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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22년 9월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한 빌딩에서 열린 글로벌펀드 제7차 재정공약회의를 마친 뒤 대화를 나누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22년 9월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한 빌딩에서 열린 글로벌펀드 제7차 재정공약회의를 마친 뒤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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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많이 쓰셨습니다. 성지호, 박준범, 김병일 판사님! 대한민국 국민은 1월 12일, 서울서부지법 민사12부(재판장 성지호 판사, 박준범·김병일 판사)의 '역사적인 판결'로 인해 '지록위마'에 필적할 만한 신조어를 얻게 됐습니다. 바로 '바이든날리면'입니다.

때는 2천여 년 전 진나라 시대, 간신 조고가 어린 황제 호해 앞에서 사슴을 말이라고 부른 뒤 주위에 있는 신하들에게 사슴을 가리키며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조고는 사슴을 사슴이라고 정직하게 말한 신하들을 모두 숙청한 뒤 황제보다 더욱 강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여기서 권력의 강요나 아부를 위해 사슴을 사슴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말이라고 부른다는 뜻의 지록위마라는 고사성어가 탄생했습니다. 그 이후 중국을 비롯한 동양권에서는 권력자에 아부하기 위해 사실이나 상황을 왜곡하는 일이 벌어질 때마다 지록위마라는 단어를 끄집어내어 때론 조롱, 때론 비난의 도구로 활용해 왔습니다.

지록위마에 필적하는 신조어 '바이든날리면'

그런데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2024년 1월 12일 이후, 이런 비슷한 상황이 나타날 때 2천 년 전 중국에서 나온 고사성어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되게 됐습니다. 성지호, 박준범, 김병일 판사가 '바이든날리면'이 지록위마와 똑같은 의미를 갖는 말이라고, 공식 확인서를 발부해 줬기 때문입니다. 

세 분 판사의 이런 위대한 업적은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번 대장동 사업 50억 클럽의 한 사람인 곽상도 전 국민의힘 의원에게 뇌물 무죄 판결을 내린 당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 이준철 판사보다 훨씬 뛰어난 업적입니다. 이준철 판사의 판결은 한 사람에게 일시적인 효과를 낼 뿐이지만, 성지호, 박준범, 김병일 판사의 판결은 앞으로 무수한 사람이 영원히 애용하게 될 관용어를 개발한 셈이니까요.

그러나 역사에 길이 남는 업적을 남겼다고 해서 꼭 우쭐거릴 일은 아니라는 점을, 세 분이 알아뒀으면 좋겠습니다. 대통령실과 대통령을 대리해 재판을 청구한 외교부가 환영했다고 붕 뜰 필요도 없습니다. 지록위마의 고사를 탄생시킨 조고도 한때 세상을 호령하는 듯했으나 황제를 탐하다가 결국은 불행하게 생을 마쳤습니다. 사실을 사실이라고 한 정직한 사람을 벌한 죄를, 훗날 가중해 받은 것입니다.

정부 비판 봉쇄한, 최악의 반언론적 판결

세 분은 자신들의 판결을 용기 있는 결단이고 판단이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소송의 피고인 <문화방송>뿐 아니라 무려 148개 언론사의 집단적인 판단과, 국민 59%가 동의한 청력 테스트 결과를 물리친 진리를 향한 '외로운 결단'이라고 자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판결이 권력과 언론의 대립·갈등 속에서 철저히 권력의 편에 선 정치적 판단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굳이 지록위마 고사를 빌리지 않더라도 백은 백이고 흑은 흑이란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늘 그물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어느 게 거짓이고 참인지, 알맹이이고 쭉정이인지 반드시 가려낸다는 게 역사의 준엄한 법칙임을 잊지 말길 바랍니다. 대통령 권력이 아주 대단한 것 같지만 몇 년 남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판결이 언론자유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는 것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이 판결은 권력과 언론의 해석이 다를 때 권력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대한민국의 언론자유를 조지 오웰의 <1984> 시대, 더 나아가 조고의 지록위마 시대로 돌리는 것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022년 10월 13일 오전 용산 대통령실에서 취재진과 출근길 문답을 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022년 10월 13일 오전 용산 대통령실에서 취재진과 출근길 문답을 하고 있다.
ⓒ 대통령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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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인지 '날리면'인지 확정할 수 없다는 재판부의 판단을 인정한다고 해도, 언론사가 바이든이라고 들은 것이 잘못이니 정정하라고 판시한 것은 사실에 대한 언론의 독자 해석권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정부가 불편해하는 기사나 논평을 봉쇄하는 길을 열어주는 판결입니다. 이제 언론은 어떤 사안에 관해 정부가 원하는 해석만 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가뜩이나 윤석열 정권 들어 정부의 폭압적인 탄압으로 언론이 주눅 들어 있는데, 이번 판결은 그런 경향을 더욱 가속하는 계기로 작용할 것입니다.

이 판결은, 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언론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괴롭히는 전략적 봉쇄 소송의 길도 활짝 열어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발언의 당사자가 아닌 외교부에 소송 적격성을 부여한 것도, 윤 대통령과 '초록 동색'인 박진 외교부 장관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한 것도 정부의 비판 언론 옥죄기에 날개를 달아 준 것입니다.

'바이든-날리면' 소동 이후 2022년 11월, 윤 대통령의 출근길 문답을 중지하고 문화방송 기자의 대통령 전용기 탑승을 거부한 것에, 이번 판결이 정당성을 부여한 꼴입니다. 사법부가 언론사에 대한 정부의 전략적 봉쇄 소송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조장하는 최악의 판결입니다. 선진국에서는 언론을 괴롭히기 위해 하는 전략적 봉쇄 소송은 소송 제기 단계에서 바로 각하하는 이른바 '서머리 판결'(summary judgment)로 끝내는 게 보통인데도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번 판결은 한국의 행정부와 사법부, 더 나아가 한국의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불신하게 하는 기념비적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소송 당사자인 문화방송도 바로 항소했고, 많은 언론인과 단체, 지식인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거세게 내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라는 말을, 너무도 생생하게 실감 나게 하는 악랄한 판결이니까요.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


태그:#바이든, #날리면, #문화방송, #언론자유, #지록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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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논설위원실장과 오사카총영사를 지낸 '기자 출신 외교관' '외교관 경험의 저널리스트'로 외교 및 국제 문제 평론가, 미디어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일관계를 비롯한 국제 이슈와 미디어 분야 외에도 정치, 사회, 문화, 스포츠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다. 1인 독립 저널리스트를 자임하며 온라인 공간에 활발하게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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