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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번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발굴 현장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2014년부터 진행한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 느낌 등을 한 주에 한 편씩 전할 계획이다. 잘못된 역사와 진실을 밝히고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진실과 화해의 치유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기자말]
(좌)김학봉 여사(11여) 차남 김태영 / (중) 약산 김원봉 / (우)약산 구봉(9남) 장남 김용건
 (좌)김학봉 여사(11여) 차남 김태영 / (중) 약산 김원봉 / (우)약산 구봉(9남) 장남 김용건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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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름다운 강이 죄 없는 사람에게 총 쏘고 수장한 곳이라니... https://omn.kr/27628

김원봉(약산)의 친조카 김용건과의 만남

필자가 밀양으로 답사갔을 때 미전고개에서 약산 네형제가 학살된 곳이라 듣고 의열기념관 학예사(이준설)와 대화하다가 약산의 친조카(김용건)가 계신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물론 암암리로 알고는 있었지만, 필자는 직접적인 연관 없이 그냥 흘려들었다. 그런데 오늘은 귀가 솔깃해진다.

'그분의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하니까 '학예사가 한 달 전에 '의열기념관'에 다녀갔습니다'라고 한다. '어떻게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라고 하니 외조카 김태영 회장과 연락하면 될 거라 한다.

중국 역사 탐방에서 몇 차례 만난 약산 외조카 김태영 회장(약산의 막내 여동생 김학봉 여사의 차남)은 익히 알고 있었다. 김 회장은 미국에서 거주하고 필자랑은 직접적으로 연락을 취한 적이 없었던 터라 조심스러웠다. 고민 끝에 지인 중 북경대 정치학 박사 정원식이 김 회장이 연락하고 지내는 것을 알아 정 박사께 부탁했다.

필자는 김 회장을 중국답사에서 첫 대면 했을 때 너무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외조카인데도 약산을 쏙 빼닮았기 때문이다.

정 박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친조카 김용건 연락처를 받게 됐다. 필자는 매번 유족과의 통화는 긴장되고 조심스럽다. 마침 김용건은 사전에 김 회장과 연락을 취한 터라 필자가 전화했을 때 반갑게 받아주셨다. 남양주에 거주한다고 했다. 70년의 상흔을 어찌 몇 시간 통화로 쏟아 낼 수 있겠는가. 장시간 통화를 하고 끊었다. 통화 후 가슴이 멍해진다.

약산이라는 거목의 그늘 아래 70여 년 넘게 묻혀있던 네 형제가 당한 학살의 사 연속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그 전에 약산 행적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약산 김원봉의 해방 후 정치적 행적

약산은 의열단 단장,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현 국방부장관)등으로 활동했던 일제하 반일 독립운동의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해방 직후를 살던 사람들은 이러한 그를 김양산 장군으로 불렀으며, '혁명애국투사'로 칭송했다(주1). 때문에 그가 귀국하기 전 개최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전국인민위원' 55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고(주2) '조선인민공화국 정부'의 군무부장으로 발표하기도 했다(주3). 약산의 독립운동 관련 활동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 통해 충분하게 알려졌으며(주4), 역사적 평가와 관련한 논란이 거의 없다.

1946년 2월 21일 좌익 3당 합당에 참여하지 않고 독자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폭행과 구금을 당하는 등 테러 위협 상황에서도 자기 역할에 충실했다. 그 후 1947년 7월 19일 여운형 서거를 애도하며 "정치적 주장이 다른 것을 구실삼아 자기 민족의 지도자를 학살하는 그 죄악은 천추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며 그의 죽음을 "민족국가의 부흥 발전에 커다란 창상을 남기는 것"으로 기렸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지도자를 넘고 끊임없는 투사의 전진은 계속될 것"이라고 다짐했다(주5).

1947년 8월 2일 미군정은 '제5호 행정명령'을 통해 8월 11일에는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 소속 단체 등에 대해 폐쇄와 일제 검거를 단행한다. 8월 12일 새벽 수표동 소재 약산 자택도 수색당하고 체포령을 내린다. 그리하여 이승엽이 무일푼으로 지내고 있는 약산을 도와줬다고 한다. 약산은 신변 위험(주6)과 함께 생활고도 컸다고 한다. 1948년 4월 9일 민전의 발표에 따르면 조선인민공화당은 김원봉 외 7명이 새로운 정치무대인 평양으로 출발했다(주7).

송진우 동아일보 사장 1945.12.30 암살, 여운형 1947.7.19 암살, 김구 1949.6.26 암살, 장덕수 1947. 12. 2 암살, 조봉암 1959.7.31 사형 등 이승만의 반대 세력은 그렇게 사라진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다음 타깃은 자신임을 짐작하게 된다.

