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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여성노동자 건강권을 강조하는가

한국 사회가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되기 시작한 90년대 후반, '남성이 생계부양자이며 가족 임금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가족 이데올로기에 의해 많은 여성노동자들이 불안정 노동으로 내몰렸다. 신자유주의가 뿌리내린 지금은 여/남을 가리지 않고 비정규직화가 진행되었으며, '맞벌이 모델'이 보편화되었다. 성별을 가리지 않는 '평등한 해고'를 약속하는 것만 같은 이 시기에 왜 '여성'노동자들의 건강권을 다시 고민해야 하는가?

강남역 살인사건, 낙태죄 폐지 공론화, 미투운동 등 2010년대 중반부터 청년 여성들을 중심으로 투쟁이 만들어졌다. 이는 분명 여러 의미로 고무적인 현상이었으나 명암은 존재하여서, 일각에서는 '내 몫의 파이'만을 구하고자 한다거나, 무슬림 난민이나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를 가하는 양상도 나타났다.

나날이 불안해지는 노동시장과 흔들리는 기존 성별 기득권에서 위기감을 느낀 청년 남성들의 목소리를 빌려, 페미니즘에 대한 사상검증과 마녀사냥이 강화되는 백래시 역시 이어지고 있다.

한편,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이하 '연구소')가 출범한 2003년과 마찬가지로, 2023년 현재도 여전히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주변화되거나 조직화되지 않은 사업장에서 일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여기엔 '쉬운 일', '안전한 일'이라는 저평가가 따라붙고 있다. 그렇기에 남성과 마찬가지로 '일하는 여성'의 노동 과정에서 안전과 건강문제는 더욱 간과되기 쉽다. 더불어 성차별적인 사회 구조와 인식이 여성노동자들의 건강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 성별 분업화된 노동구조 속에서 여성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상 위험요인이 남성과는 차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 역시 유념해야 한다. 우리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여성노동건강권팀이 걸어온 길

연구소가 한동안 여성노동자의 건강권에 전력을 다하지 못하였던 것은 사실이나, 상기한 정세에 힘입어 독자적인 고민들을 이어나갔다. 캐나다 퀘벡에서 여성단체 및 노동조합과 함께 여성 노동자의 건강권을 연구해온 캐런 메싱의 저서를 연구소 활동가들이 번역하기도 하였고, 2018년엔 저자 초청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2019년엔 여성 방문노동자 연속 간담회를 열어, 재가요양보호사, 도시가스 안전 점검원, 수도검침원, 통합사례관리사 등을 만났다.

이를 통해 방문대상의 사적 공간을 방문한다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성폭력 위험과 더불어,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등 중년여성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노동과 젠더'라는 오래되고 중요한 주제에 대해 연구소 차원에서 진지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더욱 형성되었다. 그리고 2020년 2월 17차 연구소 총회에서, 집중사업으로서 '여성노동자 건강권'이 제안되어 통과되었다.

이때부터 해당 주제에 관심을 가져온 상임활동가와 회원/후원회원들이 모임을 결성하여 독자적인 센터로 발돋움하고자 하는 목표를 갖고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 결성된 여성노동건강권팀은 매달 젠더와 노동자 건강과 관련한 세미나를 하면서, 2021년 민주노총 여성위원회에서 제안한 <여성노동자 일터 내 화장실 이용실태 및 건강영향 연구>도 병행했다. <일터>에 여성노동 관련 기고도 싣기 시작했다. 특히 여성노동자 일터 화장실 연구는 비록 현장 개선을 위한 직접적인 노력으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했지만, 여러 매체를 통해 보도되기도 했고, '여성, 일터, 화장실'이란 사진전 등 의 형태로 외화되었다.

여성노동건강권팀은 2021년부터 현재까지, 노동조합 활동가나 연구자 등을 초청하여 여성노동자 건강과 관련한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월례토론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월례토론회는 여러 사회단체나 노동조합의 활동가는 물론, 관심 있는 개인들의 꾸준한 호응을 받고 있다.

2022년에 들어서는 <청년여성 노동자의 노동경험과 정신건강 연구>를 진행했다. 이 연구는 참여자들의 개별 심층 면담 분석이 주가 되었다. 면접을 통해 신자유주의적인 노동시장 재편과 COVID-19의 유행, 젠더 이데올로기 변화라는 사회적 기제가 개인의 노동 경험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 당사자들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개인의 정신건강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등을 탐색했다.

또한 캐런 메싱의 또 다른 저서인 <일그러진 몸>을 번역 출간하고, 저자와 온라인 북토크 등을 하며 젠더와 노동자 건강권 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공유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임신 노동자의 유산·사산·조산 산재 인정기준을 마련하는 노동부 용역 연구진으로 연구소 상임활동가들이 참여한 바 있다.

