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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단 한 번도 공을 만져본 일 없던 여성이 축구를 시작했습니다. 축구하면서 접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함께하면 이렇게 따뜻하고 재밌다고, 당신도 같이 하자고요. [기자말]
남성과 대화할 때 내 취미를 '축구'라고 밝히면 대부분 비슷한 대화가 오간다.

"우와, 축구하는 여자 분은 처음 봐요(또는 축구를 취미로 삼다니 대단해요)", "골때녀(축구 예능 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 보다가 시작하셨나요?", "혼성으로 뛰나요? 여자 팀이 있다고요?"

보통은 그 질문들에 성심성의껏 대답해주는 편이다. "아, 제 주변엔 축구하는 여자가 엄청 많은데 처음 보신다니 저도 신기하네요", "아뇨. 골때녀 애청자이긴 한데 그거 보고 시작한 건 아니고요", "혼성은 아니고 여자 팀에 속해 있어요." 헌데 하도 같은 질문을 반복해 받다 보니 이제 조금 지치기 시작했다.

태도의 전환 
 
경기 전 친구들과 몸을 풀고 있다
▲ 몸풀기 경기 전 친구들과 몸을 풀고 있다
ⓒ 오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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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자꾸 같은 질문을 하는 이유는 어쩌면 정말로 '축구하는 여자'를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 또한 이 운동을 취미로 삼기 전에는 축구하는 여자를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대부분의 구기종목과 마찬가지로 '축구'는 남자들 취미생활의 대표격으로 느껴져, 직접 공을 차볼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축구한 뒤에 땀범벅이 된 채 웃통 벗고 돌아다니는 남자애들을 보면 '대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이야'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런 내가 이제는 왜 그렇게 남자애들이 웃통을 벗고 다녔는지 너무 잘 안다. 지금 내 가슴 쪽은 땀띠로 가득하니까. 얼마 전에는 땡볕 아래 경기하다가 열사병에 걸려 타이레놀을 한 알 먹고 겨우 잠들었다. 나도 축구하다가 웃통 벗고 싶다. 복근만 있었다면 시도해봤을 텐데.

이 태도 전환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나는 이것이 '발견'에서 온 힘이라고 생각한다. 전에는 상상해본 적 없는 것들이 내 주변 누군가의 첫 경험으로 인해 '발견'되면 나에게도 그것을 접할 가능성이 열린다. 언젠가 트위터에 '바쏘(두두지악개)'라는 이가 이런 글을 올린 적 있다.

"네이버에 우리 체육관 검색하면 내 스파링 영상 뜨거든? 그거 보고 '아, 여자도 치고받네. 걍(그냥) 다 하는 거구나' 하고 온 여자들이 꽤 있다는 거야. 이게 중요한 거임. 하고 있는 사람이 있거나 그냥 눈에라도 한 번 띄는 거. (...) 하고 있는 사람을 많이 노출시키고 실제로 봐야 됨. 그래서 '나도' 하면서 시작하게 만들어야 함."
 
가벼운 달리기로 몸 푸는 중. 이날 열사병에 걸려 두통으로 잠을 설쳤다.
▲ 경기 전 몸풀기 가벼운 달리기로 몸 푸는 중. 이날 열사병에 걸려 두통으로 잠을 설쳤다.
ⓒ 오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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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무조건 "축구해보실래요?"라고 들이댄다. 심지어 출판 편집자로 계약하러 만난 저자 미팅 자리에서 내가 경기에서 첫 골 넣은 영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저자의 지인이 내 축구 친구라 반가운 마음에 들이댔는데, 나중에 "이 언니는 회사 업무로 만난 사람한테도 골 넣은 영상 보여준다더라"고 소문이 나버렸다. "나 그 정도로 분별없는 사람 아니야!" 외치고 싶었지만 보여준 게 사실이라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자꾸만 '축구하자'고 들이대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발견한 그 낯선 세계를 내가 좋아하는 이에게도 일부라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상대는 어쩌면 이를 보고 마음에 들어 할 수도, 아니면 학을 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전자의 마음을 가지기를 바라지만 후자의 마음이 들었다고 해도 상관없다. 경험해보고 '이건 나와 안 맞네'라고 확인하는 과정 또한 중요하니까.

우리가 살면서 성별이나 나이, 직업, 학력, 장애 유무 등 수많은 장애물 앞에 부딪혀 시도도 못 해보고 '이건 나와 안 맞을 거야' 생각하며 지레 포기한 적이 얼마나 많은가. 경험해보고 포기한다는 것은 자신을 좀 더 깊이 알아가는 방법 중에 하나다. 언젠가 지인은 나와 축구한 하루를 이렇게 적었다.

"나도 오늘만큼은 남자애들처럼 이 문장을 적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오늘 친구들과 축구를 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공을 차보자
 
쾌청한 하늘과 달리 더위 때문에 몸은 한없이 무거웠다.
▲ 경기 전 몸풀기 쾌청한 하늘과 달리 더위 때문에 몸은 한없이 무거웠다.
ⓒ 오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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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비슷한 이가 내가 전혀 상상해본 적 없는 세계를 여행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내 삶의 확장 가능성은 조금 더 커진다. 월드컵 경기도 안 보던 내게 친구 성애가 축구를 발견하게 도와주었고, 그 덕에 매일 공을 차는 이로 거듭났다.

이후 에디터리와 세봉, 기린 등도 내 권유로 축구를 접했고, 함께 공을 차던 우리는 '이런 세계도 있었어?'라는 놀라움을 공유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사정상 축구를 그만두었고, 일부는 여전히 공을 차지만 처음 함께 뛸 때 느꼈던 두근거림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최대한 자랑해야 한다. 그것이 내 삶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변화시켰는지, 그것을 하기 전의 나와 하고 나서의 내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몸소 보여주고 나면 그 변화에 감응한 누군가가 분명 뒤따라온다. 그렇게 우리는 좋아하는 것들을 공유함으로써 서로의 삶을 응원하는 사이가 된다.
 
2인 1조로 짝지어 기본기 연습하는 중.
▲ 기본기 연습 2인 1조로 짝지어 기본기 연습하는 중.
ⓒ 오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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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나는 계속 내가 좋아하는 여자들에게 "같이 축구해보실래요?"라고 권할 것이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공을 함께 차 보자고, 좋아하는 것들을 더 많이 나누자고 제안할 것이다. 언제까지 그럴 거냐고? 더는 남자들이 "우와, 축구하는 여자 처음 봐요"라는 말로 감탄하지 않을 때까지 계속할 것이다.

태그:#축구, #풋살, #생활체육, #여자축구, #골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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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노동자. 두 권의 책을 낸 작가. 여성 아마추어 풋살선수. 나이 든 고양이 웅이와 함께 살고 있으며, 풋살 신동이 되고 싶습니다. <편집자의 마음>, <들어 봐, 우릴 위해 만든 노래야> 두 권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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