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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의 삶이 뒤엉키고, 과거 일들과 현재 일들이 등나무 줄기처럼 얽히고설키며 통시적(通時的)인 날줄과 공시적(共時的)인 씨줄로 짜인 것을 역사라 부를 수 있을까?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한 것이라 조국과 겨레 앞에 모든 것을 바쳤던 독립지사들을 이젠 직접 만날 수 없고, 그들 곁에서 함께했던 이들도 세상을 떠난 경우가 대부분이다.

독립지사는 아닐지라도 그들의 삶을 기억하고 계승하고자 했던 이들 역시 늙음을 피할 길이 없다. 이제 귀는 어둡고 기억은 흐릿하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역사를 살아내고자 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더 늦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이 글을 시작한다. - 기자 말


1965년 곽태영은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응징하고자 수소문 끝에 강원도 양구에 숨어들었다. 안두희는 당시 최고 권력자와 동향 친구이자 이 지역 사단장이던 이기건의 비호 아래 군납업에 손을 대서 돈을 벌었고, 마을 사람들이 '안두희 별장'이라고 부르는 저택에 살고 있었다.

방물장수로 위장한 곽태영은 수건, 양말, 장갑 등속을 팔며 기회를 엿보다가 12월 22일 마당에서 세수하던 안두희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안두희에게 오히려 반격당해 위기를 맞았지만, 엎치락뒤치락 격투 끝에 결국 안두희를 '응징'했다. 곽태영이 10년을 벼르고 벼른 일이었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들에 의해 곽태영은 곧바로 연행되었고, 안두희는 서울성모병원으로 옮겨져 두 차례의 수술 끝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 곽태영은 상해죄로 1966년 7월 30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선고를 받은 뒤 풀려났다.

가까스로 살아난 안두희는 양구를 떠나, 이후 '안영준'이란 가명을 쓰며 은거했다. 1974년 안두희는 가족과 함께 이민 가려다가 그 소식이 세상에 알려져 가족만 미국으로 보냈다. 1981년에도 안두희는 이민을 시도했으나 반대 여론으로 무산됐다. 안두희는 백범 암살에 대해 몇 번의 증언을 했으나, 증언할 때마다 말이 바뀌었다. 결국 죽을 때까지 '사실상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암살 배후 등에 대한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곽태영이 안두희를 응징한 것을 기념하여 의거 17년 후 양구에 세운 비석
▲ 안두희 응징비 곽태영이 안두희를 응징한 것을 기념하여 의거 17년 후 양구에 세운 비석
ⓒ 조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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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 냉천골공원(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하리 18-5) 앞에는 곽태영의 의거를 기념하는 비석이 셋 있다. 1982년 3월 3일(백범 서거 33주기가 되던 해)에 세운 비석(이 글에서는 '안두희 응징비'라고 부르겠다)이 하나이고, 민족정기소생협회가 1985년 4월 17일에 세운 비석이 그 둘이고, 1995년 4월 17일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가 백범 선생의 친필 어록(평생염원 오국독립, 平生念願 吾國獨立)을 새겨서 이 자리에 세운 비석이 그 셋이다.

'안두희 응징비'는 당시 홍천에서 약방을 운영하던 남궁경 선생이 세운 것인데, 앞면에는 한 줄에 11자씩 3줄 모두 33자를 세로로 내려써서 새겼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부 광복의 거성 김구 선생 (國父光復의巨星金九先生)
만고의 원흉 괘심한 아드흐 (萬古의元兇괘심한아드흐)
억만인 흠모할 곽태영 의사 (億萬人欽慕할郭泰榮義士)


좌우 옆면에는 각각 이렇게 새겨져 있다.

저(狙) 33 33 3.3 21 (왼쪽) ㅁ ㅇ ㅇ ㅂ (오른쪽)

정면 둘째 줄 '아드흐'라는 부분에서 누군가 '안두희'라고 새긴 것을 또다시 메워놓은 흔적이 보인다. 좌우 옆면의 한자 '저(狙)'와 숫자의 조합은 무얼 의미할까. 한글 자음들은 또 무슨 뜻일까? '안두희'를 부러 '아드흐'라고 새긴 까닭은 무엇일까?

"내 아버지를 죽인 것 같은 마음"
 
안두희응징비를 세운 후, 비석 옆에 선 남궁경 선생
▲ 안두희응징비와 남궁경 선생 안두희응징비를 세운 후, 비석 옆에 선 남궁경 선생
ⓒ 조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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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증을 안고 비석을 세운 사람, 남궁경씨를 수소문해 찾아나섰다. 2023년 6월 4일, 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홍소연 실장과 함께 만난 남궁경씨는 홍천에서 나고 자랐고, 지금은 원주에서 '남궁약방'을 운영하고 있다.

- 양구에 곽태영 선생의 의거를 기념하는 비를 세우셨잖아요? 어떤 마음으로 세우신 거예요?

