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6일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건국전쟁'은 전날 5만1천여명(매출액 점유율 22.4%)의 관객을 동원해 박스오피스 2위에 올랐다.
 16일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건국전쟁'은 전날 5만1천여명(매출액 점유율 22.4%)의 관객을 동원해 박스오피스 2위에 올랐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이승만 전 대통령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건국전쟁>이 회자될 때마다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승만 정권 때 부모와 형제를 잃은 유가족들이다.

최근 전미경 대전산내골령골 피학살자유족회 회장을 사건 현장에서 만났다. 그는 며칠째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하소연했다. 이승만이 영화 <건국전쟁>을 통해 긍정적으로 재조명되는 걸 보고 기가 막혀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했다.

충남민간인희생자유족회장을 오랫동안 맡았던 정석희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 태안유족회 회장도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나타냈다. 그는 기자에게 '학살자 이승만에 대한 책을 써보시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영화 <건국전쟁>은 이승만을 반일주의자, 농지개혁, 교육 우선 정책, 참정권으로 여성 인권 실현, 민주주의 신봉자로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해산하고 친일파를 부활시킨 이승만이 반일주의자인지, '한국민은 완벽한 민주정치를 실행하기에는 시기상조'라며 내각책임제 헌법 초안을 두 번이나 뒤집고 부정선거를 주도한 그가 민주주의 신봉자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특히 영화가 과감히 생략한 이승만의 민간인학살은 생명권을 빼앗은 일로 결코 소홀히 다루거나 외면할 일이 아니다.

제주4·3, 여순사건, 국민보도연맹사건... 영화가 생략한 민간인 학살
 
2017년 4.3 69주기 기념식. 한 유가족이 희생자 묘비에 참배를 하고 있다
 2017년 4.3 69주기 기념식. 한 유가족이 희생자 묘비에 참배를 하고 있다
ⓒ 장재완

관련사진보기


제주 4.3 항쟁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에 걸쳐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승만은 초토화작전으로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했다. 2020년 발간된 '제주4·3 추가 진상보고서'에 의하면 2019년 12월까지 4·3 위원회에 심의·결정된 민간인 희생자는 모두 1만 4442명이다. 사망자의 78.7%가 토벌대의 손에 죽었는데 이 중에는 여성과 15세 이하 아동과 60대 이상 노인들이 30%를 차지했다.

2003년에 발간된 보고서('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제주도민 학살의 책임자로 초토화작전을 통해 대부분의 희생을 야기한 군 지휘부 및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경 진압을 지시한 이승만 대통령을 꼽았다. 또 남로당 제주도당 주도의 무장대, 진압 과정에 관련된 미군정, 서북청년회 등의 책임을 함께 물었다.

1948년 여순사건 때는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조선국방경비대 14연대 소속 장병들이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출병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하자 진압에 나섰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의 진압을 초토화작전과 민간인 대량 학살로 대응했다. 시민단체의 조사에 의하면 진압 과정에서 군인과 경찰에 의해 약 1만 명의 무고한 지역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유가족들은 '부모·형제가 빨갱이여서 죽은 게 아니라 죽은 뒤에 빨갱이가 됐다'고 호소하고 있다.

6.25 전쟁 기간 벌어진 대한민국의 대표적 학살을 꼽자면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이다. 국민보도연맹(아래 보도연맹)의 강령은 대한민국에 충성, 북한 괴뢰 정권 절대 반대, 공산주의 사상 배격이었다. 이승만 정부가 주도해 과거 좌익에 몸담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가입시켜 만든 단체다.

하지만 공무원들의 실적경쟁으로 대부분 좌익활동과 무관한 사람들이 반강제적으로 가입했다. 공무원과 경찰은 할당된 숫자를 채우기 위해 가입하면 고무신을 준다, 비료를 준다, 보리쌀을 준다고 회유해 가입시켰다.

정부는 보도연맹원들을 요시찰인으로 분류했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제일 먼저 끌어다 살해했다. 인민군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 어부나 농민 차림의 청년들은 우리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러냐고 하며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한 늙은이는 "영명하신 성주님 살려달라"고 소리쳐 울었다. 도시(부산)에서 끌려온 젊은이들은 "뭣 때문에 죽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죽는다고 했고, 이왕 죽는 몸이니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고 죽겠다고 했다. 이 말이 떨어지자, 총은 일제히 불을 뿜었다. 마구 쏘는 총성 속에 거꾸러지며 발악하는 아우성, 대한민국 만세 소리가 처절히 들려왔다. …
- 보도연맹원 학살의 현장을 묘사한 <부산일보> 1960년 5월 30일 자 기사 중에서

학계에서는 보도연맹 사건으로 학살된 사람만 최소 6만 명에서 최대 2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은 형무소재소자 학살과 부역 혐의자에 대한 학살로 이어졌다.

