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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과 지원단체 회원들이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승소한 뒤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과 지원단체 회원들이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승소한 뒤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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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다17485. 원고 망(亡) 곽해경의 소송수계인, 망 김광철의 소송수계인, 망 이상주의 소송수계인, 망 이윤태의 소송수계인, 망 최영배의 소송수계인, 망 주석봉의 소송수계인, 망 장학준의 소송수계인. 피고 일본제철 주식회사."

"2018다303653. 원고 (망) 양영수, (망) 김재림, 오철석(고 오길애의 남동생), 망 심선애의 소송수계인 조OO. 피고 미쓰비시중공업 주식회사."

2023년 12월 21일 오전, 대법원 재판부가 연이어 호명한 이름 앞엔 사망한 이를 뜻하는 '망(亡)'자가 덧붙어 있었다. 모두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의 이름이었다. 직후 그들이 살아생전 가장 듣고 싶어 했을 한 문장이 이어졌다.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대법원 2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이날 오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제철 주식회사와 미쓰비시중공업 주식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 2건의 상고심에서 일본기업들의 상고를 기각하고 1억 원에서 최대 1억 5천만 원을 배상케 한 원심을 확정했다. 피해자들이 소송을 제기한 뒤 각각 10년 9개월(일본제철), 9년 10개월(미쓰비시중공업)의 확정 판결이었다.

새벽 차 타고 올라온 유족들, 영정 붙든 채 대법원으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과 지원단체 회원들이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 참석하고 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과 지원단체 회원들이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 참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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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이 10년 가량 지연되는 사이 강제동원 피해자 11명 모두 고인이 되고 말았다. 11명 중 10명은 소송 중 사망했고, 나머지 1명은 강제동원 당시 도난카이 대지진으로 사망해 생존해있던 남동생이 소송을 냈을 때는 이미 망자 신분이었다.

이날 대법원의 상고심 선고에는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피해자 지원단체, 피해자 측 소송대리인 등 20~30명이 대신 자리했다. 광주, 대구 등 지역에서 새벽 기차와 버스를 타고 왔다.

오전 9시 40분 서초역 6번 출구 앞에서 모인 이들은 "전범기업 일본제철, 미쓰비시중공업은 사죄 배상하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대법원으로 향했다. 영하 15도의 한파에도 이들은 두 손으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영정을 꼭 붙잡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 대법원,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손 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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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들어가기 전 <오마이뉴스>와 만난 미쓰비시중공업 강제동원 피해자 고 양영수씨의 딸 김정옥씨는 "대법원 판결이 난다는 연락을 받고 대구에서 새벽 5시 기차를 타고 올라왔다"라며 "기차를 타고 오는 내내 '조금만 더 빨리 판결이 났더라면 지난 5월 11일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눈을 제대로 감고 가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고 곽해경씨 등 7명은 2013년 3월 일본제철을 상대로 소송을 낸 피해자들이다. 이들은 1942~1945년 국책 군수업체 일본제철의 가마이시제철소(이와테현)와 야하타제철소(후쿠오카현) 등에 강제 동원돼 노역했다. 1·2심에서는 각각 1억 원씩을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했지만 일본제철이 상고하면서 2심 이후 4년 넘게 대법원 판결이 지연됐다.

미쓰비시중공업 상대 소송은 고 양영수·고 김재림·고 심선애씨와 고 오길애씨의 유족 오철석씨가 2014년 2월 제기했다. 이들은 1944~1945년 전쟁물자를 만드는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 공장에서 강제 노역했고, 일부는 도난카이 대지진의 피해를 보았다. 1·2심은 이들에게 각각 1억 원에서 1억 5천만 원씩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지만 역시 미쓰비시중공업 측이 상고하면서 2심 이후 5년 간 판결이 나오지 않았다.

"조금만 더 빨리 판결 났더라면"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과 지원단체 회원들이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승소하자 기뻐하고 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과 지원단체 회원들이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승소하자 기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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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후 유족과 지원단체, 소송 대리인단은 기쁜 마음을 애써 억누른 채 법정을 빠져나왔다. 선고 후 5분 만에 대법원 입구 앞에 모인 이들은 임재성 변호사가 "대법원에서 원고 승소로 최종 확정됐다"고 말하자 박수와 환호로 화답했다.

