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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젊음의 결기와 함성을 기록한 <꿈꾸는 산하 목메인 강토>
 1980년대 젊음의 결기와 함성을 기록한 <꿈꾸는 산하 목메인 강토>
ⓒ 바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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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동교동에 몇 번 갔어?"
"동교동이요? 거기가 어딘데요?"

믿기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정말 동교동이 고 김대중 대통령이 사는 곳인 줄 몰랐다. 동교동이란 동 이름조차 몰랐다.

지난 군사정권의 공권력은 억압과 권위를 떠나 무지성적이었다. 누구누구와 아는 것만으로 손쉽게 빨갱이가 됐고, 행여 시위를 주동했다면 당연히 그 '수괴'인 김대중과 끈이 닿아있을 거라는 맹목적 의심을 가졌다.

역사는 작용과 반작용을 거듭한다. 임진왜란의 위기가 이순신을 낳고, 일제강점기가 독립운동가들을 탄생시켰듯, 군사정권은 수많은 투사를 만들었다. 참을 수 없던 시대적 울분은 지극히 한 평범한 학생을 총학생회장으로 이끌었고, 화답한 젊은 그대들은 목 놓아 시위를 일으켰다.

어느덧 40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날의 순수한 결기와 하늘을 울리던 함성은 아직 박강석씨의 귓가에 생생하다. 개인의 치세가 아닌, 후세를 위한 기록으로 책을 펴냈다. 책 <꿈꾸는 산하 목 메인 강토>다.

내 손으로 총학생회장을 뽑는 직선제의 부활

1952년생인 박강석씨는 소위 서울의 봄이라 불리던 1980년 한양대학교 총학생회장을 맡았다. 군대를 마치고 신소재공학부에 입학한 늦깎이였다. 그런 그가 총학생회장에 출마할 수 있었던 건 직선제 부활 덕분이었다.

지금은 믿기 힘들지만 유신시대였던 1975년에 전국 모든 대학에 직선제가 사라지고, 학도호국단을 만들어 학교에서 단장을 임명해버렸다. 5년 만에 찾은 선거의 소중함, 그를 이끈 건 이상현 교수의 명저 <자유·투쟁의 역사>라는 책이 준 강력한 충격과 감동이었다. '역사는 자유의, 자유에 의한,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라는 주제를 가진 서적이다.

예비역의 만학도에 뒤늦게 선거에 뛰어들었기에, 대중의 가슴을 울리는 연설이 필요했다. 진정성과 열정으로 고치고 다듬어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당선을 기뻐할 겨를도 없이 당시 전국학생회장단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데모를 한다는 전갈이 왔다. 당선된 바로 다음날이 디데이였다.

학생운동을 하면 김대중의 하수인으로 보던 시절
 
총학생회 선거를 앞두고 당시 박강석씨가 선택한 구호.
 총학생회 선거를 앞두고 당시 박강석씨가 선택한 구호.
ⓒ 박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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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학교운동장에서 직접 '민주·정의·자유'라고 혈서를 썼다. 함성이 일었다. 스피커에서 터지는 음악은 귀를 뚫을 기세였고, 박수와 합창이 천지를 덮었다. 기세를 몰아 교문 밖으로 진군했다. 경찰이 막아섰고, "왜 그러시느냐"고 채 묻기도 전에 선공이 시작됐다.
 
타다당, 최루탄이 발사되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경찰들과 공방전이 벌어졌다. 간호대 학생들이 총동원되어 물수건을 나르고, 최루탄에 널브러진 학생은 부축해 의대 건물로 데려가고 그런 난리가 없었다. 그러나 워낙 많은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니까 경찰부대는 뒤로 물러섰고, 우리는 나아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행렬이었다.

그렇게 1980년의 5월은 광주 뿐 아니라 전국이 뜨거웠다. 억눌렸던 젊은 분노는 대지를 흔들고 하늘로 퍼져나갔다. 사흘간 학생운동을 이끌었으니 당연히 수배령이 떨어졌다. 특A급 수배자였다. 계급 특진에 눈이 먼 경찰은 술자리에서 한양대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고 애먼 사람을 잡아오기도 했다.

