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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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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루거 협곡 웬샨 온천으로 가는 무서운 등산로 ⓒ 최늘샘

미끌, 한 발 헛디디면 절벽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 먼 섬나라의 낯선 계곡 절벽에서 죽을 수는 없지. 푸른빛 온천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유혹하는 절벽 저 아래로 나도 마침내 도달할 수 있을까.

이곳은 아리산과 함께 대만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인 타이루거(太魯閣) 협곡. 300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산맥이 동쪽의 태평양으로 풀썩 내려앉는 기이한 지형으로 타로코(Taroko) 원주민의 오랜 터전이다. 흔해 알려진 타이루거는 타로코를 한자로 음역한 지명이다. 
 
타이루거 협곡 인근 화롄시에서 머문 숙소는 하루 250위안(한화 10,600원). 타이난의 180위안 숙소에 이어 두 번째로 저렴했다. 남쪽 끝에서부터 며칠 동안 계속된 노숙의 피로를 화롄에서 풀기로 했다. 이 숙소는 특이하게도 보통의 이층 침대가 아닌 텐트로 이루어져 있다. 커다란 거실에 배치된 텐트 여덟 개.

나와 비슷한 처지의 장기간 배낭 여행자, 이탈리아에서 온 루카, 미국 애리조나에서 온 로비를 만났다. 로비는 타이루거에 이미 세 번이나 가봤다며 볼거리를 추천했다. 루카와 나는 보물 지도를 건네받은 것처럼 스마트폰에 위치를 표시했다.

로비가 1순위로 추천한 곳은 관광객들이 타는 셔틀버스 경로에서 벗어난 장소로, 입소문을 통해 소수의 여행자들이 찾아가는 온천이었다. 조심해서 도착한다면 환상적인 경험일 테니 도전해 보라며 모험심을 자극했다. 구글 지도 앱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 신비롭고 비밀스런 푸른 절벽 온천의 사진과 방문 후기를 남겨놓았다.
 
대만 타이루거 협곡의 유황 온천 계곡 아래 물장구를 치는 여행자들이 보인다 ⓒ 최늘샘
 
대만 타이루거 협곡의 유황 온천 계곡 아래 물장구를 치는 여행자들이 보인다 ⓒ 최늘샘
           
여행자들의 오아시스, 텐트 숙소

땀범벅으로 자전거를 끌고 오르막길을 오를 때는 모험이고 도전이고 그만두고 시원한 숙소에서 쉬다가 기차에 자전거를 싣고 편하게 다니고 싶어진다. 편안하고 안전한 숙소에서 피로가 풀리고 마음이 안정되고 나면 꿈틀꿈틀 다시 모험을 나서고 싶어진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나와 반대 방향으로 여행하고 있는 루카는 화롄 북쪽의 지우펀이나 타이페이는 화롄 보다 숙소와 물가가 훨씬 비싸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루카에게 남쪽 방향의 도로 사정과 분위기를 전했다. 저렴한 숙소는 장기 배낭여행자들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루카는 다음 여정을 준비하며 박스에 매직으로 지명을 써서 팻말을 만들었다. 
 
"다시 떠날 준비가 끝났어. 히치하이킹으로 여행하는 건 단지 돈을 아끼기 위해서가 아니야. 하루 1유로를 아끼면 1년이면 365유로고, 내가 좋아하는 콜라를 매일 저녁 마실 수 있지. 하하. 농담이야. 중요한 건 히치하이킹을 하면서 현지인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야.

차에서 그 나라의 노인들, 꼬마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아서 히치하이킹으로 여행하고 있어. 새로운 장소를 발견하고, 다른 문화와 교류하고, 낯선 스포츠를 시도하고, 지역의 별미 하나하나에 흥분하고, 다른 삶의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바다와 산, 자연을 누리고 싶어."


 
화롄 텐트 숙소에서 만난 이탈리아 여행자 루카 ⓒ 최늘샘
 
공포의 절벽을 건너 푸른 온천으로

바들바들. 보물 지도를 더듬어 오게 된 공포의 절벽, 비밀의 온천. 지도에 표기된 지명은 웬샨(文山)온천. '낙석주의!' 팻말이 있는 가파른 트레일을 10분쯤 내려가니 자그마한 구름다리가 나온다. 아래를 보니 수영복을 입고 노천탕에 누워 있는 여행자가 보인다.

보물 지도는 거짓이 아니었다. 배낭을 구름다리 구석에 놓고 절벽으로 이어진 길을 두 발짝 내딛는 순간 식은 땀이 흘렀다. 경사는 가파른데 난간은 없고, 계단은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것마냥 낡았다. 한 발 옆에는 낭떠러지가 손짓하며 현기증을 일으키는, 현실판 인디아나존스. 