일본제철 소송의 원고 고 주석봉씨의 딸 주순자씨는 "오늘 재판에서 원고(아버지)의 이름이 망자(亡者)로 나와서 너무 슬펐다"며 "늦게나마 이길 수 있어서 좋다. 앞으로도 정부가 국가 차원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를) 꼭 해결해달라"고 요구했다. 

미쓰비시중공업 소송의 원고 고 양영수씨의 딸 김정옥씨도 "소송을 시작한 지 지금 10년이 다 돼가는데 이제서야 판결이 났다는 게 너무 억울하다"면서 "긴 시간을 애타게 기다리다 결국 지쳐 돌아가신 저희 어머니께 이 기쁨을 전해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미쓰비시중공업 피해자를 대리한 김정희 변호사는 "김정옥씨가 판결 이후 한동안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며 "이제라도 피해자들의 권리를 대법원이 다시 한번 확인해 줬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지만 원고들은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전했다.

이어 "사건이 대법원에 올라온 게 2018년 12월이었는데 5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판결 선고가 있었다"며 "사실 (오늘 판결은) 2018년 10월 전원합의체 판결이나 2018년 11월 선행 판결(원고 양금덕 할머니 등)과 다르지 않은 결론인데 5년이나 미뤄진 것은 심히 유감"이라고 꼬집었다.

'소멸시효 완성' 불인정 대법원..."피해자들에게 선물같은 판결"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고 오길애씨의 동생 오철석씨와 소송대리인 변호사, 지원단체 회원들이 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 승소에 박수를 치며 기뻐하고 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고 오길애씨의 동생 오철석씨와 소송대리인 변호사, 지원단체 회원들이 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 승소에 박수를 치며 기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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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승소 “정부, 판결 취지에 반하는 행위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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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대법원은 이번 소송과 법적 쟁점이 같은 과거 강제동원 소송에서도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법리를 확정했다. 2018년 10월 당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양국 간 피해 배상과 보상이 일부 이뤄졌더라도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과 일본 기업의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며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준 바 있다.

2018년 11월 29일에는 '1차 소송'을 낸 양금덕 할머니 등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미쓰비시의 손해배상 책임을 확정했다. (관련기사 : 양금덕 할머니 승소 5년..."대법원, 미쓰비시 자산 강제 매각 즉시 명령하라" https://omn.kr/26kqq) 이번 소송은 다른 피해자들이 뒤이어 제기한 소송이라는 점에서 '2차 소송'으로 불린다.

한편, 일본 기업 측은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소멸시효가 이미 지나 배상할 책임이 없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날 선고 직후 낸 보도자료에서 "강제동원 피해자 또는 그 상속인들에게는 2018년 전원합의체 판결이 선고될 때까지는 피고(일본 기업)를 상대로 객관적으로 권리를 사실상 행사할 수 없는 장애 사유가 있었다"고 명시했다. 즉, 손해배상 청구권의 소멸시효는 2018년 10월 이후부터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임재성 변호사는 이날 오후 1시께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실에서 진행한 기자회견에서 "오늘 대법원 판단을 통해 '2018년 기준으로 (소멸시효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언급했기 때문에 현재 하급심에서 진행 중인 모든 강제동원 관련 판결은 최소한 소멸시효로 기각될 염려는 없다"며 "가장 두텁게 피해자들의 권리를 보호한 판결이고, 피해자들에게 선물 같은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김정희 변호사도 "늦었지만 사법부의 판결을 귀하게 지켜나가야 한다"면서 "우리 정부는 그동안 제3자 변제안 발표 등으로 판결의 취지를 훼손하는 일을 많이 해왔는데, 이제는 일본 기업에 배상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고 오길애씨의 동생 오철석씨와 소송대리인, 지원단체 회원들이 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 승소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고 오길애씨의 동생 오철석씨와 소송대리인, 지원단체 회원들이 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 승소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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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일제강제동원, #대법원, #전범기업, #미쓰비시, #일본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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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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