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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에는 1004개의 섬이 있다. 1004는 날개 달린 천사다. 신안군은 천사 조각상 1004개를 세우고 있다. 섬 하나에 천사가 하나다. 그 섬들에 가면 생명이 꿈틀대고 역사가 흐르며 자연이 숨 쉬고 낭만이 넘실댄다. 미래의 역사·문화·환경 자원으로 각광 받는 신안 1004섬. 그 매력을 새롭게 만나는 연중기획을 시작한다. 황호택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와 이광표 서원대 교수가 매주 1회 집필한다.[기자말]
목포에서 섬사랑 6호를 타고 잔잔한 바다를 3시간 가량 달리면 다이아몬드 제도를 벗어나면서 파도가 높아졌다가 한 시간가량 더 가서 우이도 진리항에 닿는다.

진리 포구에서는 두루마기와 갓 차림을 한 조선시대 두 인물의 동상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선착장에서 노를 들고 입도객(入島客)을 맞는 동상은 홍어장수 문순득(文淳得·1777~1847).

문순득표해기적비(文淳得漂海紀績碑)라는 비석이 실물대(實物大)의 동상과 키가 엇비슷하다. 여기서 진리선창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손암(巽庵) 정약전(1758~1816) 동상이 서 있다. 강진에서 해배(解配)돼 우이도(牛耳島)로 찾아오는 동생 정약용(1762~1836)을 포구에 나와 기다리는 모습이라고 한다.
 
홍어장수 문순득 동상 좌대에는 ‘아시아를 눈에 담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홍어장수 문순득 동상 좌대에는 ‘아시아를 눈에 담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 황호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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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암은 1801년 12월 우이도에 들어왔고 문순득은 같은 달 우이도를 출항했다가 표류를 당했다. 손암의 우이도 입도와 문순득의 출항(出港)이 비슷한 시점이지만 문순득이 출항 전에 손암을 만났는지는 기록상으로 분명하지 않다.

문순득은 조선인으로서 최장 기간 표류 기록을 수립했다. 오키나와 필리핀(스페인 령), 마카오(포르투갈 령), 베이징 등을 거치며 서양문화를 경험하고 돌아온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문순득이 3년 2개월 만에 살아 돌아오자 손암은 기적 같은 이야기에 강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손암은 그를 집중 인터뷰해 <표해시말>(漂海始末)을 썼다. 손암이 1805년 흑산도로 유배지를 옮기기 직전이었다.
  
풍랑을 만나 오키나와, 필리핀까지
 
조기를 반(半)지하 창고에서 낮은 온도로 보관해 육지에 내다 팔던 조기간장. 복원되기 전의 옛 건물이다.
 조기를 반(半)지하 창고에서 낮은 온도로 보관해 육지에 내다 팔던 조기간장. 복원되기 전의 옛 건물이다.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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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도(牛耳島)는 먼바다에 있는 흑산도권 섬들로 나가는 길목이자 연안으로 들어오는 관문이다. 우이도는 산지와 구릉으로 이루어져 평평한 경작지가 거의 없었다. 섬의 물산이 넉넉지 못해 상선을 타고 내륙과 섬 사이를 오가며 장사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문순득은 홍어를 사다가 영암이나 영산포 등지에 팔고 그 돈으로 쌀 등을 사왔다. 1801년 12월 홍어를 사기 위해 흑산도 남쪽 태사도로 갔다. 태사도는 지금의 상태도 중태도 하태도를 이른 말. 문순득과 작은아버지 문호겸 등 마을 사람 6명이 함께 배를 탔다.

문순득 일행은 1802년 1월 18일 태사도에서 홍어를 사서 돌아오다가 큰 풍랑을 만나 대해(大海)로 한없이 떠밀려가게 된다. 우이도에서는 배가 예정일을 넘겨 돌아오지 않자 모두 죽은 줄만 알았다.

폭풍에 휘말려 키 자루가 꺾이고 돛을 펼 수가 없어 바람이 부는 대로 운명을 맡겼다. 날이 밝아 동남쪽에 큰 산이 보였는데 제주도였다. 뻔히 바라보면서도 다가갈 수가 없었다.

며칠 지난 후 동남쪽에 큰 섬이 나타나 해안가에 닻을 내리니 6~7인이 다가와 물과 먹을 수 있는 죽을 접대했다. 오키나와 대도(大島)였다. 지금은 일본 가고시마 현에 속해 있는 섬이다.

문순득 일행은 대도에서 수도인 나하(那覇)로 갔다. 오키나와 국왕은 중국 푸젠성(福建省)으로 가는 진공선(進供船)을 타고 중국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데 진공선이 다시 큰 바람을 만나 10여 일 밀려다니다가 지금의 필리핀에 해당하는 여송(呂宋) 살루마기 항에 닿았다.

