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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이야기

올초 버섯에 관심있는 미국 하이킹 모임에 참석했다가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거주하시는 한국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분들중 한분이 장주암 (1948년~) 선생입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공로목사였던 고 장희진 (1904년~2010년) 목사님의 자제 분으로 형님 장소암 (1945년~) 선생님과 더불어 북미주 지역 민주화 인사로 한국의 군사독재시절 민주 세력을 물심양면 도와주셨던 분입니다. 기회 되면 살아오신 여정을 인터뷰해 보겠다고 부탁도 드렸습니다..
 
샌프란시스코 민주화 인사 장주암 선생님(왼쪽)과 함께. 오른쪽이 필자다.
 샌프란시스코 민주화 인사 장주암 선생님(왼쪽)과 함께. 오른쪽이 필자다.
ⓒ 이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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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샌프란시스코의 민주화인사 장주암 선생님의 첫 이야기는 1980년 5월 26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에게 군부 독재자 전두환의 광주 학살을 멈추게 하고 지원을 중단하라는 전보를 보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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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보의 내용은 "광주 시민 학살을 중단하고 군사 독재자가 아닌 한국을 지원하십시오. (STOP KILLING KWANGJU CITIZENS, SUPPORT KOREA NOT MILITARY DICTATOR.)"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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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6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에게 군부 독재자 전두환의 광주학살을 멈추게 하고 그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내용의 전보
 1980년 5월 26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에게 군부 독재자 전두환의 광주학살을 멈추게 하고 그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내용의 전보
ⓒ 장주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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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보가 발송된 지 두 달하고 5일 만인 1980년 7월 31일 국무부 공보담당 차관보 빌 J. 다이스가 다음과 같은 답장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장주암님께

5월 17일 완전 비상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대한민국의 상황에 대해 카터 대통령에게 보내주신 귀하의 전보에 감사드립니다. 회신이 늦어진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이익이 한국에서 헌법 개혁의 진전과 한국 국민의 지원을 받는 보다 광범위한 기반의 문민 정부에 의해 가장 잘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계엄령의 연장, 모든 정치 활동의 중단, 정치 지도자의 체포 등 최근 정치 자유화 과정의 심각한 차질에 대해 공개적으로나 비공개적으로 깊은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일관되게 양측이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무력이 필요할 경우 사상자를 피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을 요청했습니다. 광주의 당면한 위기가 종식된 지금 우리는 한국 정부가 남아 있는 보다 근본적인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를 희망합니다.

감사합니다,
윌리엄 J. 다이스, 공보담당 차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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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보담당 차관보(Assistant Secretary-Designate for Public Affairs) 윌리엄 J. 다이스 (William J. Dyess)의 답장
 공보담당 차관보(Assistant Secretary-Designate for Public Affairs) 윌리엄 J. 다이스 (William J. Dyess)의 답장
ⓒ 장주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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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보와 그 답장을 보니 발송 날짜가 제가 사전 검속되어 보안대에서 죽음을 넘나들며 고문을 받던 미국동부시각 1980년 5월 26일이라는 게 떠올랐습니다.

또 일제 강점기인 1913년 6월 30일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 이대위(1878~1928) 목사님이 일본인으로 오해받아 박해를 받던 샌추럴 밸리 해밑 지역 한인 농부들의 사정을 미 국무부 장관에게 전보를 보내 대한인국민회가 나라 잃은 조선의 영사 업무를 획득하여 조선 농부들을 돕고 조선인의 미국 입출국을 도왔던 역사도 떠올랐습니다.

전두환 폭압 피해자의 한 사람으로서 장주암 선생님이 그 전보를 보내실 때의 마음이 느껴져 너무 고마웠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샌프란시스코의 민주화 인사 장주암 선생님의 두번째 이야기는 장주암 선생님이 친형 장소암 선생님과 함께 1981년 1월 28일 LA를 방문하여 한인타운 올림픽 블러바드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던 전두환의 차를 견고한 유리가 금이 갈 정도로 몽둥이로 내리쳐 전두환이 카퍼레이드를 중단하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게 했던 이야기입니다.
 
좌측부터 필자, 샌프란시스코 민주화인사 장주암, 장소암 선생님
 좌측부터 필자, 샌프란시스코 민주화인사 장주암, 장소암 선생님
ⓒ 이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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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월 새해 들어 LA 총영사관의 박민수 총영사를 포함 전 공관원들은 무척이나 바빴습니다. 당시 서슬이 시퍼런 신군부의 수장 전두환이 2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의 정상 회담을 위한 방미의 첫 기착지가 LA였기에 '대통령 초청 교민 간담회' 등등의 준비로 연일 밤을 새울 때입니다.

이미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전두환 방미 선발대로 와서 전두환이 묵을 센추리 플라자 호텔에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당시 박민수 제 7대 LA 총영사와 이민휘 LA한인회장을 포함 40여 한인단체 대표들로 구성된 '전두환 내외 범교포환영준비위원회'가 구성돼 준비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총영사관 동포 담당 영사는 1월 28일 저녁 센추리 플라자 호텔에서 개최될 '전두환 교민 간담회'에 참석할 동포 인사들 명단을 최종 점검하고 있었습니다.