약산 혈통 이유로 학살

약산의 형제사를 소개하면 9남 2녀 중 아래 표와 같이 네 형제가 약산의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잡혀가서 구금돼 극악무도한 범죄행위에 학살당했다.
 
약산 김원봉 형제사 9남 2녀
 약산 김원봉 형제사 9남 2녀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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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된 김용봉은 당시 32세였다. 슬하에 3남 1녀 두었는데 갑자기 경찰들이 들이닥쳐서 김용봉을 끌고 갔다. 김용봉의 장남은 당시 9세로 아버지가 잡혀가는 모습이 생생히 기억난다고 한다. 아버지 학살당한 후 용봉 자녀들은 어머니 박순남의 친정인 외가집이 재력이 있어 어머니가 담배 점포를 운영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살았다. 그리고 6남 김봉철 도움도 받았으며 외가 덕분에 자식들을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큰 어려움 없이 생활한 유일한 가족이며 밀양에서 지금까지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연좌제 감시로 숨죽여 살았다고 한다.

학살된 김봉기는 당시 28세였다. 슬하에 1남 1녀 뒀는데 밀양군 단장면에서 살고 있을 때 잡혀갔다. 장남은 부산으로 이사 후 천일여객에 취직해 근근이 살았고 집은 판자집이었으며 남의 담을 끼고 있는 허술한 구멍가게로 연명했다. 아버지 없는 세상에서 연좌제를 등에 지고 얼마나 힘들게 살았을지 독자들 상상에 맡겨 본다.

학살된 김덕봉은 당시 25세였다. 자녀 1녀를 두었다. 딸(경애)은 큰집(김봉철)에서 살았고 거의 식모 노릇을 하면서 눈칫밥을 얻어먹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학살당하자마자 어머니는 봉철 큰아버지를 찾아가서 재혼해야겠다고 해 허락받고 떠나버렸고 딸 경애는 큰집에서 그저 허드렛일만 하면서 연명하였다고 한다. 

학살된 김구봉은 당시 22세였으며, 부산대학교 3학년 재학 중이었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고 1남이 앞에서 소개한 약산의 친조카 김용건이다. 27화 편에서 김용건의 일대기는 다음 소개하겠다.
 
학살당한 네 형제 자녀들의 속마음


약산이 1948년 4월 9일 가족과 함께 월북할 때 부모님과 형제에게 전혀 상의 한 마디 없었다고 한다. 과연 약산은 남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이 연좌제나 보복을 당할 것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을까 하는 원망 서린 마음도 없지 않다고 한다. 약산이 월북 후 학살당한 형제들에게 수시로 경찰관이 찾아왔고 암암리 감시당하고 살았다고 한다. 

김용건씨를 만나 물었다. 

- 잡혀간 후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사실 백부님들은 약산이 1958년 4월 9일 월북한 후 다른 보도연맹원과 달리 요주의 인물로 분류되어 몇 차례 검거당했어요. 그러다가 한국전쟁 발발하자 다시 한꺼번에 끌려갔어요. 할머니가 어느 날 밀양경찰서에 국밥을 사서 먹인 것이 마지막이었다고 하더라고요. 딱히 상의할 곳도 없어 막막했데요. 밀양경찰서는 구금 인원이 넘치자 일부는 허름한 창고에 구금 후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학살당했는지 매장지가 어디인지 철저히 은폐했대요. 밀양은 방어지역으로 집행 날짜가 다른 지역보다 늦었어요. 제사 날짜는 음력 6월 30일로 (양력 7월 말에서 8월 초 사이) 정해서 모셨어요.
 
- 나머지 네 명의 백부는 어떻게 살아남았나요?


"김익봉(4남)은 어릴 때 요절했고 김춘봉(3남)과 김경봉(2남)은 부산에 가서 살았기에 학살을 면했어요. 마지막 김봉철(6남)은 형제가 잡혀갈 때 소식을 듣고 남천강에 뛰어들어 가까스로 살아남아 밤중에 마산으로 도망쳐서 어느 마을 폐가에서 자리를 잡고 살았어요. 그곳까지 경찰들이 들이닥쳤는데 세 명의 자식을 보고 잡아가지 않았데요.