문호겸 등 4명은 1804년 3월 문순득보다 9개월 먼저 귀국했다. <표해시말>에는 필리핀에서 표류인 운송을 책임진 오키나와 사람들과 표류인인 푸젠성(福建省)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 일행이 헤어지게 됐다고만 나와 있다.

먼저 귀국한 우이도 사람 4명이 필리핀에서 문순득과 헤어진 뒤 어떤 경로를 거쳐 귀국하게 되었는지 <표해시말>에는 나와 있지 않다. 해외 기록에 따르면 이들 4명은 샤면(廈門)과 푸저우(福州)를 거쳐 베이징(北京)에서 조선 동지사(冬至使) 일행을 만나 함께 귀국했다.

여송에서 일행과 헤어진 문순득과 김옥문은 비간이라는 마을에 머물렀다. 비간은 스페인인들이 진출해 세운 식민 도시로 문순득은 이곳에서 조선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서양문화를 접촉했다. 마을에 큰 성당이 하나 있었다. 종탑의 종이 울리면 사람들이 성당에 모여 미사를 올렸다.
  
문순득이 방문했던 필리핀 비간 대성당.
 문순득이 방문했던 필리핀 비간 대성당.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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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간 성당은 스페인이 1790~1800년에 건축했다. 문순득은 필리핀에 표착한 1802년 말에서 1803년 8월 마카오를 향해 출발하기 이전에 성당을 방문했다.

<표해시말>에는 '신묘(神廟) 한쪽 꼭대기에 탑을 세우고 탑 꼭대기에 금계(金鷄)를 세워 바람이 오는 방향으로 스스로 돌게 하였다'는 묘사가 들어 있다. 비간성당이 <표해시말>에 나오는 '신묘'임을 알아낸 결정적 단서다.

가톨릭 신자였던 손암이 문순득의 이야기를 듣고 성당임을 몰랐을 리 없다. 손암은 천주교에 대한 혹심한 탄압을 피해가기 위해 신묘라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문순득이 조선인 최초로 서양문화를 체험한 필리핀 비간 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문순득이 조선인 최초로 서양문화를 체험한 필리핀 비간 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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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돌아온 문순득

문순득은 필리핀 비간에서 끈을 꼬고 나무를 해 시장에 내다 팔아 중국으로 갈 여비를 모았다. 중국 광둥(廣東)을 오가는 상선이 있었다. 문순득은 배 운임으로 필리핀에서 번 대은전(大銀錢) 12개를 주고 밥은 배 안에서 해 먹었다.

광둥의 오문(澳門·마카오)에 도착해 관청에서 심문을 받은 후 객사에 머물렀다. 사람들이 장사할 때 동전을 사용해 거래하는 것이 문순득에게 신기롭게 보였다.

문순득 일행은 주로 배를 타거나 수레를 이용해 베이징으로 갔다. 베이징 고려관(高麗館)에 머무르며 오래 기다린 끝에 조선에서 온 사신을 만나 수레를 타고 조선을 향해 떠났다. 의주를 거쳐 한양을 지나 무안 다경포(多慶浦·운남면 성내리) 나루까지 걸어서 내려왔다.
 
문순득 생가. 문순득의 5대손인 문채옥씨가 이 집 벽장에 《표해시말》
등 주요 고문서를 보존했다.
 문순득 생가. 문순득의 5대손인 문채옥씨가 이 집 벽장에 《표해시말》 등 주요 고문서를 보존했다.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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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순득은 언어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녀 오키나와어와 여송(呂宋·필리핀)어의 주요 단어를 언문(한글)으로 표기해 놓았다. <표해시말>은 오키나와 방언에 대한 연구자료로 소중한 가치를 지녀 오래전에 일본어로 번역됐다.

제주도에 표류한 여송 선원들이 언어가 통하지 않아 9년 동안 억류돼 있었다. 이들은 제주 관아에서 "어디서 왔느냐"고 손짓 발짓을 동원해 물으면 팔로 하늘 먼쪽을 가리키며 "막가외"(莫可外)라고 소리치며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문순득이 여송에 표류해서 그 나라 언어를 언문으로 기록해둔 <표해시말>이란 책이 있다는 것이 조정에 알려졌다. 조정의 지시를 따라 제주관아에서 여송 선원들에게 조선글로 적은 여송국의 방언으로 말문을 터보니 그들은 이국에서 처음 듣는 고향 말에 정신을 못 차리고 울부짖었다. 이들은 <표해시말> 덕에 필리핀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다산은 후일 여송 선원들이 외쳤다고 기록된 '막가외'는 마카오였다고 풀이했다.
  