애초 청와대와 외교부에서 시달된 공문에는 교민 간담회 참석자를 50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 대통령의 LA 방문은 근 18년 만에 처음이라 화제가 되었는데 1980년 광주 학살로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던 전두환이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하여간 교민간담회에 너도나도 초청을 받으려고 공관이나 외교부 그리고 청와대까지 줄을 대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한인단체장이 우선적으로 초청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총영사관에 한인 단체 현황 보고서가 밀려들었습니다. 당시 총영사관에는 불과 100여개 단체 현황서만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전두환 초청 교민 간담회에 초청받으려고 단체 현황 보고서가 총영사관으로 약 300통이 한꺼번에 접수됐습니다.

이런 보고를 들은 전두환은 '교민 단체장은 모두 초청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애초 500명 예상의 초청객이 두배로 늘어나 약 1000명이 센추리 플라자 호텔에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전두환은 1981년 1월 28일부터 11일 동안 레이건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공식 방문하기 위해 워싱턴DC로 가기 전 LA를 첫 기착지로 삼았습니다. 역대 대통령 중 전두환의 LA방문은 여러 기록들을 양산했습니다.

한인들은 버스 20대를 대절해 2500여 명이 LA공항 환영 행사에 나갔습니다. 사상 최대 인파였습니다. LA총영사관은 환영객들을 위해 LA공항에 10개의 간이화장실까지 차렸습니다. 전두환이 숙소로 가기 전 들르는 코리아타운의 중심 올림픽 불러바드 선상 노먼디와 웨스턴 구간에 태극기 180쌍이 꽂혔고 플래카드까지 내걸렸습니다. 거리에는 한복을 입은 2만 명의 한인들이 나왔습니다. 이때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 때 기증한 우정의 종도 처음으로 타종했습니다.

이때 인도에 있던 50여 명이 "전두환 물러가라, 하야하라! 5·18 광주 학살의 우두머리 전두환을 죽이자" 등의 구호를 외쳤습니다. 이 시위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내려간 민주인사 장소암, 장주암 형제분과 권순태, 최명배 4분을 포함해 LA의 노길남, 예정웅, 김운하, 김용, 김현한, 김상돈 등 미국 전역에서 모인 동포들로 광주 학살에 대한 항의로 관까지 만들어 올림픽가에 나왔습니다.

전두환의 카퍼레이드 차가 앞을 지나면 관을 던져 차 앞을 막아 멈춰 세운 후 교육자 출신 은호기 선생님이 준비해 간 권총으로 전두환을 사살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50여 명의 반대 집회 주위로 300명 가량의 정장 차림 백인 미국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장소암 선생님은 미국인들도 한국의 학살자를 구경하러 나왔는가 했습니다. 그런데 전두환이 바로 앞을 지날 때 이들이 갑자기 50여 명 반대 집회자 사이사이로 끼어들어 난장판을 만들고 관을 내동댕이쳤습니다.

그때 "전두환 차다"라는 말을 듣고 동생 장주암 선생님이 들고 있던 각고목으로 전두환이 탄 차 앞 유리창을 내리쳤습니다. 유리에 금이 가는 것을 보고 주위는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전두환이 탄 오픈 카는 앞 유리창이 금이 간 채 카퍼레이드를 중단하고 경호원들에 둘러싸인 채 숙소인 센추리 플라자 호텔로 달아났습니다.

전두환을 사살하려던 은호기 선생님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참고로 은호기 선생님은 전라북도 고부 출신으로 1939년 10월 30일에 태어나 고부국민학교와 전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오고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1970년 유학 차 도미하여 LA에서 시사평론가로 활동하며 5.18 밀항자 합수 윤한봉(1948년~2007년) 선생을 보살펴 주기도 하셨습니다.

신속한 미국 경호대의 행동으로 전두환 일행을 놓친 한인 동포 시위대는 아쉬운 표정으로 길가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미국 경찰은 한국 독재자에 대한 한인들의 당연한 의견 표현으로 보고 일체의 조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전두환은 4년 뒤인 1985년 4월 24일 조심스럽게 LA를 다시 방문했습니다.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워싱턴으로 가던 길에 LA에 들른 전두환은 25일 새벽 8가 할매집 식당을 찾았습니다. 이 때도 민주 인사들은 시위를 통해 전두환의 무력 정권 찬탈과 광주학살에 격렬히 항의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대담내용과 관련정보를 유투브와 블로그에 공유함
참고1. 장소암 장주암 형제분과 나눈 좌담 유투브 크립 https://youtu.be/ZM19bGHE590
참고2. 내용을 공유한 블로그 https://yellowroses.tistory.com/ 


태그:#장소암, #장주암, #은호기, #전두환,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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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잡지연구소 연구원 근무하다 버지니아텍에서 농공학을, 브라운대학에서 지질학을 공부했으며 노스이스턴 공대 환경공학석사와 로드아일랜드대학 토목환경공학박사를 취득했다. 플로리다주 리 카운티 공무원을 시작으로 미연방공무원으로 국방성에서 근무했으며 현재는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에 근무하고 있다. 2003년 한국정부로부터 5.18 민주화유공자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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