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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열린 '실패자들의 파티'에서 한 참가자가 실패담을 공유하고 있다.
 16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열린 '실패자들의 파티'에서 한 참가자가 실패담을 공유하고 있다.
ⓒ 다다다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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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레빗씨. 그는 마이스터고등학교 3학년에 다니면서 디자이너로 취업해 일하고 있다. 당연히 16일 실시된 2024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레빗씨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한 친구들에게 수능 응원 선물을 보냈는데, 솔직히 저도 19년 동안 열심히 달려온 만큼 응원을 받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이날 저녁 수능 가채점을 하는 대신 '실패자들의 파티'에 참석했다. 그는 "실패는 성공의 반대말일 뿐이고, 남들이 정해놓은 성공의 모습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그늘 같은 것"이라며 "오늘 다른 사람들의 실패 이야기를 들으며 즐겁게 놀다 갈 것"이라고 했다.

수능날 "실패자들 다 모여라"
 
16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투명가방끈이 진행한 '실패자들의 파티'에서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16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투명가방끈이 진행한 '실패자들의 파티'에서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다다다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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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실패자'라고 한 이들이 입시, 학교 적응, 졸업 등 인생의 크고 작은 굴곡에서 마주한 실패를 품고 모였다. 성공담만 주목받는 수능이 치러진 날 16일 밤의 일이다. 이름하여 '실패자들의 파티'.

이날 실패자들을 불러모은 건 대학 비진학자 모임 '투명가방끈'이었다. 투명가방끈은 줄 세우기식 무한경쟁교육과 학력·학벌 차별, 모든 사람이 대학에 가야 한다는 편견에 반대하며 2011년부터 매년 수능 때마다 '대입 거부 선언'을 외쳤다. 지난해부터는 실패자들을 불러 모아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식으로 바꿨다. 반응이 좋아서 올해는 아예 밴드와 댄스팀까지 섭외해 한판 파티를 벌였다.

연혜원 투명가방끈 활동가는 "수능 날에는 공부를 잘하는, 소위 말해 수능에 자신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열패감을 느끼곤 하는데 그런 날에 같이 모여 실패의 경험을 나눠보자는 취지에서 파티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6시 30분경. 서울 마포구 합정역 인근 카페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실패자들의 파티'라는 말마따나 대학 비진학자, 학교 밖 청소년, 장애인 등 사회가 말하는 성공에서는 멀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70여 명이나 됐다.

오후 7시. 사회자가 "성공담만이 주목받는 수능 날, 우리 사회와 학교가 '실패'로 이름 붙이는 모든 것들을 위한 축제를 연다"며 파티의 시작을 알렸다. 작은 파티장에 큰 박수와 환호가 울려 퍼졌다.

"대학이 전부인 줄 알았다"    
 
16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열린 '실패자들의 파티'에서 '더딘밴드'가 공연하고 있다.
 16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열린 '실패자들의 파티'에서 '더딘밴드'가 공연하고 있다.
ⓒ 다다다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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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려도 괜찮아~ 틀리면서 배우는 거야!"

파티는 '더딘밴드'의 공연으로 시작했다. 초대한 밴드의 이름마저 "'즐거움'은 완벽함이 아닌 더디고 느리고 서툰 것들에서 온다"는 의미였다. 더디지만 당당했던 공연이 끝나고 참석자들은 저마다의 실패담을 꺼내 보였다.

익명의 한 사연자는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실패한 경험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엔 나눗셈 문제집을 푸는 데 실패, 갖가지 선행학습 복습에 실패, 고등학교 1학년 모의고사도 실패했다. 그뿐만 아니라 학교 잘 다니기, 선생에게 폭력 당하지 않기, 또 다른 9등급 학생을 찾아 자조모임을 여는 것에도 실패했다"고 털어놨다.

남선미씨는 "대학이 전부인 줄 알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애써왔지만, 제가 간 대학은 누구나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학교였다"면서 "스스로의 부족함만 탓하며 능력 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살다가 어느 날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고 당당히 말하는 친구를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남씨는 이어 "서울 소재 대학에 가는 게 당연하지 않듯이 모두가 대학에 진학하는 게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말하다 보면 우리 사회가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다"고 전했다.

발달장애를 가진 박경인씨는 "나는 부모님도 없고, 가난하고, 학교에 가면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왕따도 당해서 부족한 게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죽으려는 시도도 몇 번 해봤다"면서 "그러던 중 스물세 살에 무작정 지역사회에 나와서 동료 지원가들을 만났는데 너무 좋았다. 그때부터 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 뒤로도 자퇴를 한 청년, 성전환을 한 청년, 우울증을 앓고 있는 청년, 대입에 실패한 청년 등 다양한 실패담이 줄줄이 이어졌다. 무려 2시간 동안이나. 참석자들은 진솔하고도 유쾌한 실패담에 "여기 오길 잘했다!"고 박수를 쳤고, 사연자의 분노에 공감하며 "(참석자가 당한 차별에는) 어이가 없다"고 웅성거리기도 했다.
 
16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열린 '실패자들의 파티'에서 참석자들이 댄스팀과 함께 춤추고 있다.
 16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열린 '실패자들의 파티'에서 참석자들이 댄스팀과 함께 춤추고 있다.
ⓒ 다다다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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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로 시작한 파티는 훌라춤과 함께 끝이 났다. 마지막 주자였던 댄스팀 '모두의 훌라'가 즉석에서 참석자들에게 훌라춤을 알려주자 참석자 모두 노래에 맞춰 춤을 췄다. 파티가 끝난 후에도 오늘 처음 만난 참석자들은 곧장 집으로 향하지 않고 서로서로 안부를 나눴다. 마지막으로, 참석자들은 실패에 마음 졸이는 모든 이들에게 이렇게 전했다.

"학교가 말하는 입시 경쟁에 유리한 '정상인'에 당신은 얼마나 가깝고, 얼마나 멀리 있나요? 가난하지 않고, 서울에 살며, 돌봄이 충분한 가족을 가지고, 성소수자가 아니며, 장애인이 아닌 사람들을 위한 학교는 그 자체로서 배제의 공간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더 많이, 더 크게 학교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과 경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학교를 성공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실패로 단정할 수 없는 공간으로 바꿉시다."
   
 
16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열린 '실패자들의 파티'에서 참석자들이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16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열린 '실패자들의 파티'에서 참석자들이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 박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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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투명가방끈이 진행한 '실패자들의 파티'.
 16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투명가방끈이 진행한 '실패자들의 파티'.
ⓒ 박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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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수능, #대학수학능력시험, #비진학자, #투명가방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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