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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번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발굴 현장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2014년부터 진행한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 느낌 등을 한 주에 한 편씩 전할 계획이다. 잘못된 역사와 진실을 밝히고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진실과 화해의 치유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기자말]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미전리 산11번지(미전고개)학살지 표지판 모습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미전리 산11번지(미전고개)학살지 표지판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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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발굴사업이 있을 때는 발굴 다니고 그 외는 경남지역의 5권의 증언록을 토대로 18개 시∙군의 유족들 사연과 매장지 현장 답사해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민간인 학살지의 실태를 살펴보고 있다. 이번엔 경남 밀양 편 사연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경남지역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지는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한국군 후퇴와 방어지역
 한국군 후퇴와 방어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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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 이후 밀양지역은 "국군이 방어에 성공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1950년 7월부터 8월까지 밀양지역 국민보도연맹원, 예비검속자들은 밀양경찰서 및 관할지서 경찰과 경남지구(CIC)에 의해 연행되거나 소집, 통보받고 자진 출두 후 옛 삼랑진 면사무소 건물, 삼랑진 지서, 삼랑진역 홍익회(전신 강생회)지하창고 등에 구금됐다가 1950년 8월 중하순경 삼랑진읍 미전고개, 안태리(동촌마을) 송지리(죽곡마을), 검세리(작원관지), 청도(곰티재) 등으로 끌려가서 고귀한 생명들이 억울하게 집단 학살을 당했다.

밀양지역은 대략 1차례부터 5차례 학살을 자행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학살지마다 상세히 조사해 보면 학살책임자들이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드문 일 중 하나다. 또한 학살책임자의 직책 중 눈에 띄는 단어가 나온다. "해군CIC, 해양공사, 해군헌병대" 등 해군이 포함돼 있었다는 것이 의외이다. 아마도 낙동강 하류 "작원관지 수장" 피학살자가 많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필자가 밀양지역 여러 자료와 답사한 결과에 의하면 피학살자가 820여 명 이상 추정된다. "증언자 이정우는 삼랑진읍에 살았기 때문에 '전역 학살지'의 학살 인원을 가름하기 어렵지만 보도연맹원들 기차에 태워서 데리고 왔다면 인원이 적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밀양 사람뿐만 아니라, 덕산, 진영, 한림정, 낙동강, 삼랑진역을 거치면서 역마다 태웠을 가능성 배제할 수가 없어요.(주1)" 라고 한다.

1차례부터 5차례 학살지를 소개하기 전에 밀양 현대사에서 중요한 인물인 약산 김원봉\을 언급하고 민간인 학살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밀양역사 중 근현대사에서 약산 김원봉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

약산 김원봉 네 형제가 약산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몇 차례 경찰서에 끌려가서 학살된 사건을 다루기 이전에 독자 여러분들이 잘 알고는 있겠지만 약산의 항일독립운동사를 잠시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약산 김원봉은 의열단 단장,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국방부장관) 등으로 활동했던 일제하 반일 독립운동의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필자는 2012년부터 약산 김원봉과 그 외 항일독립운동사 관련해 역사 교사들과 함께 민족문제연구소와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가 주관하는 중국 항일독립운동사 답사를 몇 차례 다녀왔다.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와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의 오랜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약산은 역사 교과서뿐만 아니라, 항일 독립운동가로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민간인학살 밀양 편 준비하면서 그동안 잠시 잊고 있었던 약산의 네 형제가 학살된 사연을 접하게 된다.

2021년 추석 전부터 밀양 유족들과 통화를 시도했지만 한 분은 뇌종양으로, 한 분은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아 약간 불안했다. 경남유족회장께 소식을 여쭸더니 아마도 돌아가셨을 것 같다고 한다. 이제 겨우 두 지역을 준비 중인데 유족들의 사망 소식을 들으니 갑자기 마음이 불안하고 조급해진다. 유족분들이 연로하셔서 증언이나 만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양영철(88) 밀양유족회장의 마지막 증언이 필자의 가슴을 울리게 한다.

"내가 죽고 나면 이 진실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 보는 기라, 밀양에 대해서는!(주2)"

이 말씀을 되새기며 진실을 밝혀보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밀양지역 답사는 유족분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나셔서 동행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 일반인 두 분을 섭외했다. 이정우(전직 공무원) 증언자와 이준설 밀양 의열기념관 학예사다. 두 분과 2021년 9월 13일, 16일 양일간 밀양답사를 시작했다. 13일 1차 학살지 미전고개 역사적 진실 현장으로 향했다.
 
밀양지역 대량학살
 밀양지역 대량학살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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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지 입구. 국도 58번 도로 김해-삼랑진-청도
 학살지 입구. 국도 58번 도로 김해-삼랑진-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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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전고개. 이정우가 가리킨 깊은 계곡 학살지(좌). 나무만 무성한 모습(우).
 미전고개. 이정우가 가리킨 깊은 계곡 학살지(좌). 나무만 무성한 모습(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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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전고개 학살지에 도착하니 허름한 표지판이 세 사람을 반긴다. 2021년 9월 13일 날씨는 가을 나락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위해 익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아주 무덥다. 풀이 무성하게 자라서 발로 풀을 헤치고 들어가니 깊은 계곡이 바로 보였다. "어디예요! 학살지가예!" 이정우가 손가락질하면서 가리킨다. "여기가 학살지예요!" 다시 물었다. 예? "바로 여기 계곡에 학살했어요." 필자는 순간 가해자들의 대담성과 과감성에 대해 충격을 받았다. 도로변 바로 옆 계곡에서 세워놓고 총을 쏘아 시신을 계곡으로 떨어지게 한 것이다.