몇 발짝 더 가니 구원처럼 벽에 박힌 고리에 묶어둔 주황색 로프가 있다. 온 신경을 집중해 한 발 한 발, 마침내 절벽 아래에 도착. 먼저 와 있던 여행자에게 인사를 하고 온천에 몸을 담갔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세찬 물살의 계곡, 모락모락 유황 온천, 이곳이 천국인가.

느긋하게 즐기고 싶은데 구름다리에 놓아 둔 배낭이 걱정된다. 원숭이를 조심하라는 그림판이 떠올랐다. 김밥과 샌드위치 냄새를 맡은 원숭이들이 배낭을 뒤지면 어떡하지. 서둘러 온천을 만끽하고 부들부들 로프를 잡고 절벽을 기어올랐다. 
 
원숭이주의보 ‘포모산 원숭이들이 음식을 잡아챌 수 있으니 주의하시오!’. 원숭이, 말벌, 뱀, 낙석 경고문 ⓒ 최늘샘
 
멀쩡한 배낭을 확인한 뒤 아쉬움을 접고 돌아서다 다시 절벽 아래를 보니 내가 있던 온천 옆에 숨겨진 더 크고 비밀스러운 동굴 온천탕이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저들은 왜 나에게는 알려주지 않고 자기들만 즐기는 걸까. 신은 가장 좋은 건 전부 주지 않는 걸까. 포기를 배우라는 메시지일까.   

수영복을 입은 여행자는 곧 어깨에 로프를 메고 절벽을 올라왔다. 구원의 동아줄은 국립공원에서 묶어둔 게 아닌 개인 장비였다. 이제 내려가긴 더 어려울 텐데, 다른 여행자 두 명이 와서 절벽 등산로에 도전했다. 할 수만 있다면 배낭을 들고 따라 내려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오도가도 못하고 동동거리는 찰나, 국립공원 관리원이 등산로를 확인하러 왔다.

구름다리 끝에 설치된 서류함에 기록을 마치고 돌아가는 관리원에게 배낭을 메고 온천으로 싶은데 너무 무섭다고 도움을 청했다. 관리원은 배낭을 메고도 갈 수 있는 길이 있지만 반대쪽이라 계곡을 건너가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절벽길에 비하면 꽃길이다. 바위에 배낭과 신발을 벗어두고 계곡을 건너, 마침내 비밀의 동굴 온천에 도착. 
타이루거 협곡 유황 온천 타이루거 협곡을 찾은 여행자들, 온천을 관리하는 타이루거 주민들과 함께 ⓒ 최늘샘
 
셔틀버스도 다니지 않는 곳을 어떻게 알고 왔는지 다양한 국적의 여행자들이 하나둘씩 오간다. 긴장감과 흥분 때문일까, 여행자들은 급격히 친해져 천진난만 물장구를 치고 이야기를 나눈다. 이 세계적인 국립공원에서, 이렇게 경이로운 온천에 오는 길을 왜 안전하게 정비하지 않는지 고개를 흔들면서.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온천에 머물며 청소를 하고 물과 분위기를 관리하던 말수 적은 타이루거 마을 사람에게 물었더니, 평생 이곳에 왔지만 큰 돌이나 사람이 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캠핑도 하고 싶지만 비가 오면 금방 계곡 물이 불어 위험하단다. 아쉬움을 안고 잘 곳을 찾아 온천을 떠난다. 죽음의 공포 뒤에 얻은 행복이라 더 좋았던 걸까. 웬샨온천은 대만 여행에서 만난 가장 경이롭고 아름다운 자연이다. 환희와 경외감도 오늘이 지나면 서서히 어렴풋해지겠지. 
 
타이루거 협곡 온천의 여행자들 ⓒ 최늘샘
 
타이루거 협곡의 여행자들 ⓒ 최늘샘
           
34일간의 여행, 잃은 것과 얻은 것

동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수많은 절벽과 터널을 지나 종착지 타이페이에 다다랐다. 미지의 섬 타이완 자전거 일주를 마쳤다. 섬 둘레 1,300킬로미터와 고산지대 몇 군데를 여행하는데 34일이 걸렸다.

타오위안 공항에서 시작해, 주베이시, 바이샤툰, 지지, 수이리, 대만 중심 르웨탄 호수, 자이, 2340미터 아리산, 타이난, 항구도시 가오슝, 최남점 켄딩, 동쪽의 타이둥, 위리, 화롄, 타이루거, 난아오, 북쪽의 지우펀, 바두, 타이베이까지.