우이도 진리 선창의 중수 기념비. 앞에 보이는 안내판 뒤편의 왼쪽이 글씨가 마모된 옛날 비석이고 오른쪽이 그 내용을 새로 새긴 비석.
 우이도 진리 선창의 중수 기념비. 앞에 보이는 안내판 뒤편의 왼쪽이 글씨가 마모된 옛날 비석이고 오른쪽이 그 내용을 새로 새긴 비석.
ⓒ 황호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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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에게 들려줬을 외국 돈 이야기

다산의 <경세유표>(經世遺表)에는 문순득이 마카오에서 경험했던 화폐와 관련된 내용이 인용됐다. 이 동전에 관한 내용은 <표해시말>에는 언급돼 있지 않다. 문순득이 배를 타고 장사를 하다가 강진에 들러 다산에게 화폐 이야기를 들려줬을 개연성이 높다.
 
흑산도 사람 문순득이 서남 바다에 표류하여 유구 여송국을 두루 구경하고 마카오에 이르러 해외 여러 나라 큰 장사치들을 많이 보았는데, 그들이 사용하는 돈이 대개는 이와 같았다고 하였다.

지금의 동전 한 닢 무게로써 은전 한 닢을 주조하여 동전 50을 당하고, 또 은전 한 닢 무게로써 금전 한 닢을 지어서 은전 50을 당하게 하되, 대·중·소 3층이 있도록 하면, 3종류의 금속이 총 9종류의 돈으로 되는데 참으로 9부 환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1818년 정약용의 수제자 이강회(李綱會·1789 ~ ?)는 손암이 죽은 지 2년 뒤인 1818년 우이도에 들어와 문순득의 집에 거주하며 책을 저술했다. 문순득의 외국 배들에 관한 관찰을 토대로 <운곡선설>(雲谷船說)을 썼다.

이강회의 아호는 운곡(雲谷). 이강회는 <운곡선설>에 '순득은 장사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라 비록 문자에 능한 것은 아니나 사람됨이 총명함과 재능이 있다'라고 인물평을 해놓았다.

손암이 쓴 <표해시말>의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산이 강진을 떠난 뒤 우이도에 들어온 다산의 수제자 이강회가 문집 <유암총서>(柳菴叢書)에 <표해시말>을 필사해놓아 후세에 전해졌다.

<표해시말>은 경제 문화사적 기록으로서 가치가 높다. 1부는 일기체적 구성법으로 시간순으로 표류 경과와 현장 상황에 대해 묘사했다. 2부는 풍속, 궁실(집), 의복, 선박, 토산 등 5개 항목으로 구분해 오키나와와 필리핀의 문화를 소개했다. 3부는 조선어와 오키나와어, 여송어를 비교한 112개 단어를 기록했다.
 
진리마을과 포구 전경. 진리마을 지붕은 하늘색으로 통일했다.
 진리마을과 포구 전경. 진리마을 지붕은 하늘색으로 통일했다.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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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암은 문순득에게 천초(天初)라는 별호를 지어주었다. 세상의 다양한 문물을 처음으로 경험하고 돌아왔다는 뜻이다. 다산은 문순득의 아들을 여환(呂還)이라고 작명했다. 필리핀에서 돌아와 낳은 아들이라는 뜻이다.

<표해시말>이 필사된 <유암총서>는 문순득의 5대손인 고 문채옥(文彩玉·1920년생)이 궤짝에 담아 벽장에 보관하고 있는 것을 민속학자인 최덕원 전 해양대학 교수가 발굴해 세상에 알렸다. 문채옥의 딸 종임(69·銀任)씨는 "아버지가 한문 공부를 많이 해 <유암총서> <운곡잡저>(雲谷雜著) 같은 책을 소중히 간직했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고태규, 조선시대 홍어장수 문순득의 해외 표류여행에 대한 연구, 한국사진지리학회지 제33권제2호 별책, 2023
문화재청, 국립해양유물전시관 학술총서 제16집 전통한선과 어로민속조사보고서 5, 우이도 2009
최성환, 《문순득 표류연구》-조선후기 문순득의 표류와 세계인식-, 민속원, 2012


태그:#우이도, #표해시말, #문순득, #동상, #진리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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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탐사보도로 한국기자상을 두해 연속 수상했다. 저서 '박종철 고문치사와 6월항쟁'은 언론 지망생들의 필독서 반열에 들었다. 시사월간지 신동아에 황호택이 만난 사람을 5년 5개월동안 연재하고 인터뷰 집을 7권 펴냈다. 동아일보 논설주간, 서울시립대 초빙교수를 지냈고 현재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 대학원 겸직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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