김봉철(백부)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서 항만 노역으로 목숨을 부지해 전쟁 기간 내내 돈을 모았어요. 사업수완이 좋아서 성공해 험한 세상이 잠잠해졌을 때 밀양으로 들어와 최고의 부자 소리 들을 정도였으며 군 의원직도 했어요. 백부는 학살당한 형제들의 처형지를 찾아 유골이라도 거두기 위해 백방 수소문했데요. 하지만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 치하에서는 헛수고였고, 마침내 4.19혁명이 발발하면서 철옹성 같은 이승만 정권도 무너졌던 거지요.

김학봉은 한국전쟁 당시 18세였으며 오빠들은 약산과 내통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잡혀가고 오고를 반복했어요. 고모도 몇 차례 잡혀가서 허름한 창고에 구금당하고 있을 때 화장실이 없어서 고생했데요. 그 후 1947년 8월 미군정이 행정명령을 내려 약산 자택을 수색하던 날 고모는 아무것도 모르고 약산 집에 찾아갔는데 그 자리에서 경찰에 잡혀가서 물고문과 모진 폭행을 당했어요."

다음 고모(학봉) 차남 김태영 일대기 편에서 자세한 사연을 쓰고자 한다.

모진 세월을 숨죽여 살다가 대한민국 제2공화국이 1960년 6월 15일부터 1961년 5월 16일까지 불과 11개월간 존속했던 과도 권한대행 체제를 거친다. 그리고 6월 15일 개헌 설립된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양원제 의원내각제 기반의 헌정 체제 때 장면 정권이 들어선다.

이때다 하여 "전국에서 유족들의 분노"가 들끓어 오르자 제4대 국회는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해 경남과 전남 등 학살 현장을 돌며 실태조사를 벌였다. 정부에 진상조사와 피해배상을 촉구하는 대정부 건의문을 채택했다. 또 각 지역에서 합동위령제가 개최되자 장면 총리는 조화와 부조금을 보내어 조의 표하기까지 했다.(주9)

* 24화 밀양편에서 계속됩니다.

[각주]

주1) 대표적인 것이 조선건민회 회장 이극로의 평가이다. 자유신문, 1947년 4월 5일, <革命愛國鬪士 賤待는 憂慮事>). 해방 직후 김원봉에 대한 소개 글로 李如星, <金若山論>, 조선인민보 1946년 4월 14일 / 김오성, <金元鳳論>, 指導者群像 1, 대성출판사, 1946; / 李鉉相, <김원봉 장군론>, 노력인민 1947년 6월 25일 등이 있다.
주2) 매일신보 1945년 9월 7일, <건준 전국인민대표자대회 개최, '인공' 임시조직법안 상정 통과>.
주3) 매일신보 1945년 9월 15일, <인공의 정부 부서 발표>.
주4) 대표적 연구성과로 염인호, 김원봉 연구: 의열단, 민족혁명당 40년사, 창작과비평사,
1993 / 김영범, 한국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 창작과비평사, 1997 / 이원규, 약산 김원봉, 실천문학사, 2005 / 한상도, 대륙에 남긴 꿈: 김원봉의 항일역정과 삶, 역사공간, 2006 / 김삼웅, 약산 김원봉 평전, 시대의 창, 2008 / 염인호, <김원봉: 의열투쟁과 무장독립운동의 선구자>, 한국사 시민강좌 47, 일조각, 2010 등이 있다.
주5) 김원봉, <몽양 려운형선생의 비보를 듣고>, 노력인민 1947년 7월 25일.
주6) 1948년 3월 8일 열린 장덕수 살해사건 군사재판에서 테러범들은 "김원봉 박헌영도 죽여야 한다고 결의"했다고 증언했다(동아일보, 1948년 3월 9일, <장덕수 살해사건 제5회 공판 개정>).
주7) 서울신문 1948년 4월 14일, <민전 산하 각 단체 대표 80명이 남북협상 참석차 평양 출발 발표>.
주8) 1기 위원회→ 제3부 제3소위원회 사건, <5∙16쿠테타 직후 인권침해 사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9.12.04
주9) 김기진 지음, <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 부산∙경남지역>, 역사비평사, 2004.6.1

 
진주 봉강리 발굴 현장에 있는 필자의 모습
 진주 봉강리 발굴 현장에 있는 필자의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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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영희 (전)교사/ 한국전쟁 창원유족회 유해발굴 조사단장·봉사자


태그:#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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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남 진주에서 거주하고 있다. 전직으로 역사교사였으며, 명퇴후 한국전쟁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10여간 했으며 현재도 계속 진행중입니다. 유해발굴 봉사로 인하여 단디뉴스 연재 18회를 기사화했으며 고등학교, 일반인, 초중고 교사 대상 유해발굴 관련 연수도 진행중이며 9월부로 오마이뉴스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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