"그렇게 위대한 분(김구)을, 강제로, 의자에 앉아계신 걸 쏴버렸으니, 그런 억울한 비극이 어디 있어? 그냥 우리 아버지 죽인 그런 느낌이야. 괘씸하기가 말로 할 수 없는 거지.

그런데 그게(안두희가) 감옥에서 나와서 거기서 군납공장을 해서, 거기 사단장들이 일요일이면 포인터 개를 끌고 나와가지고, 뻘건 모자 쓰고 총 메고 같이 꿩 잡고 이런 이야기를 듣고... 그러다 곽태영씨가 의거했다는 그 소식을 듣고 나니, 눈물이 막 쏟아지는 거야. 알고 보니까 나랑 한동갑이야.

그래서 어떻게? 내가 가서 후원할 수도 없고, 후원할 돈도 없고, 갈 수도 없고. 그냥 매스컴 듣고 그런 거지, 그 안타까움이 쌓이고 쌓여서 저게(안두희 응징비) 나온 거지, 뭐."

- 양구에 있는 안내문을 보니까, 이 비석을 수레로 옮기셨다고 돼 있던데요. 이걸 어떻게 옮겼나요?

"그때 기자들이 수레로 달구지로 가져왔다고 이야기했는데, 그걸 어떻게 수레로만 옮겨? 무게가 1톤도 넘는데, 그때 춘천에서 도매로 약 파는 회사가 있었는데, 그때는 약이 많이 팔릴 때지. 춘천에서 홍천까지 약 배달하는 차가 있었는데, 그 차한테 부탁했지. 그랬더니 가는 길에 내려다 주겠다고 하더라고. 그래도 차로 끝까지 갈 수는 없으니까. 나중에는 수레로 달구지로 옮기고 그랬지."

- 돌은 어떻게 구하셨어요?

"홍천 북방면, 두 밭 사이 밭고랑에 저 돌이 있었어. 돌이 반들반들한 게 아주 특이해. 아주 먼 옛날에 고인돌로 쓰인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면서 돌이 아주 마음에 들어. 저 돌이 두 밭의 경계에 있으니까, 밭 주인들이 서로 이쪽으로 넘기고 저쪽으로 넘기고 그래. 그래서 내가 가서 부탁을 했지, 내가 저 돌을 가져가도 좋겠냐고? 그랬더니 양쪽 사람 모두, 아유 어서 가져가라, 그래. 그래서 저 돌을 구했지."

- 비석을 세우려면 땅 주인한테 허락을 받아야 하잖아요, 그건 어떻게 해결하셨어요?

"거기 홍주범 선생이라고, 도청의 과장급이었는데 부자야. 안두희 집터가 그이 거였는데, 그 땅을 안두희한테 팔고, 안두희는 나중에 군청에다 그 땅을 팔았다고 하더라고, 비석을 세운다고 하니까 그이가 '세워도 된다' 그러기에 나는 그이만 믿고 아무 걱정 안 하고 터억 세운 거지.

그런데 거기도 그 비석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 거기 교육장이 그 비석을 싫어했어. 교육장 관사를 지을 때, 그게(안두희 응징비) 바로 그 앞에 있었어. 어느 날 전화가 왔는데, 그게 없어졌다는 거야? 그래서 가보니까 그 관사 뒤에다 엎어놓았잖아?

그래서 내가 교육장한테 따졌지, 그랬더니 원래대로 돌려놓겠다고 하더니, 안 하는 거야. 그래서 나중에는 좀 강하게 뭐라 했지. 나중에 양구의 김영진, 그이가 공원을 꾸며서 거기에 그걸(안두희 응징비) 잘 옮겨놓았더라고. 누가 뭐라고 해도, 김영진 그이가 최고의 공로자야."
  
"지나친 충성은 스스로 역적이 되는 것"
 
안두희응징비 오른쪽에 새긴 'ㅁ ㅇ ㅇ ㅂ'
▲ 안두희 응징비 오른쪽 안두희응징비 오른쪽에 새긴 'ㅁ ㅇ ㅇ 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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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석의 내용은 어떤 내용인가요? 암호 같은 것도 있더라고요.

"이게 한 줄이 11자씩이야, 석 줄 33자.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른세 분이 서명했잖아? 그래서 나도 최고로 애국을 나타내야겠다 해서 33자로 했지.

'아드흐' 이게 안두희인데, 살아 있는 사람의 실명을 쓰는 건 인간적 도리가 아니고, 안두희가 나쁜 놈이지만 그렇다고 나 역시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건 뭐 해서 이렇게 쓴 거고, 지나친 충성은 스스로 역적이 되는 길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

만고의 역적이지만, 그래도 살아 있는 사람이니까. 이름에서 받침을 뺀 거지, 그런데 곽태영 씨는 이름을 분명히 쓰라고 하더라고... 언젠가 가보니까 누군가 비석에 '안두희'라고 이름을 써놓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돌 공장에 가서 물어서 다시 (새로 새긴 자국을) 메워놨지.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권력에 충성하는 건 스스로 역적이 되는 거다. 이게 핵심인데, 이걸 강조하고 싶었어."
 
