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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하는 한채윤씨를 처음 만난 게 언제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확실하게 기억에 남는 장면은 있다. 2007년 혹은 2008년이었던 것 같은데, 퀴어문화축제의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었던 한채윤씨의 모습이다.

같이 일하던 후배가 "퀴어문화축제가 열리는데 같이 가봐요"라고 했고 흔쾌히 갔던 현장에서 처음 그녀를 봤다. 처음 봤을 때 머릿속이 잠시 복잡해졌다. 내 주변에 성소수자 친구들이 많은 편이었는데도 순간 '이 분의 성별을 모르겠다'고 혼자 되뇌었다. 생각해보면 그리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본격적으로 알고 지냈던 것은 2009년 여름이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에서 하는 '레인보우 링' 모임에서였다. 망원동의 옥탑방(?) 사무실이었는지, 뒷풀이 장소였던 어느 감자탕집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맞은편에 앉아 통성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무대에 서 있던 인상적이었던 그 사람을 다시 만났다는 것에 나 혼자 매우 반가웠던 기억이 있다. 

그 해 가을, 한채윤씨와 나는 책 출간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출판사에 있었던 나에게 한채윤씨는 2008년에 시작한 진보적 기독교인과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만남이었던 '슘프로젝트'(85쪽)라는 이름으로 '목사님이 들려주는 동성애 이야기(가제)'라는 주제의 책을 기획한다며 출판기획서와 함께 원고의 일부를 보내왔다.

무얼 믿고 원고를 나에게 보냈는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회의를 몇 번 했고 같이 활동하자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 였는지 나는 끝까지 함께 하진 못했다. 이듬해인 2010년 겨울, <하나님과 만난 동성애>라는 책이 출간된 것을 보며 '더디지만 끝까지 해내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 일이 벌써 13년 전이라는 게 더 놀랍다.

시간은 켜켜이 쌓여 올해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에서 발간한 <이쪽 변호사가 알려주는 동성커플을 위한 실용법률 가이드북>을 디자인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한채윤씨가 이 책을 함께 만들자며 연락해주었다.

작업을 하면서 모르던 것을 많이 알게 되었다. 이 책의 텀블벅 펀딩은 100%, 300%를 넘어 668%로 마감이 되었다. 동성커플을 위한 책이라고 했는데, 그냥 성인이라면 누구나 읽어도 도움이 될 책이어서 주변에 펀딩을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지금까지 한채윤씨는 성소수자와 관련한 다양한 책을 기획하고 출간하는데 노력했다. 그런데 이번엔 자신의 에세이책 <우린 춤추면서 싸우지>(한채윤 지음, 은행나무)를 출간했다. 최근 15년 간의 활동을 알고 있는 나였지만 너무나도 궁금했다. 한국사회에서 힘들고 힘든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어떻게 해왔는지, 어렸을 땐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말이다. 

한국에서 성소수자 인권운동이란
 
한채윤 에세이 '우린 춤추면서 싸우지'
 한채윤 에세이 '우린 춤추면서 싸우지'
ⓒ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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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춤추면서 싸우지>는 총 5부로 나뉘어 있다. 어느 부분 하나 지루하게 읽히는 부분이 없다. 평소 성소수자 운동이나 성평등한 관점에 대해 호감을 갖는 사람이라면 같이 슬퍼하고 같이 웃으며 공감할 수 있다.

저자가 평소 대중 강연을 많이 해와서인지 성소수자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이라도 '아! 이렇게 생각할 수 있구나!' 하며 읽을 수 있는 포인트들이 많다. 혹시나 주변의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기 위해서 이 책을 선택했다면, 박수를 쳐주고 싶다. 

1부 '성별교란자의 여행'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자라오면서의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성별이분법적인 사고에 균열을 내는 에피소드는 짧은 머리를 유지했던 나의 성별을 아이나 어르신들이 헷갈려하는 것을 좋아해서인지 나의 경험들과 겹쳐 읽혔다.  

