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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인문학을 결합한 미디어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제주는 오름의 섬인데 키아오라 바로 뒷산이 대수산봉이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기에 '수산봉수'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수산봉수 제주살이'는 제주학을 배경으로 제주인과 나의 일상에 사회적 발언을 실어 보내는 글이다.[기자말]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 있는 모녀상. 군경이 초토화작전을 벌이던 1949년 1월 6일 젖먹이 딸을 안고 피신하다가 토벌대의 총에 맞아 눈밭에서 희생된 봉개동 주민 변병생 모녀를 모티브로 조각됐다.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 있는 모녀상. 군경이 초토화작전을 벌이던 1949년 1월 6일 젖먹이 딸을 안고 피신하다가 토벌대의 총에 맞아 눈밭에서 희생된 봉개동 주민 변병생 모녀를 모티브로 조각됐다.
ⓒ 임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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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또 다른 원인 제공자 '언론'

'제주4.3'은 거칠게 요약하면, 불과 30정의 구식 총을 가진 300명의 무장대를 소탕하려다가 3만 명의 제주도민을 죽이는 '대학살'로 비화한 사건이다. 그 배경에는 해방 직후의 극심한 좌우대립, 제주도를 반공정책의 상징으로 삼아 본때를 보이려던 미군정의 강박감, 남한 단독 선거를 통해 정국 주도권을 쥐려던 이승만의 야욕과 실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거기에 일본 군경 출신 지휘부와 서북청년단이 주도하는 토벌대의 잔인무도한 초토화 작전과 무장대의 보복 살해가 복합 요인으로 상승작용을 했다.

그러나 2년 반 동안 4.3항쟁에 관한 책과 보고서 40여 권을 읽고, 당시 기사와 자료를 찾아보고, 진상규명을 위해 애쓴 취재기자와 유족 등을 인터뷰하면서 내린 결론은 '언론이 또 다른 핵심 원인 제공자였다'는 사실이다. 해방정국에서 주류 중앙언론은 진실보도는커녕 이념과 정파를 대변해 가짜뉴스를 조작해낸 혐의가 짙다. 전쟁의 첫 번째 희생자는 진실이었던 셈이다.

여운형 같은 중도·좌파는 물론 김구·김규식 같은 우익 세력마저 단독선거에 반대했기에 이승만과 보수파인 한민당 세력으로 구성된 국회에서 제주도민을 대변해줄 정치세력은 없었다.

언론마저 침묵하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대부분 도민은 목숨을 건지려고 한라산으로 대피했다가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에 몰리면서 대학살의 과녁이 되고 말았다. 제주도 산하에는 피가 뿌려지지 않은 곳이 없고 거의 전역이 공동묘지가 됐다. 대개는 이유를 묻지 않고 죽였고 이유 없이 죽었다. 이유가 있다면 그저 증오심과 보복심 그리고 무지의 소산이었다. 사적 보복을 막아야 할 공권력이 오히려 보복을 부추기고 집행했다.

운명처럼 빠져든 4.3 진실 보도

이번 취재에 특히 많은 도움은 준 이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4.3위원회) 양조훈(76) 위원과 제주4.3평화재단 김종민(63) 이사장이다. 양 위원은 1988년 <제주신문>이 4.3특별취재반을 구성할 때 반장이었고 김 이사장은 7개월 된 신입기자였으나, 둘 다 운명처럼 뛰어든 4.3 관련 진실 보도를 계기로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 등에 36년 반평생을 바쳤다.

1989년 4월 3일에 맞춰 <제주신문>에 첫 기사를 선보인 연재기사 '4.3의 증언'은 57회를 내보낸 뒤 '제주신문 사태'를 겪으면서 중단됐다. 전두환 세력의 지원을 받은 경영주가 언론 민주화 운동을 추진하던 기자들과 갈등이 심해지자 폐업을 해버린 것이다. 해직기자들은 도민주 공모로 1990년 6월 2일 <제민일보>를 만들어 창간호부터 '4.3은 말한다'로 제목을 바꿔 연재를 재개했다.
 