이승만을 가리키는 수많은 증거들
 
2007년 7월 4일, 6.25 전쟁 당시 6사단 헌병대 일등상사였던 김만식씨가 보도연맹원 사살이 대통령 훈령에 의한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2007년 7월 4일, 6.25 전쟁 당시 6사단 헌병대 일등상사였던 김만식씨가 보도연맹원 사살이 대통령 훈령에 의한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2007년 박만순 당시 민간인학살진상규명충북대책위 운영위원장이 6.25 전쟁 때 6사단 이동경로 및 보도연맹원 처형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2007년 박만순 당시 민간인학살진상규명충북대책위 운영위원장이 6.25 전쟁 때 6사단 이동경로 및 보도연맹원 처형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당시 학살에 대한 책임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있다는 상식론에 앞서 이승만이 직접 학살을 지시했다는 증언과 기록도 이어지고 있다.

당시 보도연맹원 처형 과정에 직접 참여한 헌병대 초급간부(김만식, 증언 당시 84세)는 지난 2007년 기자회견을 통해 "1950년 6월 27일 무렵 헌병사령부를 통해 '대통령 특명'으로 분대장급 이상 지휘관은 명령에 불복하는 부대원을 사형시키고 남로당 계열이나 보도연맹 관계자들을 처형하라는 무전 지시를 직접 받았다"라고 밝혔다.

그는 또 "대통령 특명을 받은 다음 날인 28일 강원도 횡성을 시작으로 원주 등에서 많은 보도연맹원을 처형한 후 충북 충주(7월 5일)-진천(5일, 조리방죽)-음성(8일, 백마령고개)-청원(9일, 옥녀봉)-청원 오창창고(10일) 등에서 보도연맹 관련자를 처형하고 경북 영주(7월 중순)와 문경(7월 15~16일), 상주(7월 중순) 등으로 이동하며 처형을 계속했다"라고 증언했다.

그는 "보도연맹원으로 끌려가 죽은 사람 중에는 아주 순박하고 어진 평범한 시민과 농민들이 많았다"며 "하지만 명령에 따라 처형집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비슷한 시기 전국 곳곳에서 일제히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이 자행됐다. 6·25전쟁 직후 대전 골령골에서도 수천 명이 보도연맹원을 비롯해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재소자들이 군인과 경찰에 의해 집단 살해됐다. 당시 주한미군대사관 소속 육군 무관인 밥 에드워즈 중령은 대전 골령골 학살과 관련한 정보보고서(신뢰등급은 최고등급인 A-1)에서 "(...) 처형 명령은 의심할 여지 없이 최고위층(Top Level)에서 내려온 것"이라며 이승만 대통령을 지목했다.

이에 따라 정부 조직인 진실화해위원회는 전국의 보도연맹과 형무소재소자학살 사건에 대한 공식 조사보고서를 통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을 집단 살해한 것으로 명백한 범죄행위"라며 "사건의 최종 책임은 최고 결정권자인 대통령(이승만)과 국가에 귀속된다"고 밝혔다.

"유가족은 용서한 적 없다"
 
지난해 6월 27일 '대전산내학살사건 제73주기 제24차 피학살자 합동위령제'에서 유족대표 인사말을 하고 있는 전미경 대전산내골령골 피학살자유족회장.
 지난해 6월 27일 '대전산내학살사건 제73주기 제24차 피학살자 합동위령제'에서 유족대표 인사말을 하고 있는 전미경 대전산내골령골 피학살자유족회장.
ⓒ 오마이뉴스 장재완

관련사진보기

 
전미경 대전산내골령골 피학살자유족회장은 "유족들은 부모와 형제를 잃고서도 빨갱이 집안이라는 사회적 냉대와 손가락질, 경제적 핍박으로 교육을 받을 기회마저 빼앗기는 등 평범한 생활이 어려웠다"고 말했다. 전 유족회장의 아버지는 대전 골령골에서 살해됐다. 전 유족회장의 할머니는 경찰에 끌려가는 아들을 붙잡다 두들겨 맞아 일급 장애인이 됐다. 오빠는 우익단체 사람들에게 독살당했다. 연좌제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막냇삼촌은 세상을 한탄하다 스스로 세상과 등졌다. 할아버지는 거듭된 충격으로 끝내 정신을 놓았다.

전 유족회장은 "국가가 나서서 이승만이 무슨 짓을 했는지 죄상을 알리고 꾸짖어도 부족한 마당에 이승만 기념관을 세우고, 대통령까지 나서서 이승만을 영웅시할 수 있느냐"라고 반문했다.

정석희 태안유족회 회장은 "이승만의 공적이 많다 하더라도 결코 전국을 학살터로 만든 죄악을 상쇄할 수는 없다"라며 "유가족들은 이승만을 용서한 적 없고 국가 또한 피학살자와 유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태그:#이승만, #건국전쟁, #민간인학살
댓글26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