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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색을 좋아하나요? 사실 당신이 어떤 색이 좋다 하더라도 나는 그 색깔을 모릅니다. 예컨대 파란색이라고 할 때 그 파란색은 과연 어디쯤에 놓여 있는 것인지요?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빛깔인가요? 아마도 우리의 파란색은 각자의 인생 경험과 신체조건만큼이나 각기 다른 색깔이 아닐까 싶습니다.

번스타인 부부는 <생각의 탄생>에서 '관찰은 생각의 한 형태이고, 생각은 관찰의 한 형태'라고 했습니다. 비 오는 날엔 가만히 집안에 들어앉아 뜰을 살펴보는 것이 즐겁습니다. 계획이 없어야 하죠. 출근을 하고, 여행을 하고, 누군가를 만날 약속이 있다면 궂은 날씨에 Passacaglia(파사칼리아)를 듣는 기쁨을 기분 좋게 느낄 수 없습니다.
 
가을비 젖은 잔디마당
▲ 가을비 젖은 잔디마당  가을비 젖은 잔디마당
ⓒ 김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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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날엔 잔디 색깔이 한층 짙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서러운 풀빛이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힘이 느껴지는 초록. 창가에 앉아 가을비에 젖은 마당을 보며 멍하니 관찰합니다. 알지만 안다고 할 수 없는 정원의 색깔입니다. 봄 향기가 춘향이라면 가을 물결은 추파(秋波)예요. 바로 그 유혹의 눈길 말입니다. 그러니 가을엔 색(色)을 얘기하는 것이 자연스럽네요.

중국 고서에선 청춘(靑春) · 주하(朱夏) · 백추(白秋) · 현동(玄冬)의 파랑, 빨강, 하양, 검정으로 사계의 변화를 표현합니다. 반면 우리가 계절에 대해서 느끼는 색은 다릅니다. 대체로 봄은 초록, 여름은 파랑, 가을은 갈색, 겨울은 흰색을 떠올리죠.

기후나 풍토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역과 상관없이 색을 구별하는 최초의 말은 빛과 어둠을 구별하는 단어라고 합니다. 빛은 흰색, 어둠은 검은색, 그리고 색을 묘사하는 세 번째 단어가 가리키는 색은 어김없이 빨강이랍니다.
 
이렇게 언어가 달라도 색을 가리키는 단어들의 출현 순서가 동일한 것은... <중략>... 인간 시각의 생물학적 원리에 부합하는 순서로 생겨난다. 파장이 긴 빛(빨강)의 이름을 먼저 짓고, 다음으로 파장이 중간인 빛(초록)과 파장이 짧은 빛(파랑)의 순서로 이름을 짓는다. <컬러의 힘 : 내 삶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언어, Karen Haller>

 
하지만 색을 말로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연한 공감도 석연치 않을 때가 많아요. 더더구나 꽃의 색을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바로 색의 연속성 때문입니다. 한 가지 색으로 종결되고 다른 색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미세하게 섞이며 다른 색으로 이어지죠. 이 색과 저 색에 걸친, 어중간한 색이 많다는 얘기입니다.

헤르만 헤세가 정원을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물러나 영혼의 평화를 지키는 장소'라고 했을 때 '영혼이 평화로운 정원'은 과연 모습일지 도리어 혼란스럽습니다. 언어의 한계죠. 하지만 모네의 그림을 보거나 모네의 정원을 떠올리면 '아, 이 정원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지요. 직관적인 색채의 유혹, 색이 가진 시각적인 흡인력 때문입니다.

언어가 벽을 긁고 있는 사이, 사물의 색깔을 표현하기 위해 화가들은 끊임없이 탐구합니다. 이전의 화가들이 자연에서 답을 구했다면 모네는 스스로 색의 세계를 구축합니다. 바로 정원이죠. 모네의 정원에서 생의 충만함을 발산하는 식물의 색채는 미적 탐구의 대상이자 예술적 영감의 근원이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지금의 모네의 정원은 그림 속 모네의 정원이 아닙니다. 모네 사후에 가족마저 죽고 난 후 오랫동안 방치되다가 국가에 귀속되었고, 황무지가 된 집과 정원은 1980년 공개될 때까지 20여 년 동안 정원사들이 모네의 그림을 연구하며 섬세하게 복원해 낸 것이라고 합니다.

한편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색의 명칭은 대부분 자연에서 왔습니다. 빨강은 불, 하양은 해, 노랑은 흙(눌), 파랑은 풀처럼 말이죠. 여기에 식물의 빛깔이 덧칠됩니다.

남색(쪽빛)은 일 년생 풀인 쪽에서, 치자색은 치자나무 열매에서 채취한 염료에서, 도색(桃色)은 복숭아, 연두색은 연한 콩의 색에서 왔습니다. 서양의 바이올렛violet, 푸시아fuchsia, 오렌지orange, 라임lime, 플럼plum, 멜로mallow, 페리윙클periwinkle 등도 마찬가지죠. 식물을 모르면 알 수 없는 색상이 대부분입니다.

식물의 색깔은 빛의 농도와 위치에 따라 다르고, 날씨와 시간에 따라 바뀌며, 보는 이의 감정에 따라 달리 보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성별에 따라 느끼는 색감도 다릅니다. 역으로 색이 사람의 감정을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빨갛게 익어가는 고추의 빛깔처럼 색깔은 우리에게 시기와 계절을 알려주기도 하고요.

이처럼 끊임없는 상호작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색을 잘 표현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교과서와 상업화된 색상의 틀에 갇힌 채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사과!' 하면 즉각 빨강을 떠올리는 파블로프의 개가 되어 다양한 색깔의 사과를 연상하지 못하고 평생 색맹으로 살아갈지도 모르죠.

그런 면에서 정원생활은 수동적으로 학습해 온 색의 관념을 털어내고, 주체적이면서 주관적인 색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싶어요. 이 같은 자유분방한 태도가, 어쩌면 번스타인 부부가 언급한 '놀랍고도 의미심장한 아름다움을 감지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꿈꾸는 용담빛 파랑', '깔끔 떠는 독말풀빛 하양', '진심 어린 주목빛 초록', '뾰로통한 민들레빛 노랑', '간지러운 백일홍 분홍', '먹음직스러운 감빛 주홍'처럼 내 정원 속 색깔을 찾아가는 겁니다.

내가 발견한 어디에도 없는 색깔, 그러니까 같이 살아봐야 비로소 보이는 빛깔의 이름을 불러주면서(이런 건 어떨까요? 나만의 아름다운 색깔(나아색), 그때의 그리운 색깔(그그색)... 꿈용 파랑, 깔독 하양, 진주 초록, 뾰민 노랑... 줄임말을 이렇게 쓰면 좀 어색한가요?).

"No one is you and that is your power." 누구도 나와 같지 않다는 것이야말로 나의 힘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힘이 됩니다. 다양한 색깔의 식물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저마다 다름을 인정받기 위해 오묘한 빛깔로 일생을 애쓰며 살고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것이 모네가 그의 정원에서 찾고 싶었던 인상Impression은 아닐까요? 관찰은 꽤나 꼬리가 깁니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스토리에 게재한 글입니다


태그:#정원생활, #가을비, #색깔, #마당,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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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초보 뜨락생활자. 시골 뜨락에 들어앉아 꽃과 나무를 가꾸며 혼자인 시간을 즐기면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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