1989년 4월 3일 <제주신문>에 첫 기사를 내보낸 연재기사 ‘4.3의 증언’(왼쪽)이 당국의 압력 등으로 중단되자, 기자들은 1990년 6월 2일 <제민일보>를 창간해 ‘4.3은 말한다’(오른쪽)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재개했다.
 1989년 4월 3일 <제주신문>에 첫 기사를 내보낸 연재기사 ‘4.3의 증언’(왼쪽)이 당국의 압력 등으로 중단되자, 기자들은 1990년 6월 2일 <제민일보>를 창간해 ‘4.3은 말한다’(오른쪽)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재개했다.
ⓒ 제주신문, 제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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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자들 속속 작고해 4.3 진실 묻힐 뻔

10년간 총 456회를 연재했는데 채록한 증언자만 6000명을 넘어섰고 입수한 자료는 2000종에 이르렀다. 지금 증언자들은 대부분 작고해 <제민일보> 취재반의 노고가 없었더라면 4.3의 진실은 상당 부분 영원히 묻힐 뻔했다.   

기자들은 연재 기사를 보완해 <4.3은 말한다>라는 5권의 책을 펴냈고 일본어판도 발간됐다. 이 책에는 다른 언론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대목에서 언론사 이름을 밝히지 않는 데가 있고, 양조훈 위원이 '숨은 이야기'를 털어놓은 책 <4.3 그 진실을 찾아서>에도 그런 부분이 있는데 인터뷰와 검색을 통해 알아냈다.
 
<제민일보>에 연재된 <4.3은 말한다>는 전예원에서 5권까지 발간했으나 출판사가 없어져 헌책도 구하기 힘들어졌고, 일본에서는 6권까지 발간됐다.
 <제민일보>에 연재된 <4.3은 말한다>는 전예원에서 5권까지 발간했으나 출판사가 없어져 헌책도 구하기 힘들어졌고, 일본에서는 6권까지 발간됐다.
ⓒ 양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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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건의 허위보도가 부추긴 초토화 작전

해변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마을을 거의 다 불태우고 수만 명 주민을 학살한 초토화작전도 언론 보도가 분위기를 조성했다. 강경 토벌작전의 지렛대가 된 것들이 ▲3.1시위와 4.3항쟁의 북한 또는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 ▲북한 또는 소련 선박 출현설 ▲오라리 방화 폭도 소행설인데 모두 허위보도였다.

1947년 3.1절 시위는 경찰이 발포함으로써 다음 해 4.3항쟁의 한 원인이 된 사건인데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이 군정청 출입기자단 회견에서 "북조선의 세력과 통모했다"고 단정하자 언론은 확인도 안 하고 대서특필했다. 수구세력은 3.1시위와 4.3항쟁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이들마저 용공혐의를 씌웠기에 4.3의 피해자들은 기나긴 침묵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북한 또는 남로당 지령설은 학계에서 근거 없는 낭설로 정리됐다.  

그러나 한번 뿌리 내린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은 쉽게 뽑히지 않았다. 특히 '남로당 지하총책'이었다는 박갑동의 저서 <박헌영>에는 저자의 경력 때문에 상당한 무게가 실렸다. <4.3은 말한다> 2권은 그 저서가 '1973년부터 모 중앙일간지에 연재됐던 내용을 1983년에 출간한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여기서 모 중앙일간지는 <중앙일보>다. 박갑동씨는 일본 도쿄까지 찾아간 <제민일보> 김종민 기자에게 "문제의 부분들은 신문 연재 당시 정보기관에서 개입해 고쳐 쓴 것이며 자신의 의도와는 전연 다르게 표현됐다"고 시인했다.

고비마다 북한·소련 괴선박 출현

1948년 10월에 터져 나온 북한 또는 소련 선박 출현설은 미6사단 정보보고서가 선박의 국적을 확인하지 못했다면서도 '붉은 바탕에 별 하나가 그려진 깃발'을 언급함으로써 시작됐다.

<동아일보>는 10월 13일 김성삼 해군참모총장의 말을 인용해 제주도 근해에서 '잠수함이 출몰했으나 국적은 자세하지 않다'고 보도했다. 다음 날 보도에서는 '붉은 바탕에 별 하나가 그려진 깃발'이 '인민공화국기'로 변해 있었다.
 