안두희응징비 왼쪽에 새긴 '狙 33 33 3.3 21'
▲ 안두희응징비 왼쪽 안두희응징비 왼쪽에 새긴 '狙 33 33 3.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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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옆면에 있는 한자 '저(狙)'와 숫자들, 그리고 '미음, 이응, 이응, 비읍' 이건 무슨 뜻이예요?

"'저(狙) 33 33 3.3 21' 이거는 (안두희가 백범 선생을) 저격(狙擊)한 지 서른세 해만에, 서른세 글자를, 3월 3일 21시에 세웠다. 이런 뜻이지. 'ㅁㅇㅇㅂ' 이건 '남궁경 립(立)'을 받침만 쓴 거고, 또 '백범'을 나타내기도 하는 거야. 알려지지 않은 사람인 내가 세웠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이 우습게 여길까 봐서, 또 못하게 하는 사람도 있을 수도 있고, 이름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받침만 쓴 거지."

- 한자 '저(狙)'랑 숫자는 무슨 뜻인지 알겠는데요, '미음, 이응, 이응, 비읍' 이게 어떻게 '백범'이 되요?

"이렇게 옆으로 눕혀서 봐, 숫자 백이잖아. 그리고 'ㅂ'은 백범! (맨 앞에 있는 'ㅁ'이 유난히 옆으로 길고 납작하다. 숫자로 '100' 그리고 '백범'의 'ㅂ'이다 - 기자 주)."
 
안두희응징비 '아드흐' 부분. 원래 '아드흐'라고 새겼던 것을 누군가 '안두희'라고 이름을 밝혀 새겼고, 다시 원래대로 메운 흔적이 고스란히 보인다
▲ 안두희응징비1 안두희응징비 '아드흐' 부분. 원래 '아드흐'라고 새겼던 것을 누군가 '안두희'라고 이름을 밝혀 새겼고, 다시 원래대로 메운 흔적이 고스란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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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석 내용은 직접 구상하신 건가요? 글씨도 선생님께서 직접 쓰시고요?

"그렇지, 이걸 누구한테 부탁할 수 없잖아? 이렇게 해놓으면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권력에 충성하는 사람이 없어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지. 그런 사람은 없어져야 해. 그래서 아드흐야, 아드흐.

춘천 학곡리에 돌 공장이 있어요. 돌 공장이. 그런데 내 글씨가 좋지가 않아서, 동네 파출소장한테 글은 써달라고 했지. 파출소장도 아무 소리 안 하고, 글을 써주더라고. 파출소장한테 글씨 써달라고 할 때는 '아드흐' 이 세 글자는 빼고 써달라고 했지.(웃음)"

- 이 비석을 세운 시간이 밤 아홉 시네요, 꽤 늦은 시간인데요?

"곽태영씨랑 안두희가 격투를 벌이는 걸 본 분이 있어, 바로 그 옆에 사시는 분인데, 그분한테 밤 9시에 비석을 덮어씌워 둔 천을 걷어달라고 부탁을 했지. 제막식을 9시에 해야겠다 생각한 게 있었는데, 왜 그랬는지는 지금 기억이 안 나. 그걸 옮기는 데 걸리는 시간 때문에 그랬는지 어쨌는지."

- 비석을 세우려면 돈도 필요하고, 힘든 일들이 많았을 것 같아요. 그 당시 힘들었던 것 몇 가지만 말해주세요.

"내가 뜻만 있지, 가진 것도 없고 하니까, 준비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어(안두희 응징비는 곽태영이 안두희를 응징한 지 17년 만에 세워졌다 - 기자 주). 그냥 조금씩 내 깜냥만큼만 꾸준히 준비한 거야. 그런데 그 당시에 주변에 (내 뜻을) 이야기하니까, 주변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더라고. 고마운 일이지. 힘든지도 몰랐어. 그냥 미쳤었지. 내가 낚시를 좋아해요. 시간 날 때마다 양구로 가서 낚시하면서 매양 그 생각이었지."

남궁경씨는 홍천 지역의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비석도 세웠었다(홍천뉴스투데이 2022년 11월 28일 기사, http://www.hongcheonnewstoday.kr/79225 ). 지금은 원주에 있는 광천수를 개발하고 무궁화동산을 가꾸어서 지역 경제를 살리고, 원주를 세계에 알리고자 하는 꿈을 꾸고 있다.
 
▲ 안두희응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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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다음에는 안두희응징비가 있는 양구 지역에서 백범의 뜻을 이어가고자 애쓰며, 누군가에 의해 원래 자리에서 치워졌던 안두희응징비를 지금의 자리에 옮겨 공원화하고 매년 그곳에서 광복절 기념행사를 하고 있는 양구 지역의 시민들의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합니다.


태그:#양구 냉천골공원, #안두희응징비, #곽태영, #남궁경, #백범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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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교사, 한국근현대사 특히 독립운동사에 관심이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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