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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잘 됐다. 갓 지은 밥을 잘 섞으며 주걱에 묻은 밥풀을 떼먹어 본다. 밥이 고슬고슬하게 잘 되면 따로 반찬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맛있다. 고작 하루 먹을 양의 쌀을 전기밥솥에 안치고 버튼을 누르는 일이지만 여기까지 꽤 여러 날이 걸렸다.

반찬은 저명한 유튜브 요리사들이 돕는다. 국이든 찌개든 양념장이든 곁눈질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된다. 어느새 끓어오른 요리를 몇 가지 밑반찬과 곁들여 상을 차리고 나면 가벼운 만족감이 번진다.

모처럼 시래기지짐을 해보려 한다. 작년에 텃밭에서 거둔 무청으로 만든 냉동 시래기를 된장, 고춧가루, 들기름에 무쳐서 멸치와 함께 볶은 후 물을 넣고 한참을 끓여 자작해지면 대파를 얹어 한소끔 더 끓인 후 먹는다. '무엇을 먹는지 말하라. 그러면 나는 당신이 누군지 말해 주겠다'던 <미식예찬>의 장 앙텔므 브리아사바(Jean Anthelme Brillat-Savarin)는 나를 어떤 사람으로 얘기할까?

요령이 없을 땐 반조리식품을 애용했지만 실력이 늘면서 메뉴가 다양해졌다. 텃밭 배추로 담근 김치에 양파, 대파, 두부를 넣고 꽁치김치찌개를 끓이기도 하고(김치를 들기름에 얼마나 잘 볶느냐가 관건이다), 멸치 육수에 된장을 풀어 직접 기른 감자, 애호박, 청양고추 등을 넣어 된장찌개를 얼른 뚝딱(절대 얼렁뚱땅이 아니다) 만들기도 한다.

날씨에 따라 비 오는 날엔 감자전, 호박전을 해 먹기도 하고 한여름엔 콩국수와 비빔국수로 더위를 날리기도 한다. 이것저것 성가실 땐 전자레인지에 새우젓으로 간을 한 달걀찜 하나 만들고 밭에서 금방 딴 계절채소, 상추나 깻잎, 오이, 풋고추만 곁들여도 밥 한 그릇 뚝딱이다.
 
유튜브 보고 처음 만들었던 무뚝뚝한 감자치즈전
▲ 감자전 유튜브 보고 처음 만들었던 무뚝뚝한 감자치즈전
ⓒ 김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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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 아침은 새소리에 귀가 먼저 깬다. 녀석들의 성화에 물 한 컵을 들고 데크로 나앉아 눈으로 마당을 한 바퀴 돈다. 창문을 열어 밤새 집안에 쌓인 묵직한 공기를 내보내는 동안 간단한 아침을 준비한다. 하루 한 끼는 조리하지 않고 날것으로 먹는다. 사과, 당근, 블루베리 등 과일에 유산균 가루를 우유에 발효해 만든 요구르트를 얹은 샐러드.

물론 제철이라면 텃밭 채소를 빠트릴 수 없다. 양배추, 양상추, 복분자, 오크라에 발사믹이나 코울슬로 소스를 뿌리고, 달걀프라이나 순두부를 곁들인다. 균형 잡힌 식단이면서 준비가 쉽고 뒤처리가 간단하다.

허기를 채우고 나면 설거지의 시간이다. 기름기 없는 그릇을 먼저 씻고 기름기 있는 것들은 세제 물로 헹군 후 닦는다. 싱크대 안까지 잘 정리하고 나면 개운한 기분이 든다. 슬슬 살림의 맛을 알아가면서 때론 멀티플레이어를 꿈꾼다. 설거지를 하는 동안 세탁기를 돌리거나, 빨래하는 동안 청소기를 민다.

하루하루가 이렇게 먹고 사는 일이다. 부끄럽지만 평생 차려진 밥상만 마주해 왔다. 이젠 내가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이 대견하다. 해보니 알겠다. 어찌 보면 지금의 시골 생활은 내 자신을 스스로 건사하는, 온전한 혼자가 되는 연습이다.

과거의 어떤 일들도 지금에 찌개를 끓이거나 설거지를 하는 일보다 대단하지 않다. 그동안 나는 더 나은 일이 있다고 믿으며 스스로 내 앞가림을 외면하는 태도로 살아온 것 아닌가 싶다. 삼시세끼조차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아왔지만 너무 익숙해져 고마움을 모르고 살았다.

명절이다. 그동안 나를 위해 밥상을 차리고, 힘든 내색 없이 애쓴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운이 좋아서 여기까지 왔고, 혼자 지켜낸 삶이 아니기에 앞으론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며 살아야겠다.

태그:#삼시세끼, #밥상, #설거지, #시골생활, #명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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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초보 뜨락생활자. 시골 뜨락에 들어앉아 꽃과 나무를 가꾸며 혼자인 시간을 즐기면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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