보통 학살지는 도로나 길에서 최소 200~300m 이상 들어가거나 올라가서 도로변에서 보이지 않는 곳을 찾아서 정한다. 그러나 미전고개 학살지는 도로 바로 옆이다. 학살 당시 상황이 다급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계곡 속으로 시신을 떨어뜨렸으니 덮거나 뒷수습 필요 없어 보였다. 적어도 이곳에서 200명 이상 학살했는데 계곡에 시신이 가득 채워졌을 것이고 계곡은 검붉은 핏물로 물들어 흐르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머리가 어지럽고 현기증이 난다. 그 충격에 덧붙어 약산 4명 형제가 이곳에서 학살되었다는 것이다. 
 
부산대학교 밀양캠퍼스 부지
 부산대학교 밀양캠퍼스 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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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임천출장소에 도착했다. 미진고개에서 학살된 자들을 임시로 구금한 장소는 대나무 숲으로 우거진 채 조용한 산기슭으로 보인다. 연맹원들은 교육시킨다고 나오라고 해서 모두 자진해서 갔단다. 피학살자들은 갑을병으로 분류해 집단 수용돼 있다가 한국전쟁이 터지자 미전고개 학살지로 끌려가서 학살당했다고 한다. 이곳에 끌려온 사람 중 약산 네 형제도 포함돼 있다. 약산의 네 형제의 기구한 사연은 후에 다루도록 하겠다. 이제 가장 많이 보도연맹원들을 잡아다가 구속시킨 구 밀양경찰서로 향했다.
 
밀양경찰서
 밀양경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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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밀양경찰서 세 번째 장소가 밀양시종합사회복지관으로 새로 지어져 옛 경찰서 모습을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복지관 뒤편으로 돌아가 보니까 당시 1950년 8월 구속했다는 장소가 주차장으로 남아있었다. 지상에서 깊이가 3m 정도 돼 보였는데 복지관 건물이 지상으로 높이 올려서 대지를 높이지 않고 건축했다. 푹 꺼진 장소는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이곳에 약산 네 동생이 잡혀가서 갇힌 곳인데 약산 어머니가 국밥을 끓어서 가지고 가서 먹인 것이 아들들과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당시 경찰서 구속 인원이 넘쳐서 결국 구 임천출장소로 옮겨서 구금시켰는데 이곳에서도 약산의 동생들이 있었다고 한다. 다음 답사지인 삼랑진읍으로 향한다.
 
삼랑진 파출소와 지서
 삼랑진 파출소와 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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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진역
 삼랑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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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에서 25분 걸려 삼랑진 파출소 앞에 도착했다. 삼랑진 파출소는 당시의 살벌했던 감금 장소를 잊은 듯 조용해 보였다. 바로 옆 삼랑진역 앞에 멈췄다.
 
홍익회(강생회)터 당시 구금장소
 홍익회(강생회)터 당시 구금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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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진역 건너편 홍익회(전신 강생회) 지하창고가 있는 장소를 갔다. 이정우는 지금은 풀밭으로 남아있는데 원래 홍익회 건물터는 지면이 푹 꺼져있었고 창고 지하실은 넓어서 구금장소로 사용됐다고 한다. 삼랑진역은 낙동강 하류가 가까이 있어 수장지로 가는 교통수단으로 기차 이용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라고 증언한다.
 
삼랑진 면사무소
 삼랑진 면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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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삼랑진 면사무소는 형체도 없이 허물어져 버리고 현재 행정복지센터 및 문화센터 건립사업 중이었다. 그런데 공사 저편에 옛 면사무소 창고로 사용했던 허름한 건물이 보인다. 구금장소가 그날의 살벌함을 알려주듯 초라하게 남아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삼랑진 답사 도중 왜 밀양에서 삼랑진 주변 관공서를 감금장소와 학살지로 정했을까 궁금해졌다. 이정우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지리적으로 삼랑진은 밀양으로 가는 교통편이 열차밖에 없었어요. 밀양강을 건너는 다리는 1970년 중반 삼랑진 양수발전소 만들면서 세워졌어요. 그래서 철도를 많이 이용하다 보니 삼랑진은 부산이 생활권이 되면서 밀양에서 약간 소외된 지역이었어요. 아마도 감금은 엄밀한 곳으로 적합한 삼랑진을 선택한 것 같아요."

다음 답사는 안태리 동촌마을과 작원관지로 정했다.

(*22화 밀양편이 계속됩니다.)

[주석]

주1) 증언자 이정우(62세)는 고향이 삼랑진이고 고등학교까지 삼랑진에 거주했기에 민간인학살
(보도연맹원)에 대한 이야기를 유년기, 청년기까지 들었다고 한다. 그 후 경상대학교 토목공학과 졸업하고 밀양시에서 공무원으로 30년 근무하고 퇴직했으며, 국유 현묘지도(國有 玄妙之道: 활쏘기 등 전통 풍류)를 30년 공부했다. 

주2)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경남유족회, <70년 만의 증언>, 2021년 11월 17일

주3) 옛 삼랑진 읍사무소 출장소 장소다. 밀양경찰서는 구금자가 폭주하니 미전 학살지 가는 길목인 임천 출장소에 임시 구금 장소로 활용했다.

 
진주 봉강리 발굴 현장에 있는 필자의 모습
 진주 봉강리 발굴 현장에 있는 필자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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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영희 (전)교사/ 한국전쟁 창원유족회 유해발굴 조사단장·봉사자


태그:#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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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남 진주에서 거주하고 있다. 전직으로 역사교사였으며, 명퇴후 한국전쟁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10여간 했으며 현재도 계속 진행중입니다. 유해발굴 봉사로 인하여 단디뉴스 연재 18회를 기사화했으며 고등학교, 일반인, 초중고 교사 대상 유해발굴 관련 연수도 진행중이며 9월부로 오마이뉴스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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