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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봉룡과 구분숙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경상북도 경주에서 결혼 한 행복한 부부였다. 결혼 2년 만인 1947년 아들이 태어났다. 두 부부는 너무나 기뻤다. 그 후 2년 만인 1949년 둘째 아들도 태어났다. 두 부부는 세상에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었다.

1950년 초 어느 날 방앗간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던 한봉룡에게 갑자기 총을 들고 빨치산들이 산에서 내려왔다. 그들은 한봉룡의 얼굴에 총을 겨누며 "배고프니 쌀을 달라"고 요구했다. 거부할 수 없었던 한봉룡은 쌀 한 말을 그들에게 건네 줬다. 쌀을 받은 빨치산들은 부랴부랴 산속으로 들어갔다. 너무도 놀란 한봉룡은 경주경찰서에 곧 이 일을 신고했다. 그리고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몇 달이 지나 1950년 민족의 비극 6.25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이 나자마자 대통령 이승만, 국방부 장관 신성모 등 대부분 각료들은 날이 어두워지자 남몰래 서울을 탈출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6월 27일 밤 10시, 대전 충청남도지사 관저에서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서울을 사수할 것입니다"라는 이승만의 녹음 육성이 방송되었다.

방송을 들은 서울시민들은 당연히 이승만이 서울에 남아서 직접 방송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수선한 가운데에서도 서울시민들은 '믿음직한' 이승만의 육성 방송을 들으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이런 방송이 끝나고 약 4시간 후인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이승만의 지시로 시끄러운 굉음과 함께 한강 인도교와 철교가 폭파되었다. 이승만의 대국민 사기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만삭 아내와 두 아들 있는데... 학살당한 아버지 

한편,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1950년 7월 어느 날, 한봉룡은 경북 경주시 안강읍 갑산 1리에서 마을 주민 5~6명과 논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유난히 무더웠던 그날 경찰들은 한봉룡을 찾아와 그의 얼굴에 다짜고짜 총대를 들이 밀었다. 그리고는 어안이 벙벙해 하던 그를 연행해 갔다.

당시 그는 28세의 가장으로 각각 3살 된 아들과 1살 된 아들이 있었고 25세의 아내 구분숙은 셋째를 임신한 만삭의 임산부였다. 하지만 그렇게 연행 되 간 한봉룡은 산골짜기로 끌려가 경찰들에게 학살당했고 이미 파놓은 구덩이에 다른 주검들과 함께 매장되었다. 만삭의 아내와 눈이 촉촉한 두 어린 아들들에게 한 마디 작별인사도 못하고...

그 후 59년이 흐른 지난 2009년, 필자가 몸담았던 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경주지역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 이렇게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경주지역에서 발생한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라는 일차적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군과 경찰이 관할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자들을 불법 사살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이다. 비록 전시였다고 하더라도 범죄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민간인들을 예비검속하여 사살한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이다."

한영훈은 이렇게 이승만 정권에 의해 불법으로 학살당한 한봉룡의 친손자다. 그는 불과 3년 전인 2020년, 그가 30세가 넘었을 때 그의 부친 한종식으로부터 조부 한봉룡의 비극적인 삶과 죽음에 대해 처음 들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도 소개된 보도연맹사건은 6.25전쟁 전후 대한민국 군·경찰·극우조직이 자국민인 보도연맹원과 양심수 등 몇 십만 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1990년대 말 전국에서 보도연맹원 학살 피해자들의 유골이 발굴되면서 보도연맹사건의 실제가 확인됐다. 그리고 2008년 노무현정부 1기 진실위는 국가기관으로는 처음으로 민간인이 학살되었다는 것을 공식으로 확인했다.

당시 필자의 한 지인도 자신의 조부가 6.25 전쟁 중 국군에게 학살당한 것을 이때 처음 알았다고 눈물을 흘리며 알려왔다. 그 지인의 부친은 평생 그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려고 반세기가 넘도록 딸에게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진실위 진실 규명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딸에게 눈물을 쏟으며 한영훈의 경우처럼 '가문의 비밀'을 털어놓은 것이다.

지난 22일부터 24일까지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족 한영훈씨와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하여 싣는다.

'빨갱이 집으로 낙인찍힐까'... 뒤늦게 알게 된 진실 
 
한영훈씨
 한영훈씨
ⓒ 한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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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모 구분숙은 조부 한봉룡이 대한민국 경찰에 의해 학살당했을 당시인 1950년 7월 25세였는데 그때 상황에 대해 부친에게 직접 말씀 하신 적이 있나?

"부친은 조부가 돌아가신 다음해인 1951년 출생하셨다. 조모는 부친이 3세 때인 1954년 친정으로 가셨다. 그래서 부친은 증조모와 같이 살다 9살 때인 지난 1960년 증조모께 부친 한봉룡의 학살 사건에 대해 처음 들었다. 그 후 부친은 20세 때인 지난 1971년 조모와 재회하여 조부의 학살 소식을 직접 듣게 되었다."

