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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로우(Hallo)! 도와주세요! 내 아이가 바뀐 것 같아요!"

네덜란드 스키폴 국제공항의 국제선 도착 대합실 한편에서 한 여성이 다급한 목소리로 사람들을 향해 소리친다. 순식간에 대합실에 모여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아이가 바뀌었다고요. 내 아이는 어디에 있나요..."

지난 9월, 서면으로 인터뷰한 안스 페이퍼(Ans Pfeiffer)씨가 떠올린 1976년 1월 24일의 기억이다. 그날 오후 3시, 공항 창밖으로는 하얀 눈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고 안스 페이퍼는 네 시간이나 자동차를 운전해 이곳에 도착했다. 오늘은 이역만리에서 내 아이가 되어 주러 온 소중한 나의 딸과 처음 만나는 날이다. 슬하에 두 아이가 있었던 안스씨는 입양을 통해 막내를 만나기를 희망했고 그로부터 꼬박 2년을 기다려 이곳에 왔다.

당시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대리 입양'이라는 제도를 허용하여 양부모가 한국에 와서 아이를 만나고 선택할 필요 없이 나라 간 이동 에스코트 등 모든 입양 절차를 입양기관이 대행했다. 그래서 해외 입양부모들은 자국에서 아이를 만났다. 

안스씨는 입양을 결정하고 며칠 뒤 기관으로부터 한 장의 사진을 받았다. 웃는 모습이 예쁜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의 한국 여자아이였고 드디어 오늘 그 아이를 품에 안게 될 것이다. 이날 공항에는 안스씨 말고도 똑같은 이유에서 공항 대합실을 찾은 부모들이 수십 명 있었다.

한국발 비행기에 아기들과 함께 탑승했던 한국의 입양기관 관계자들이 아이들을 한 명씩 데리고 나왔다. 순간 대합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양부모들이 움직였다. 그 안에는 안스씨도 있었다. 직원들은 일사분란하게 아이들을 양부모 손에 넘겼다. 하지만 안스씨에게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내가 사진으로 봤던 그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가 품안으로 건네진 것이다.

"이 아이는 제 아이가 아닌 것 같아요. 혹시 아이 바뀌신 분 안 계세요? 여기 계신 분 중 여권 속 아이랑 지금 안고 계신 아이가 바뀌신 분 계세요?"

혹시라도 여권이 뒤바뀐 것일까 생각이 들어 외쳐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뿐이다.

"그 이야기를 정확히 알아야 될 것 같았어요"
 
사진 왼쪽은 한국에서 출국 전 만든 여권 속 아이 사진. 오른쪽은 요안네커스의 양부모가 도착 직후 찍은 사진
 사진 왼쪽은 한국에서 출국 전 만든 여권 속 아이 사진. 오른쪽은 요안네커스의 양부모가 도착 직후 찍은 사진
ⓒ 김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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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스는 다음 날 해외 입양을 주선한 국제입양관리국(BIA)에 전화를 걸어 혹시 이후에라도 아이가 바뀌었다고 연락이 온 사람이 있냐고 물었다. 그쪽에서는 확인 후 연락드리겠다고 했지만 수개월이 지나도록 감감 무소식이었다.

"제 딸을 원하지 않아서 그렇게 확인 요청을 했던 것은 아니에요. 다만 저는 이 아이가 누군지 어떻게 친모와 헤어졌는지 그 이야기를 정확히 알아야 될 것 같았어요.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저는 아이의 입양 전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는 유일한 어른이니까요."

BIA는 끝내 답을 주지 않았고 그렇게 그 아이는 안스씨네 가족이 되어갔다.

2002년, 온 나라가 월드컵 열풍으로 뜨겁던 그해. 28살이 된 요안네커스씨는 자신의 뿌리를 찾아 입양 이후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양엄마가 동행한 한국 여정의 첫 번째 목적지는 요안네커스(Jojannekes)의 입양을 대리했던 H 입양기관이었다. 28년 전 스키폴공항에서 아이가 뒤바뀌었던 일의 진위에 대해 직접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안스씨는 "입양 당시 기관은 양부모에게 아이의 입양기록을 주는데요. 제가 갖고 있던 기록은 여권에 있던 그 아이의 것이었어요. 우리 아이의 진짜 기록을 받고자 방문을 했었죠"라고 말했다.

사실 그녀가 '아이가 뒤바뀌었다'란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사진 때문만이 아니었다. 입양기록상에 아동은 당시 신장이 80cm로 태어난 지 24개월은 훌쩍 넘는 아이라고 적혀있었으나 요안네커스의 키는 당시 72cm에 불과했다.
 