2023년에는 월례토론회의 안정적인 개최와 더불어, 여성 노동을 다루는 영화 공동체 상영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주가사·돌봄노동자 시범사업 저지 공동행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산재여성노동자들의 경험을 분석한 단행본 출간을 앞두고 있고, 숙원이던 센터 출범의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다.
 
여성노동자 건강권과 모두의 건강을 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할 것이다. 2021년 여성노동자 화장실연구 이야기마당 사진.
 여성노동자 건강권과 모두의 건강을 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할 것이다. 2021년 여성노동자 화장실연구 이야기마당 사진.
ⓒ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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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활동 방향과 과제

현재까지 여성노동자의 건강 문제에 대해, 연구소에서 센터를 준비하고 있는 구성원들 사이에서 세미나와 토론회, 현장 연구 등을 통해 합의된 관점은 다음과 같다.
그동안 노동자의 건강(권)을 다룬 시각은 몰성적(gender-blind)이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남성과 비장애인, 이성애자, 정상 가족 등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동의어였다는 점을 성찰해야 한다.

물론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노동자들의 시간 주권뿐 아니라 신체 주권을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남이 모두 공통적이다. 그러나 여성과 남성만을 비교하였을 때, 여성은 이중의 억압, 중층의 모순을 겪고 있다.

예컨대 모든 노동자가 작업 중 화장실 사용에 곤란을 겪지만, 특히 여성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남성 동료들이나 관리자 앞에서 자신의 신체에 대해 말하는 데 더 많은 심적 부담을 요구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직도 여성의 화장실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현실적인 필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비정규직 등 권리행사에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여성들이 더 많이 분포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요컨대, 노동자의 건강과 삶의 손상이 단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아래 기업의 이윤 중심 경영으로부터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며, 여성의 경우 성차별적 구조와도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차별적 구조에는 남성의 신체와 정신을 '표준'으로 여기는 남성 중심의 사고방식도, 불평등하게 가치 매겨진 성별화된 노동 분업도 포함된다.

한편, 여성/남성은 두 개의 균일한 집단이 아니다. 개개인의 정체성은 장애 유무와 종류,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 출신 국가와 인종 등으로 좀 더 복합적으로 구성된다. 여성과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노인은 '정상적이지 않은', '표준에서 벗어난' 신체와 정신을 갖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정상성' 이데올로기 하에서 자본주의의 노동 과정은 구성된다. 여기에 부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집단들은 배제와 소외를 겪을 뿐만 아니라 저평가되어 주변화된 노동, 재생산 노동을 비롯한 부불노동, 신체적/정신적 부담이 큰 노동 등 착취와 수탈도 경험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일러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몸'으로 규정하며, 효율과 이윤추구를 내세워 이들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여성과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그리고 다른 사회적 소수자들이 '취약한 집단으로서 배려받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의 권리에 있어서, '표준적인 남성'의 몸과 다른 다양한 몸들은 동등하게 존중되어야 한다. 성별 이분법적 남녀평등을 넘어 '모두'를 쥐어짜는 노동강도와 정상 규범으로부터 '모두'가 해방되어야 한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서 앞으로 우리는 다음의 과제를 중장기적으로 가져갈 것이다.

첫째, 성별화된 노동 체계에서 위험이 생성되는 기제와 가부장적 자본주의에서의 노동자 분할이 전체 노동자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밝히는 현장 연구를 진행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동안전보건을 비롯한 운동의 의제를 제안한다. 둘째, 과거의 이성애자, 비장애인, 한국인 여성 노동자 중심의 주체 의식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회적 소수자 및 중층적 억압을 경험하는 노동자들과 연대의 노력을 지속한다.

센터 출범을 앞둔 지금, '모두'의 해방을 위해

가부장적일 뿐만 아니라 이성애 중심적이고, 장애 혐오적이며, 인종주의적, 비-생태주의적인 것이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이다. 자본주의는 단순히 노-자 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생산양식만을 지칭하는 것도 아니다. 똑같이 노동력을 판매하며 살아가는 노동자들이라고 해서 경험하는 사회적 모순들이 같을 순 없다. '선 단결, 후 해방'의 약속은 많은 노동자에게 희생과 양보를 강요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제 페미니즘이 추구해 온 가치였던 '연대와 차이의 존중'이 빛을 보아야 할 때이다. 물론 연대는 아름답기만 한 과정이 아니며, 때로는 수많은 갈등과 갈라섬, 상처를 주고받는 과정이 될 수도 있다.

연구소는 설립 20주년을 맞아 여성노동자 건강에 초점을 둔 센터를 설립할 것이다. 고단한 과정이 되겠지만, 이 센터를 통해 더 많은 사람과 만나 연대하며, '모두'의 해방을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여성노동건강권팀으로 활동하고 있는 정여진 회원이 작성하였습니다.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가 발행하는 잡지인 <일터> 10, 11월호 합본호에도 실립니다.


태그:#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여성노동자건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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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는 모든 노동자의 건강하게 일할 권리와 안녕한 삶을 쟁취하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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