성소수자 인권단체 활동을 하게 된 과정과 활동의 이야기를 담은 2부 '싸우자는 예쁜 말'의 에피소드들은 저자의 에너지를 느끼게 해준다. PC통신의 소식지를 보다가 동성애자 모임 광고를 보고 활동을 시작한 계기(70-75쪽)부터 대한민국 최초의 퀴어 잡지 <버디>를 6년이나 발간한 이유(76-81쪽), 퀴어를 주제로 아카이브를 구축한 사례(130-134쪽), 2007년 첫 입법예고되었다가 16년간 제정되지 않고 있는 차별금지법(145-161쪽) 등의 이야기를 통해 성소수자 인권활동가로서의 삶을 엿볼 수 있다. 

3부 '전환해야 하는 건 당신입니다'와 4부 '퀴어하게 세상 읽기'는 저자가 꼭꼭 한 글자, 한 글자 눌러 썼다는 느낌을 받는다.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 없이 혐오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성평등의 눈으로 사회에 대한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제시한다.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와 다를 바 없고(162-166쪽) 탈이성애자협회가 없는 이유는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며(180-186쪽)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에 무지한지(198-201쪽) 설명한다. 그리고 그 무지에서 비롯한 혐오발언이 성소수자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는지(212-216쪽), 생물학적 성별의 한계가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만드는지(232-237쪽) 질문한다. 

마지막 부 '나는 행복하니까 당신도 행복하길'에서는 저자의 사랑 이야기를 읽으며 울고 웃기도 하고, 그녀가 활동할 수 있었던 그 단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성적 지향을 두고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레즈비언이란 정체성을 긍정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불안하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원칙을 지키며 살면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살겠다는 원칙, 이거 하나! 그리고 지금까지 이 원칙대로 살고 있다."  - 남들 사는 대로, 남다르게 살기로 했다, 359쪽

시기상조의 다른 해석

올 봄, 누군가의 SNS을 보다가 기분이 언짢았던 적이 있다. 5~6년 전쯤 하려고 했던 일이 있었고 주변에 손을 내밀었을 때 '그런 거 지금 필요해?'라는 반응을 들었던 것. 그리고 그때 그런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혼자 씁쓸해 했다. 당시 단 한 명이라도 같이 하자고 했다면 힘들더라도 했을 텐데...

아쉬움은 여전히 있지만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냥 남들이 하지 않는, 먼저 생각하는 일들을 지금 나와 함께 도모하는 사람들과 하며 잘 살면 되지 않겠냐는 그런 다짐이었다. 그 다짐을 나의 SNS에 써두었는데, 그때 한채윤씨가 '맞음' 한 단어를 쓰고 갔더랬다. 그 말이 그렇게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우린 춤추면서 싸우지>의 들어가며를 읽으면서도 '맞음'이라는 그 말이 떠올랐다.
 
"시기상조時機尙早가 '어떤 일을 하기에 아직 때가 이름'이라는 뜻이지만, '상조'의 한자를 서로 돕는다는 의미의 '相助'로 바꾸면 시기상조時機相助는 '서로가 돕는 시기, 평등세상을 향해 서로 도와가며 나아가기 적당한 때'를 의미한다" - 들어가며, 9쪽

이 책은 저자의 에세이집이기도 하지만, 26년간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하면서 일어난 시기상조(時機相助)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채윤씨가 그간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하면서 춤추면서 싸울 수 있었던 이유,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SNS 덧글로 '맞음'이라고 했던 그 위로를 함께 춤을 추며 답하고 싶다.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 당신의 사랑엔 잘못이 없다. 우리는 서로의 곁에 머물며, 서로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어울리며 살아갈 수 있다. 우리가 날 때부터 가졌던 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지 타인에 대한 편견이나 혐오가 아니다. 편견없이 타인의 삶을 지켜볼 용기를 우리는 모두 가질 수 있다." - 만약 용기를 글로 전할 수 있다면, 390쪽

우린 춤추면서 싸우지

한채윤 (지은이), 은행나무(2023)


태그:#성소수자, #에세이, #인권운동, #우린춤추면서싸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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