덥고, 습하고, 힘들고, 춥고, 무섭고, 외로웠지만 아름답고, 경이롭고, 활기차고, 뿌듯했던 여행길. 팬데믹 이후 4년 만에 떠난 여행, 처음 해 본 자전거 여행에서 나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나.

4, 5월 대만은 무척 덥고 습했다. 더 힘든 건 대만 모기 특유의 가려움이다. 대만에는 '샤오헤이원(小黑蚊)'이라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지만 강한 모기가 사는데, 물리면 일주일이 지나도 가려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현지인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약을 발랐지만, 마지막 날까지 가려움에 시달리는 중이다. 
깎아지른 절벽에 놓여진 대만 동부 해안도로 ⓒ 최늘샘
   
친지들은 자전거를 타는 내 건강을 걱정했지만 그을리고 모기에 물렸을 뿐 오히려 생기가 돌았다. 저녁마다 녹초가 되고 아침마다 기운을 되찾은 나날. 종일 앉아 모니터를 보며 일하다가 생긴 정맥류 증상도, 고질적 소화불량도 줄었다. 숙소 없이 숲이나 해변, 도시에서 캠핑을 할 때면 늘 두려웠지만 하룻밤을 보내고 나면 나를 살게 해 준 세상에게, 어둠을 몰아내는 태양에게 감사했다.
 
동부 해안도로를 오르락 내리락 달린 자전거와 함께 ⓒ 최늘샘
   
일상에서 벗어나 낯설음과 어려움을 헤쳐가며 조금씩 나아가 여기에 도착했다. 자전거에서 넘어져 다치거나 도난 당한 것도 없이 무탈히 환도를 마쳤다. 길도 지리도 문화도 언어도 모르는 여행자인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땐 어디서나 감사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첫 날, 물통을 채워달라고 부탁하자 새 물 한 병을 더 챙겨준 옌친. 지지행 기차에서 만나 대만 전역의 맛집과 정보를 알려준 대학원생 웨이웨이. 자이대학 산악부 멤버 메이메이는 아리산 캠핑에 도전할 용기를 주었다.

길 위에서 만난 여행자들, 롱마오, 알렉스, 조개, 페릿, 루카, 로비, 마리코, 다니엘리, 카와이언, 니코를 잊을 수 없다. 대만 사람들에게는 자전거나 도보로 환도하는 여행자를 응원하는 문화가 있는지, 매일 "찌아요(加油)!"라는 고함과 엄지 척, 응원을 받았다.        

여행은 나에게 내 방, 내 집, 내 가족, 내 일, 익숙해진 관계와 시공간을 떠나, 보다 넓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와 만날 수 있는 특별하고 귀중한 시간이 아닐까. 모처럼의 여행. 34일간의 경험과 고난을 잊지 말고, 돌아갈 일상을 감사히 활기차게 살아내자. 여행의 끝에서, 삶은 계속된다.
 
"저는 왜인지 정착 보다는 오래 멀리 떠도는 것 같아요."
"하지만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떠돌아요!"
 

어찌 보면 모두가 떠도는 존재라는 친구의 말이 위로처럼 자꾸만 떠올랐다. 익숙한 일상도 결국은  변하고 끝나고 사라지는 것. 모든 존재가 죽음 앞에 평등하고, 누구나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삶은 여행'이라고 말하는 걸까.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살고 싶다. 
 
대만 환도의 종착지 수도 타이베이. 마지막날 코끼리산, 샹산 봉우리에서 바라본 석양 ⓒ 최늘샘
 

덧붙이는 글 | 2023년 4월, 5월, 팬데믹 이후로 오랜만에 떠난 배낭 여행 이야기를 오마이뉴스 기사를 통해 다시 나눌 수 있어서 무척 감사했습니다. 기사를 읽고 공감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팬데믹 직전인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오마이뉴스에 마흔두 번 연재한 아메리카, 아라비아, 아프리카 여행기는 책 <지구별 방랑자>(2022, 인간사랑)로 출판되었습니다. 혹시 이 여행기가 흥미로우시다면 책에도 관심 부탁드립니다.

태그:#지구별방랑자, #대만여행, #대만자전거여행, #대만환도, #타이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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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바다 미륵섬에서 유년기를, 지리산 골짜기 대안학교에서 청소년기를, 서울의 지옥고에서 청년기를 살았다. 2011년부터 2019년까지, 827일 동안 지구 한 바퀴를 여행했다.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생활놀이장터 늘장, 여행학교 로드스꼴라,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센터, 섬마을영화제에서 일했다. 영화 <늘샘천축국뎐>, <지구별 방랑자> 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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