초토화한 중산간마을인 서귀포시 중문리 섯단마을의 허물어진 벽체 안에 자란 거대한 삼나무가 세월의 흐름을 말해준다.
 초토화한 중산간마을인 서귀포시 중문리 섯단마을의 허물어진 벽체 안에 자란 거대한 삼나무가 세월의 흐름을 말해준다.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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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초토화작전이 마무리돼 가던 1949년 4월에 가서야 괴선박 출현설을 확인 정정하는 보고를 했다. '일부에서는 게릴라들이 본토로부터 또는 북한으로부터 병참지원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있으나 아무런 증거가 없다'고 부인한 것이다.

미 국무부 정보조사국 대외문제 분석관이었던 존 메릴은 나중에 '제주도 반란'을 주제로 하버드대 석사 논문을 썼는데, 그는 <제민일보> 4.3취재반 인터뷰에서 "4.3 발발의 남로당 지령설은 물론 소련 잠수함 출현설도 근거가 없다"라고 단언했다.

평화협상 무산시킨 오라리 방화의 주범은?

'오라리 방화 폭도 소행설'은 1948년 김익렬 9연대장과 김달삼 무장대장 간의 4.28평화협상 합의를 사흘만에 깨는 결정타가 됐다. 대참사를 피하는 마지막 기회였던 합의사항은 ▲전투를 중지하되 5일 이후 전투는 배신행위로 보고 ▲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며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는 거였다.

기이한 점은 오라리 방화사건 현장을 미군 촬영반이 공중과 지상에서 입체적으로 촬영한 사실이다.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on Cheju-do)'란 제목이 붙여진 이 기록영화는 오라리 방화가 폭도에 의해 자행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폭도에 의한 기습방화인데도 입체 촬영이 가능했던 것은 우연에 우연이 겹친 덕분일까?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동아일보>는 폭도 소행으로 단정

그러나 <동아일보>는 제주에 정준수 특파원을 보내 5월 7일부터 사흘간 '제주도폭동 현지답사'를 연재하며 오라리 방화를 폭도의 소행으로 단정했다. 그는 5월 1일 노동자의 날에 제주도에서는 노동자·농민의 집을 불살라버리고 노동자를 학살했다고 보도한다.

그는 제1구청장(제주경찰서장)이 군용트럭에 편승하려는 자신에게 권총을 주며 '만일을 위하여'라는 친절을 보여줬다고 썼다. 그는 '폭도배'와 벌인 교전상황을 자세히 전했는데, 이는 전형적인 '임베디드(embeded) 취재'에 해당한다. 특히 전쟁보도에서 아군부대로부터 편의를 제공받거나 군인들과 숙식을 함께하면서 하는 보도는 객관성을 유지하기 힘들어 BBC 같은 데서는 금지한다.

<제민일보> 취재반은 피해 주민들 증언을 통해 오라리 방화자 중 한 명이 우익인 대청단원 박아무개임을 밝혀내고 수소문 끝에 제주시내에서 그를 찾아냈다. 그는 목격자들이 대질증언이라도 응하겠다는 소식을 전하자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면 그렇게 했다고 합시다"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방화 직후 김익렬 9연대장의 지시로 검거됐으나 후임 박진경 연대장에 의해 석방되고 나중에는 경찰로 채용된다.

'공산폭동'의 허구성 폭로

취재반장이었던 양조훈 위원은 "취재반의 가장 큰 특종이 뭐냐"는 질문에 "넘어야 할 가장 큰 벽은 '공산폭동'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취재반이 오라리 방화사건의 범인과 박갑동의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이 조작됐다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공산폭동'이란 말의 허구성을 폭로할 수 있었다"고 했다.
 
<제민일보> 4.3취재반장이던 양조훈 씨가 3월 29일 자택에서 자료 등을 보여주며 설명을 하고 있다.
 <제민일보> 4.3취재반장이던 양조훈 씨가 3월 29일 자택에서 자료 등을 보여주며 설명을 하고 있다.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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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중앙언론이 군경의 발표나 '흘리는 정보'에 의존하는 보도는 4.3항쟁 내내 반복된다. 경무부 공안국장이면서 제주비상경비사령관이던 김정호는 경무부 기자실에 들러 이런 발언을 하는데 <동아일보>는 이를 그대로 보도한다.