얼마간 숨어 지내다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해 성동경찰서에 스스로 찾아갔다. 당시 공안당국에서는 학생운동 리더들이 고 김대중 대통령에게 사주된 이들이라고 봤다. 서울대, 고대, 한양대, 중앙대 등의 학생회장들이 모두 호남출신이라는 이유였다. 만나보기는커녕 동교동 자체를 몰랐지만 추궁을 당했다.

긴 조사 과정이었지만, 당당히 임했기에 담당과장은 젊은 시절 자신 모습을 보는 것 같다며 잘 대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박 회장! 너 내일 석방이야!"

여러 교수님 등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 도피과정에서 자신에게 피해가 갈 걸 알면서도 손을 내민 분들의 고마움도 소상히 밝혔다. 1980년 5월 13일에 당선돼 17일 밤 도피하기까지 짧지만 강렬하게 타오른 그날의 기억이다. 다음 날은 5.18이었다.

스무살의 순수함
 
재학시절 서예반 친구들과 고궁에서의 한 때. 앞줄 맨 오른쪽이 박강석씨다.
 재학시절 서예반 친구들과 고궁에서의 한 때. 앞줄 맨 오른쪽이 박강석씨다.
ⓒ 박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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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다양한 삽화가 곁들여져 읽는 재미를 더한다. 상암 월드컵경기장, 경복궁 지하철역 등을 설계한 고창석씨의 그림이다. 그와 오랜 기간 우정을 쌓은 친구다.

특이한 건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타인에 대해 상당 부분을 할애한 점이다. 박강석씨는 재수 후 곧바로 군에 다녀왔기에 총학생회장이 되기 전 이념적 학습을 할 시간이 없었다고 솔직히 고백한다.

어린 시절 유신헌법이 왜 잘못됐는지 정확히 알지 못해 알려줄 '운동권 친구가 있었으면' 했고, 전태일 평전을 읽으며 '이 사람의 바람도 나와 같았구나'며 동질감을 느꼈다고.

그런 박강석씨는 나이 60이 돼서야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줄 '운동권 스승'을 만나고, 벅찬 기쁨에 그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풀어놨다. 한국사회정책연구원 원장, 평화통일시민연대 공동대표인 윤조덕 박사다.

윤 박사는 1969년 서울공대 기계과에 입학 후 일찌감치 공활(공장활동)을 시작한 우리나라 위장취업 1세대다. 특히 그는 고 전태일 열사의 모친과도 활발한 교류를 가졌고, 윤 박사의 동생은 열사의 남은 동생에게 공부를 가르치기도 했다. 전태일 열사를 보며 자신의 심경을 투영시킨 박강석씨에게는 더더욱 뜻 깊은 만남인 셈이다.

윤박사는 1976년 2월부터 1979년 6월까지 무려 3년 5개월여에 거쳐 일신제강(주)의 일반 작업원으로 일했다. 1년 만에 위장취업이 탄로 난 이후, 회유와 협박에도 긴 시간 노동현장을 지켰다. 이후 독일 부퍼탈대학교(안전공학부)에 유학해 박사학위와 교수자격을 취득 후 한국노동연구원에서 노동자들의 안전은 물론 보상과 재활에 산파 역할을 했다.

흔히 나이가 들면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이 굳어진다. 자신의 과거에만 취해 타인의 삶이나 성취에 대해 존경의 마음을 내비치기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진심어린 공경이 담긴 박강석씨의 태도는 캠퍼스를 내닫던 스무 살 시절의 순수함을 닮아있다.
 
운동권 학생을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 전태일이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하는 만큼 간절해서였을까. 나는 드디어 운동권을 알게 되었다.

꿈꾸는 산하 목메인 강토

박강석 (지은이), 고창석 (그림), 바른북스(2021)


태그:#박강석, #꿈꾸는 산하 목메인 강토, #바른북스, #한양대, #윤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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