- 조부모의 자녀 등 가족관계를 소개하면?

"조부모는 1945년 결혼하시고 슬하에 아들 셋을 두셨다. 부친의 큰형과 작은형은 어릴 때 질병으로 사망하셔서 부친은 한순간에 독자가 되어 버리셨다."

- 조부가 학살될 당시 부친 한종식은 유복자였는데 부친으로부터 조부 학살 사건에 대해들은 내용 중 특별히 가슴 아팠던 점은?

"조부가 없이 태어난 부친은 어릴 적 고생만 하셨다고 하셨다. 또 3세 때인 지난 1954년 조모가 아예 친정으로 가셔서 부친은 증조모와 함께 살았지만 여러모로 말 못할 고생이 많으셨다고 하셨다."

- 졸지에 남편과 아버지를 국가폭력으로 잃어버린 조모와 부친은 그 후 어떤 삶을 사셨는지?

"너무 힘들었다고 하셨다. 나도 30세가 넘은 3년 전인 지난 2020년 그 소식을 처음 알게 되었다. 아버지께 '왜 이렇게 늦게 알려주셨냐?'고 하니까 본인 고생하신 것도 알리기 마음 아팠는데 그 당시 연좌제의 분위기로 인해 우리 집이 빨갱이 집으로 낙인찍힐까 두려워 말씀을 안 하셨다고 하셨다."

- 지난 2009년 1기 진실위는 경주지역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 이렇게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경주지역에서 발생한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라는 일차적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군과 경찰이 관할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자들을 불법 사살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이다. 비록 전시였다고 하더라도 범죄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민간인들을 예비검속하여 사살한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이다." 위 진실위 진실규명 후에 국가를 상대로 보상신청을 한 것으로 아는데 그 후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진실위 진실규명 결정을 받고 부친은 지난 2011년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하셨고 그래서 지난 2014년 3000만 원의 보상을 받으셨다. 하지만 지난 2013년 사망하신 조모와 부친의 형제 두 분의 위자료 청구권에 대한 상속권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지난 2016년 부친은 국가에 다시 소송을 하셨다. 1심은 부친의 피해를 인정하여 국가가 1억여 만 원과 지연이자를 배상하라고 선고했다. 하지만 지난 2017년 대법원은 공소시효가 두 달이 지났다고 판결하여 부친은 결국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셨다."

- 국가폭력으로 인한 조부의 학살 사건에 대해 결국 법원에서는 (국가폭력으로 인한 억울한 조부의 죽음을) 인정은 하나 공소시효 만료로 보상은 해 줄 수 없다는 입장인데 이런 판결을 받고 어떤 마음이 들었나?

"부친은 현재 73세 이신데도 평생 억울하게 살았고 억울한 마음이 크다고 하셨다. 한 가문이 멸문지화 당하였는데 두 달 차이라는 공소시효로 인해 보상을 못 받게 된 점이 더욱 아쉽다고 하셨다. 몇 달 전 내가 나서서 변호사들에게도 물어봤는데 공소시효 문제로 인해 승소할 가능성이 적다고 하여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을 포기하게 되었다."

"국가폭력사건은 공소시효와 상관없이 보상해야"

- 부친 한종식은 한평생 조부 한봉룡을 그리워하며 시대를 원망하셨을 것 같은데 부친의 외로움과 서러움을 옆에서 보며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부친은 증조모와 경주에서 9세까지 지내다 부산으로 가셔서 육아원에서 지내시면서 해운대초등학교를 졸업하셨다. 이후 선교사님이 운영하는 대구 옆 경산 메노나이터 중-고등학교(전쟁고아들 교육해주는 곳)를 졸업하셨다. 20세에 군대 36사단 수송병으로 21개월 복역 중 사회고아라고 판단했는지 의가사 제대하셨다. 제대 후 삼척탄광생활, 울릉도 오징어잡이 등등 고생을 많이 하셨다."

- 국가폭력으로 인한 억울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에게 국가, 특별히 법원이 어떤 대우를 해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나?

"당연히 국가가 국민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에 국가폭력사건은 공소시효와 상관없이 증거가 명확히 있는 사건이기에 보상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 국가폭력 피해자 유족 입장에서 윤석열 정부에게 과거사정리와 관련해 특별히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반인륜적범죄나 국가폭력은 공소시효와 상관없이 다시 법 제정을 해서라도 명확한 보상과 진심 어린 국가의 사과를 바란다. 국가폭력으로 인해 불우하고 힘들게 보내야 했던 부친의 삶을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아프다.

나도 누이도 그냥 일찍이 조부께서 돌아가신 줄로만 알고 지내왔는데 뒤늦게 이런 중대한 사건의 피해자 유족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마음이 너무 아프다. 내 어린 딸에게 어떤 것을 가르쳐야 할지 국가란 정말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국가폭력으로 인한 억울한 피해자가 더 이상은 없게 정부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해 주시길 간절히 바란다."

태그:#공소시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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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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