'반도를 체포하여다 문초하여 보면 대개 백정들로, 좌익계열에서는 일부러 잔악한 살인을 감행하기 위하여 남조선 각지로부터 백정을 모집하여다 제일선에서 경찰관과 그 가족, 선거위원들을 살해하는 도구로 쓰고 있는 형편이며~'

같은 무렵 <조선일보>가 보도한 제주 출신 경무부 공보실장 김대봉의 상황보고는 전혀 다르다.

'이번 폭동에 팔로군이 참가하였다느니 기관총을 가지고 있느니 하는 풍설이 있었으나 그것은 전연 낭설이고 폭도들은 주로 제주도민이고 그 수효는 약 300~400명으로 추측된다.'

1946년 5월 미 24군단 주간정보보고서의 분류표에 따라 주요 신문의 성향을 간추려보면 ▲극우신문=동아일보 ▲우익신문=조선일보 ▲중도신문=중외신보 ▲좌익신문=서울신문 ▲극좌신문=해방일보 등이다.  

신탁통치 찬반 오보의 파장  

이에 앞서 해방 전후 이념 대립이 극심해지는 계기가 된 신탁통치 찬반 논쟁에서도 <동아일보>의 오보는 결정적 구실을 했다. 처음에는 신탁통치를 미국이 원하고 소련이 반대했는데, 거꾸로 보도한 것이다. AP통신의 오보가 빌미가 됐고 다른 우익·중도 신문들도 받아썼으나 <동아일보>는 한국민의 반소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4.3은 말한다> 1권 139쪽에는 "한민당과 가까운 한 신문은 12월 28일자에 신탁통치설을 '민족적 모독'이라고 규정하고 '소련에 경고'한다는 표현까지 담은 사설을 싣고 있다"는 내용의 논문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 한민당과 가까운 신문은 <동아일보>다. 그 정당과 신문사는 김성수와 송진우 등이 조직하고 설립했다.

서북청년단이 접수한 '유일한 제주도 신문'

주류 중앙언론의 이런 보도 태도와 달리 4.3 당시 제주도에 하나밖에 없던 <제주신보>는 4.3 이전부터 제주의 민심이 들끓게 된 요인들을 가감없이 보도했다. 경찰의 대형 비리인 '복시환 사건'과 3.1시위 발포와 잇따른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을 파헤쳤다.

그러나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제주에 온 서북청년단원들은 <제주신보>의 편집국장을 처형하고 신문사 건물까지 빼앗았다. 서북청년단장 김재능은 스스로 <제주신보>의 사장이 됐다. <서울신문> 지사장과 <경향신문> 지사장도 토벌대에 처형당했다. 견제할 권력도 보도할 언론도 없었기에 그들의 횡포는 날로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고립무원에 빠진 제주민들이 향한 곳

서북청년단원들로 편성된 특별중대는 손녀의 겁탈을 막으려는 할머니를 총살하는가 하면 남녀를 구타하며 성교를 강요하고 여자의 국부를 불로 지지기도 했다. 초토화작전이 시작되자 주민들은 살려고 산에 오르거나 동굴에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제주 서쪽 중산간마을 동광리에 살던 홍춘호(87)씨는 당시 11살 소녀였는데 가족 모두 무등이왓으로 올라가 '크고 넓은 동굴'을 뜻하는 '큰넓궤'에 숨었다. 햇빛 한 줄기 안 들어오는 굴에서 50일쯤을 버텼으나 두 동생은 발각되기 전에 굶어 죽었다.
 
