 호들갑을 너무 떨었다. 그래도 산신령 덕분에 안전한 산행을 마쳤다. 무엇보다 내 몸과 체력을 점검하고 겸허함을 일깨운 기회가 고맙다. 

태그:#시산제, #동문산악회, #청계산, #이수봉, #둘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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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메모와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기존 언론과 다른 오마이뉴스를 통해 새로운 시각과 영감을 얻고 있습니다. 주요 관심사는 남북한 이산가족과 탈북민 등 사회적 약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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