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21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3가 노가리 골목에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도로에 빼곡히 들어찬 탁자와 의자 사이사이로 손님들에게 노가리와 맥주를 팔던 이른바 야장 영업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지난 21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3가 노가리 골목에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도로에 빼곡히 들어찬 탁자와 의자 사이사이로 손님들에게 노가리와 맥주를 팔던 이른바 야장 영업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 복건우

관련사진보기

 
"뒤에도 재개발, 옆에도 재개발. 여긴 3~4년 안에 완전히 없어질 거야."

서울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서 '에이스호프'를 운영하는 이현동(55)씨가 손님들을 응대하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하철 2호선 을지로 3가역 일대의 노가리 골목은 지난 2015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야장 영업이 특별 허가되는 등 '힙지로(힙한 을지로)'를 대표하는 명물이었다.

코로나 기간에도 어렵사리 버티면서 장사를 이어왔지만, 그는 이제 곧 골목이 사라질 거란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다. 지난 2022년부터 을지로 일대 재개발이 본격화하면서 당초 허용됐던 야장 영업(영업장 이외의 장소에서 하는 영업, 이른바 야외 테이블)이 금지되고 '차 없는 거리'가 해제되면서 발길이 급격히 줄었다.

"북적북적하니 '핫한' 골목이었는데 썰렁하니 다 죽었어. 매일매일 야장 단속 나오고. 주말이나 평일이나 똑같아. 재개발 때문에 뮌헨(호프)이랑 초원(호프)도 길 건너편으로 옮겨갔어. 그사이 임대료는 20퍼센트나 올랐는데 이젠 내 월급도 못 가져가고 죽을 맛이야."

"노가리 골목 망한 것 같아요"
   
노란색으로 칠한 부분이 을지로 일대 노가리 골목. 위아래로 재개발 구역을 면하고 있어 골목 상당 부분이 재개발 여파를 피할 수 없게 됐다.
 노란색으로 칠한 부분이 을지로 일대 노가리 골목. 위아래로 재개발 구역을 면하고 있어 골목 상당 부분이 재개발 여파를 피할 수 없게 됐다.
ⓒ 서울중구청

관련사진보기

    
지금 노가리 골목 인근에 진행 중인 재개발 사업만 2개다. 청계천 쪽에서는 수표구역 도시정비형 재개발 사업이 지난 2022년 시작돼 올해 12월 완공을 앞두고 있다. 을지로3가구역 제12지구 업무시설 신축공사도 작년 9월 시작돼 오는 2026년 9월까지 계속된다. 노가리 골목 상당 부분도 이 재개발 구역을 접하고 있다.

게다가 수표구역 재개발로 청계천·을지로 공구거리 상인들의 임시영업장이 노가리 골목 인근에 마련됐다. 재개발 공사에다 임시 영업장용 컨테이너 가건물까지 더해져 노가리 골목 분위기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지난 21일과 22일 오후 6시 30분께 찾은 서울 중구 을지로3가 노가리 골목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노포 맥줏집이 아닌 재개발 공사 현장(연면적 약 4400㎡)이었다. 철제 가림막으로 둘러싸인 공사장 위로 '을지로3가구역 제12지구 업무시설 신축공사' 안내판이 붙었다.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수표구역 재개발로 옮겨온 청계천·을지로 공구거리 상인들이 임시영업장으로 쓰는 회색 컨테이너 가건물이 모여 있었다. 손님들 사이로 공구 지게차와 손수레가 지나갈 뿐 골목은 대부분 비어 있었다. 
 
지난 21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3가 노가리 골목 왼편에 '을지로3가구역 제12지구 업무시설 신축공사' 현장이 철제 가림막으로 둘러싸여 있다.
 지난 21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3가 노가리 골목 왼편에 '을지로3가구역 제12지구 업무시설 신축공사' 현장이 철제 가림막으로 둘러싸여 있다.
ⓒ 복건우

관련사진보기

   
'불법 영업' 돼버린 '서울미래유산'

중구청은 지난 2017년 5월 노가리 골목을 관광명소로 발전시키고 문화유산으로 보존하기 위해 도로점용 허가를 내주는 등 당시 17개 호프집에 옥외영업을 허용했다. 하지만 을지로 일대 도시정비형 재개발 등 '안전상의 이유'로 2022년 11월 옥외영업 도로점용 허가를 취소했다. 이후 중구청 건설관리과는 야외 탁자를 강제 수거하거나 과태료를 부과하고 있다. 상인들은 하루에 두번씩 중구청이 단속을 나온다고 했다.

매일 밤 8시부터 11시까지 운영되던 차 없는 거리도 2023년 7월 해제됐다. 중구청 교통행정과 관계자는 지난 22일 통화에서 "노가리 골목과 면해 있는 곳에 도시정비 재개발 사업을 진행하면서 상가들이 많이 사라지기도 했고, 공사를 위해 차량 출입이 필요해지는 등 도로의 성격도 바뀌면서 차 없는 거리도 같이 해제됐다"라고 설명했다.

