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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아웃(blackout), 정전이다. 전기사정이 좋지 않은 필리핀은 한 달에 서너 차례 이런 일이 발생한다. 주로 늦은 밤에 일어나는 일이라 정전이 되면 막막할 따름이다. 오늘도 밤 10시가 넘어서자 갑자기 백열등이 나가고 모든 전열기가 멈춘다. 밤 기온이 25℃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 이곳은 한국으로 치면 매일 밤이 열대야다. 선풍기나 에어컨 없이는 잠을 이룰 수 없어 정전은 곧 잠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보통 짧게는 30분 길게는 2시간이면 다시 전기가 들어오는데 오늘은 자정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좁은 방에서 끈적거리는 열기를 견디다가 더는 참을 수 없어 옥상으로 올라갔다. 사위는 등화관제를 하는 것처럼 어둡고 고요한데도 간간이 들리는 개 짖는 소리와 오토바이 오가는 소리가 열기에 찬 도시를 잠 못 들게 한다.

암청색 하늘에서는 물먹은 것처럼 뿌옇게 흐린 별들이 눈물인 양 이슬을 뿌린다. 집들 사이로 늘어서 이슬에 젖은 열대의 교목들이 어둠 속에서 긴 이파리를 서걱인다. 포근하고 아름다워야 할 먼 이국의 밤이 소음과 열기로 심란하다. 높고 깊고 한없이 푸른 한국의 하늘이 그립다. 지금쯤 한국의 산야는 가을이 깊어 풍성한 결실과, 높은 하늘만큼이나 끝 모를 우수로 사람들을 이곳저곳에서 서성이게 할 것이다.

열대야, 한밤중에도 뒤척여
 
한없이 키를 높인 야자수들이 코코넛을 주렁주렁 단 채 한가로이 하늘을 이고 서 있다.
 한없이 키를 높인 야자수들이 코코넛을 주렁주렁 단 채 한가로이 하늘을 이고 서 있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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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전에 환경적 동물인가 보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아니 모든 생명체는 환경에 지배를 받으며 환경에 적응해 가면서 살아가는 것 같다. 환경은 그곳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의 모습뿐만 아니라 성격을 형성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영국의 철학자 스펜서가 제창하지 않았던가. 적자생존(適者生存),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만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도태되어 멸망한다고. 이것이 바로 자연현상이며 삼라만상의 순환논리일 것이다.

내게도 내가 느끼지 못하는 계절의 흔적들이 내 DNA마다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봄이면 얼었던 대지를 뚫고 힘차게 솟아오르는 생명체들의 힘찬 발걸음 소리, 은빛 물결 반짝이며 흐르는 강물 따라 연분홍 꽃잎 분분히 흩날리던 봄날의 향기. 여름이면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바지랑대처럼 기운 채 울어대던 전봇대와, 성난 바다의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따라 목청껏 분노를 토해내던 사람들의 아우성.

가을이면 풀벌레의 노래에 맞춰 익어가는 과일과 곡식들, 형형색색으로 물드는 단풍들의 파노라마. 겨울밤을 틈타 소리 없이 내리는 함박눈, 나목이 줄지어 선 길을 따라 빈 들에 가득하던 적막까지도, 내 의식의 어느 깊숙한 곳에 물고기 비늘처럼 각인되거나 자리 잡고 내 생체리듬을 조절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내가 낮 기온이 32℃ 내외에 멈춰있고 1년 내내 열대야인 곳에서 견뎌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4계절이 뚜렷한 곳에서 평생을 살아오다가 계절의 변화가 없는 곳에서 살아가려니 왠지 적응이 어렵고 몸이 균형을 잡지 못하는 것 같다. 밤에는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밤중에도 몇 번을 깨어나 뒤척이다가 아침을 맞곤 한다. 열대의 덥고 습한 날씨에 피부는 탄력을 잃고, 몸은 늘 피곤이 가시지 않은 느낌이다.

다행히 음식을 가리지 않는 체질이라 그다지 힘들지 않는데도 활력이 넘치거나 생기가 왕성하지는 않다. 나이 탓도 있겠지만 내 몸이 낯선 땅에 익숙해지지 않은 이유가 크리라 생각된다. 외래에서 유입되어 적응을 어려워하는 나에 비해 이 땅에 뿌리 내리고 사는 생명체들은 얼마나 여유롭고 풍성하며 활력이 넘치는지 모르겠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이곳이 그들만의 낙원이라고 환호한다.
 
한국에서는 실내에서 관상용으로 기르는 식물인데, 이곳에서는 야외에서 군락을 지어 자란다. 원래 이름은 실린드리카이며 생육환경이 맞으면 이렇게 예쁜 꽃도 피운다.
 한국에서는 실내에서 관상용으로 기르는 식물인데, 이곳에서는 야외에서 군락을 지어 자란다. 원래 이름은 실린드리카이며 생육환경이 맞으면 이렇게 예쁜 꽃도 피운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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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사람들이나 나무들이나 모두 살아가는 게 비슷하다. 늘 바쁠 것 없이 서두르지 않고 살아간다. 대체로 체구가 크지 않아 식사 양도 적다. 우리가 식사때마다 여러 가지 반찬과 함께 식사를 하는 반면, 이들은 대개 밥 한 그릇에 반찬 한 가지다. 한참 혈기 왕성한 학생들도 점심시간에 구내식당에서 조그만 접시에 밥 한 공기와 반찬 하나로 식사를 때운다. 점심때마다 반찬 두 가지를 꼬박꼬박 챙기는 내가 미안할 정도다.

주택가나 공터, 야산에 늘어선 나무들도 여유롭기는 매 한 가지다. 키를 높이 세운 야자수나 바나나 나무는 열매를 주렁주렁 단 채 산들바람에 한가로이 나뭇잎을 손인 양 흔든다. 우리나라 나무처럼 나무들끼리 치열하게 투쟁하지 않아도 햇빛과 물과 양분이 충만하여 사는 게 지루할 정도로 평온하다. 그래서 나무들이 비탈에 서서 자라지 않는다. 더욱이 민다나오는 루손이나 비사야 등 다른 섬들과 달리 태풍이 있는 곳도 아니어서 그야말로 키 큰 나무들에게는 파라다이스일 것이다.

1년의 사계가 뚜렷하고, 그것을 다시 24절기로 나눠 그에 맞춰 씨뿌리고 가꾸며 쫓기듯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여유가 이들의 삶 곳곳에 배어 있다. 어쩌면 게으름 같기도 한 이들의 삶이 열대의 환경에서 적응해 온 오래된 생활방식일 것이다. 고난 없는 나무는 나이를 먹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래서 이들의 삶에는 희노애락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처럼 계절마다 새겨진 매듭이 없다.

우리는 온갖 풍상 속에서 모나고 각진 삶을 살다 보니 좀 풍요롭게 살 수는 있어도 마음의 여유를 잃고 산다. 이들은 아무리 바빠도 뛰어다니는 일이 거의 없다. 쇼핑몰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으면서도 누구 하나 빨리 하라고 재촉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런 모습 위에 지하철을 타려고 바쁘게 뛰어가는 서울시민들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무엇이 진정한 삶이며 행복인지 모를 일이다.
 

태그:#코이카봉사단, #필리핀, #다바오, #열대야, #야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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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물처럼, 바람처럼, 시(詩)처럼 / essayist, reader, trave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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