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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 역사공원' 조성과 관련한 이념 논란이 정치권으로 비화하고 있다. 국가보훈행정을 총괄하는 책임자인 보훈부 장관이 "장관직을 걸고서라도 막아내겠다"고 강변한다. 심지어 언론을 향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작태"라는 험한 표현까지 썼다. 일부러 이념 논쟁으로 끌고 가려는 뉘앙스를 풍긴다.

글쓴이는 박민식 장관의 "국가의 품격은 누구를 기리는가에 달려 있다"는 그 말에 공감한다. 우리 대한민국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가족의 안위를 무릅쓰고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 항일 독립운동가를 기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보훈 행정은 그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세간에 떠도는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그 말이 여전히 목격되기 때문이다.

2018년 보훈처가 행한 '국가보훈대상자 생활실태조사'를 보면 독립 유공 보훈대상자 66%가 소득이 없다. 그리고 독립 유공 보훈대상자 76%는 만성질환에 시달린다. 2022년 8월 15일 자 KBS 보도에 따르면 "독립 유공 후손의 순자산이 국민 평균치를 밑돌고" 보훈 지원금을 제외하면 "독립 유공 후손 가구의 46%가 정부의 저소득층 기준"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항일 독립운동 후손임에도 그를 인정받지 못한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절반 가까이 저소득계층으로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해방된 지 78년이 지났지만 독립 국가인지 의아스러울 지경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들과 애국지사들을 선양하고 보훈의 예를 다하는 것은 후손으로서 당연한 도리이다. 이를 앞장서서 추진하라고 보훈청이 존재했고 윤석열 정부 들어서 국가 보훈부로까지 격상했다. 보훈부로 그 위상이 격상된 만큼 마땅히 국가가 나서서 독립 유공자를 발굴하고 선양하는 일에 적극 앞장서야 한다. 그런데 국가 보훈부는 후손들이나 연구자들이 나서서 발굴한 항일 독립운동가들에게조차 독립 유공 서훈에 인색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봉준 장군이다.
 
2차 동학농민혁명군의 독립 유공 서훈을 위한 <학술토론회>가 2023년 8월 25일 국회 제3세미나실에서 열렸다. 박용규 박사가 2차 동학농민혁명과 을미의병을 비교 연구한 내용을 발표하고 있는 장면
▲ 2차 동학농민혁명군의 독립 유공 서훈을 위한 <학술토론회> 2차 동학농민혁명군의 독립 유공 서훈을 위한 <학술토론회>가 2023년 8월 25일 국회 제3세미나실에서 열렸다. 박용규 박사가 2차 동학농민혁명과 을미의병을 비교 연구한 내용을 발표하고 있는 장면
ⓒ 하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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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동학농민혁명은 이미 학계에서 '항일 독립운동'으로 인정된 지 40년도 더 지났다. 박용규 박사(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의 연구에 따르면 고 조동걸 교수(국민대)가 <독립운동사> 제10권(1978)에서 2차 동학농민혁명을 최초의 '항일 독립전쟁'이라고 논구하며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어젖혔다. 이후 80년대 들어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돼 70년대까지 '동학란'으로 표기하던 고 한우근 교수(서울대)조차 "민족적 항쟁, 항일구국투쟁, 항일전쟁"으로 그 성격을 논증했다. 그리고 신용하, 정창렬, 안병욱, 박찬승, 홍영기, 신영우, 배항섭, 유영익, 조경달 교수도 2차 동학농민혁명이 '항일 독립운동'이었음을 밝혔다.   그 결과 1998년부터 대학 교재인 <한국독립운동사 강의>에는 '항일 독립운동'의 시작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1894. 7)에 항거한 갑오의병(1894. 8)과 2차 동학농민혁명(1894. 9)으로 서술하고 있다. 고등학교 8종 검정 <한국사> 교과서에도 1980년부터 2차 동학농민혁명을 '항일구국투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은 갑오변란, 갑오왜란으로도 부르는데 청일전쟁의 시작점이 된 사건이다. 45년에 이르는 학계의 연구 성과에 힘입어 동학농민혁명 110주년을 맞은 2004년엔 국회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도 제정했다.   학문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2차 동학농민혁명은 이미 '항일 독립운동'으로 인정받았다. 수만 명에 이르는 동학농민혁명군을 총살, 화형, 작두형 등으로 잔혹하게 대량 학살한 지 꼭 25년 만에 3·1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손병희 선생을 비롯해 무려 9명이 민족대표로 서명했는데 그들 모두 25년 전 공주 우금티 전투에 참전해 일본군과 맞서 싸웠던 항일 의병들이다. 따라서 2차 동학농민혁명은 학문적으로, 법적으로, 역사적으로 항일 독립운동의 정당성이 입증됐다. 속히 국가 보훈부가 나서서 이를 제도화하면 끝날 일이다.
 
2020년 5월 18일 박용규 박사가 전봉준 최시형 독립유공 서훈 <재심 신청서>를 들고 보훈처를 찾아가는 모습.
▲ 보훈처에 독립유공 서훈을 추서하도록 접수하러 가는 박용규 박사 2020년 5월 18일 박용규 박사가 전봉준 최시형 독립유공 서훈 <재심 신청서>를 들고 보훈처를 찾아가는 모습.
ⓒ 박용규 박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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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2차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농민군들은 자신들을 '의병'으로 칭했다. 1년 뒤 명성황후를 불태워 죽이고 단발령을 내린 것에 반발해 항거한 을미의병(1895) 참여자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고 있다. 1962년부터 오늘날까지 독립 유공 서훈을 추서해 143명이 을미의병으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최시형을 비롯해 동학농민군들은 단 한 명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질 못하고 있다.   연구자들과 후손들이 풍부한 자료를 갖다가 제출했음에도 보훈부는 "독립운동 성격 불분명"이라는 황당한 이유로 여러 번 기각시켰다. 국가 보훈부가 나서서 독립운동가를 발굴해야 함에도 거꾸로 연구자와 후손들, 그리고 뜻있는 시민단체가 연구 발굴한 독립운동가들조차 외면하는 현실이 우리 보훈 행정이 처한 부끄러운 민낯이다. 다시 말해 학문적으로, 법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논증된 항일 독립운동가조차 인정하지 않으며 보훈부의 직무를 유기하는 셈이다.    따라서 박민식 국가 보훈부 장관은 노태우-김영삼-박근혜 정부 시절 시작하고 조성해온 '정율성 역사 광장'을 갑자기 이념 논쟁으로 논란을 자초할 일이 아니다. 국가 보훈부 관료들과 공적 심사위원들의 직무 유기를 질타하고 국가 보훈 행정을 바로 세워나가는 데 장관직을 걸어야 한다. "국가의 품격은 누구를 기리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에 참으로 시급하고 중차대한 과제이다.

태그:#국가보훈행정, #항일독립유공자 서훈, #을미의병, #2차 동학농민혁명, #갑오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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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동기는 일제강점기 시절 가족의 안위를 뒤로한 채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항일투사들이 이념의 굴레에 갇혀 망각되거나 왜곡돼 제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점이 적지 않아 근현대 인물연구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복원해 내고 이를 공유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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