안스씨가 기록한 요안네커스(Jojannekes)씨의 성장 기록
 안스씨가 기록한 요안네커스(Jojannekes)씨의 성장 기록
ⓒ 김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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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안네커스와 안스씨는 이런 저런 근거를 들이대며 진짜 기록을 요청했으나 담당 직원은 잘 모르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 사진을 한 번 보세요. 여기서 직접 만들었던 여권 속 아이랑 제가 찍은 당시 아이 사진을 한 번 비교해 보세요. 엄마는 압니다. 이 여권 속 사진은 요안네커스가 아니였어요." 직원은 안스씨가 내민 두 장의 사진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고 한다.

요안네커스가 입양을 가게 된 1976년은 국내에서 해외로 입양 보내진 아이의 수가 무려 6600여 명에 다다르던, 실로 입양 전성기 시기였다. 가난 등의 부득이한 이유로 요보호아동이 된 아이들에게 따뜻한 가정을 찾아주기 위해 시작된 해외 입양은 어느새 아이 한 명당 입양수수료가 수천만 원에 이르는 등 거대한 산업으로 변질되었다.

어떤 아동은 길을 잃고 부모가 혼비백산하여 아이를 사방팔방 찾던 중이기도 했는데, 무엇이 급해서인지 모르겠으나 발견 후 딱 한 달만에 해외 입양기관으로 보내졌다.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고 고민에 빠진 미혼 여성에게는 생각할 겨를도 주지 않고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있던 입양기관은 서둘러 입양을 진행했다. 이토록 입양이 신속하게 처리되다 보니 입양기관들은 종종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아이 바꿔치기. 일명 '스위치'이다.

"내 딸은 원래 1976년 1월 17일에 한국에서 오기로 되어 있었어요. 그날도 저는 제 두 아이와 함께 네 시간 운전을 해 공항에 도착을 했어요.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다 왔는데 제 아이만 사정이 생겨 못 왔다고 하는 거예요. 친모가 마음이 바뀌어서 지금 이야기가 진행 중이라며 다음 주에는 데려 올 수 있을 거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요. 정확히 일주일 후인 1월 24일 저는 다시 두 아이와 함께 다시 공항에 갔고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입양기관은 우리 질문에 대해 대답할 의무가 있다"
 
1976년 1월 17일. 한국에서 오기로 했던 동생을 만나러 갔다가 오지 않아서 발길을 돌려야 했던 안스씨의 자녀가 그날 일기장에 남긴 기록이다
 1976년 1월 17일. 한국에서 오기로 했던 동생을 만나러 갔다가 오지 않아서 발길을 돌려야 했던 안스씨의 자녀가 그날 일기장에 남긴 기록이다
ⓒ 김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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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가족을 찾아 뿌리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너무도 당연한 욕구이자 권리이다. 이 소원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있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아동의 입양기록이다.

입양기관이 최초 작성했던 입양기록에는 아동의 부모 이름과 주소, 나이 그리고 입양을 보내게 된 이유가 적혀있다. 성인이 된 입양인이 부모를 찾고자 할 때 입양기관은 과거 작성했던 입양기록에 근거해 그 부모의 현 주소를 찾아내고 연락을 취한다. 하지만 요안네커스씨처럼 입양기록이 뒤바뀌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요안네커스씨는 "덴마크에 살고 있는 입양인 한 분이 최근 30년 전 상봉했던 가족과 유전자 검사를 했는데 안타깝게도 가족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어 이분 또한 스위치 케이스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며 "스위치로 인한 피해자가 상당수 되지만 과거는 묻지 않겠다. 입양기관은 진위를 파악하고 우리 질문에 대답할 의무가 있다"고 호소했다.

한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올 7월 해외 입양 과정에서 다양한 서류 조작 사실을 확인하고 홀트아동복지회와 한국사회봉사회를 비롯한 네 곳의 해외 입양 알선 기관에 대해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태그:#해외입양, #바꿔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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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70~80년대 해외로 입양된 친구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미국에서 알게 된 친구가 생모를 찾아 달라고 부탁하면서다. 그녀를 돕는 과정에서 나는 입양인의 아픔에 공감하게 됐다. 현재까지 수 많은 입양인들과 인연이 되어 돕고 있는데 그들의 이야기는 세상 어느 드라마보다 감동적이다.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되는 우리의 아픈 역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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