홍춘호 씨가 무등이왓 큰넓궤 앞에서 한미리스쿨 4.3취재진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큰넓궤는 길이가 180미터 정도 되는 크고 넓은 동굴인데 입구는 아이도 기어들어가야 할 만큼 비좁아 한동안 발각되지 않았다.
 홍춘호 씨가 무등이왓 큰넓궤 앞에서 한미리스쿨 4.3취재진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큰넓궤는 길이가 180미터 정도 되는 크고 넓은 동굴인데 입구는 아이도 기어들어가야 할 만큼 비좁아 한동안 발각되지 않았다.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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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에는 제주시 구좌읍 중산간에 있는 다랑쉬굴에서 4.3 희생자 유해 11구가 발견돼 충격을 던졌다. <제민일보>는 토벌에 참여했던 사람을 찾아내 당시 상황을 전했다. 토벌대가 굴 안으로 수류탄을 던졌는데도 주민들이 나오지 않자 입구 쪽에 불을 피운 뒤 구멍을 막아 질식사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근거없이 '남로당 아지트로 추정된다'는 태도를 보였고, <한라일보>는 '다랑쉬굴은 남로당 유격대 아지트였다'는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유해도 석연치 않은 이유로 화장한 뒤 바다에 뿌려졌다.
 
<제민일보> 취재반의 김종민 기자(맨 왼쪽)와 양조훈 반장(왼쪽에서 네 번째) 등이 다랑쉬굴 안에서 발견된 유해를 살펴보고 있다.
 <제민일보> 취재반의 김종민 기자(맨 왼쪽)와 양조훈 반장(왼쪽에서 네 번째) 등이 다랑쉬굴 안에서 발견된 유해를 살펴보고 있다.
ⓒ 제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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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에 바친 36년 반평생

<제민일보> 4.3취재반의 양조훈 반장과 김종민 기자는 언론인으로서 4.3의 진실을 밝히는 주역이었을 뿐 아니라 신문사를 그만둔 뒤에도 진상보고서 작성과 특별법 제정 등에 앞장서는 등 4.3에 평생을 바쳤다. 4.3평화공원과 전시장의 수많은 안내문도 두 사람이 거의 다 썼다.

양조훈 반장은 <제민일보>에서 해직당한 뒤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특별법 제정에 앞장섰고 4.3위원회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작성의 실무 책임을 졌다.

4.3취재반의 핵심이었던 김종민 기자는 지난 3월 11일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재단 홈페이지에 소개된 12개 경력 중 11개에 '4.3'이 들어갈 정도로 36년간 4.3 취재와 연구에만 몰입해 '4.3전문기자'로 불린다.
 
김종민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이 3월 29일 집무실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김종민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이 3월 29일 집무실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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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특별취재반은 '4.3은 말한다' 장기 연재로 1993년에 한국기자상을 받는 등 영예도 누렸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씨에게 소송을 당하는 등 엄청난 고초를 겪어야 했다. 취재반이 가장 큰 특종으로 여긴 게 대량살상극의 법적 근거처럼 여겨졌던 계엄령의 불법성을 밝힌 건데 소송에 걸린 것이다. 김종민 기자는 직접 변론문을 쓰는 등 갖은 고생 끝에 승소했다. 그는 연재기사 제목을 '4.3은 말한다'로 단 것은 문학평론가이기도 했던 송상일 편집국장의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언론의 연재물 제목들은 전부 명사의 결합으로 돼 있었는데, 편집국장님이 '4.3'이 주어가 되어 '말한다'는 제목을 달았어요. 우리도 진실을 모르지 않냐? 우리가 밝혀내는 실체적 진실이 말하게 하자는 거였죠."

제주4.3 폄훼 처벌조항 시급

김종민 이사장은 제주4.3을 왜곡하고 희생자를 폄훼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조항을 특별법에 신설하는 과제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서북정년단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조직이 제주4.3을 폄훼하는 현수막을 내거는 등 극우세력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보니 젊은이들인데 자기 돈 대서 왔을 리는 만무하고 저는 배후가 있다고 봅니다. 아! 정말, 청년들한테 4.3 때 서청이 어떤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하고 그러는지 묻고 싶어요. 그때 플래카드를 떼어내지 못한 이유가 정당법과 옥외광고물에 관한 법률로 보호받기 때문인데 그걸 배제하는 조항을 신설해야 합니다." 

태그:#제주, #동아일보, #언론의책임, #한미리스쿨, #키아오라리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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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제주 키아오라리조트 공동대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 원장, MBC저널리즘스쿨 교수(초대 디렉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글쓴이는 조선일보 기자, 한겨레 경제부장,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초대원장(2008~2019), 한겨레/경향 시민편집인/칼럼니스트, KBS 미디어포커스/저널리즘토크쇼J 자문위원, 연합뉴스수용자권익위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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