노가리 골목에서 10년째 '명동골뱅이'를 운영한 지영민(47)씨는 "재개발로 통행에 방해가 된다며 단속을 심하게 하니까 골목 자체가 싹 죽어버렸다. 노가리 골목에 오던 손님들이 이제 익선동과 낙원동 쪽으로 많이 옮겨 갔다"며 "재개발 끝나고 나중에 골목을 되살린다고 해도 손님들이 다시 온다는 보장이 없다"라고 했다. 대화 도중에도 그는 "야장 되나요", "밖에서 먹고 싶은데 테이블 하나 깔아주세요"라며 찾아온 손님들을 모두 돌려보내면서 "안 돼요. 죄송해요"라며 답답해했다.

노가리 골목이 다양성을 잃은 것도 영향을 미쳤다. 2년 전인 2022년 4월 21일 노가리 골목의 시초라 불리는 을지오비베어가 강제 철거됐다. 철거 전 또 다른 맥줏집 '만선호프'의 사장이 을지오비베어 건물 지분 대부분을 매입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큰 논란을 낳았다. 이후 만선호프는 무서운 기세로 매장을 늘려갔다. 기자가 직접 확인했더니, 맥줏집 14곳 가운데 7곳에 '만선'이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원조 만선호프', '만선호프 IV', '만선 스카이라운지' 등이다.

시민들도 후한 점수를 주지 않았다. 경북 구미에서 올라왔다는 신화영(28)씨는 "을지로에 노가리 골목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 상권이 다 죽은 느낌"이라며 "예전엔 비좁게 지나다닐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이젠 아무것도 없고 흥이 나지 않아 다른 곳에 가려고 한다. 골목이 다 망한 것 같다. 만선호프밖에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임아무개(30)·한아무개(30)씨는 "옛날엔 도로에 테이블이 서너 줄씩 깔려 있었고 맥줏집도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만선호프가 다른 가게들을 다 먹어버렸다"라며 "야장 영업이 다 막혀버리고 일대가 공사장처럼 변해서 사람들이 더는 안 오겠구나 싶다"라고 말했다.

노가리 골목의 주인은 누구?
 
지난 22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3가 노가리 골목에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도로에 빼곡히 들어찬 탁자와 의자 사이사이로 손님들에게 노가리와 맥주를 팔던 이른바 야장 영업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지난 22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3가 노가리 골목에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도로에 빼곡히 들어찬 탁자와 의자 사이사이로 손님들에게 노가리와 맥주를 팔던 이른바 야장 영업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 복건우

관련사진보기

 

관계자들은 골목상권 독점과 재개발이 긴밀하게 연관돼있다고 봤다. 이종건 을지오비베어 공동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은 "중구청이 도로점용 허가를 취소하고 차 없는 거리를 해제한 건 재개발로 인한 안전상의 이유뿐만 아니라 만선호프의 독점으로 골목 문화가 보호되지 못하는 상태에서 차량 출입을 제한할 이유가 더는 없기 때문일 것"이라고 진단했다.

을지로 재개발 반대 운동을 진행 중인 안근철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활동가는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 재개발 계획이 구체화되고 시행 인가가 떨어지기까지 속도가 날 수 있었던 데에는 '힙지로'에 사람들이 많이 오고 장사가 잘 된다는 입지적인 측면이 분명 존재했을 것"이라며 "만선호프 역시 부동산 차익을 염두에 두고 건물을 매입해 가게를 확장 운영했을 텐데 이러한 맥락들이 재개발 추진 전부터 이미 깔려 있었다"라고 덧붙였다.

익명을 요청한 만선호프 전 대표는 24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만선호프가 많아지면서 주변 가게 임대료가 올랐다는 건 옛날 얘기이고 임대료는 물가 상승에 따라 전체적으로 올라간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 "(야외 탁자와 의자는) 몇 안 되더라도 도로가 아닌 개인 땅(사유지)에 합의 하에 깔고 있다"라며 "만선호프가 가게를 확장한 것이 아니라 가게를 하려는 사람들이 다 체인점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골목 상권 악화로 만선호프도 매출이 급격히 줄면서 체인점 세 곳이 없어졌다고 전했다. '만선호프로 골목의 다양성이 훼손된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마음대로 생각하시라"고 답하면서도 "몸이 안 좋아지고 만선호프도 줄어들었기 때문에 인수인계해서 다 개인이 하는 체인점으로 넘겼다"라고 전했다.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연구하는 구본기 생활경제연구소장은 "결국 소유권을 가지지 못하는 세입자(임차상인)들이 내쫓기는 상황이다 보니 을지오비베어 같은 문화적 상징성이 상당한 곳도 재개발로 속수무책으로 밀려나게 되면서 어떠한 권리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공간 자체를 보존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재개발로 상인들이 목을 옮겨갈 때 장사를 지속할 수 없거나 더 비싼 세를 내야 하는 등 생계가 추락하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수평적인 이주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라고 했다. 또 "문화적 차원으로는 소유권만이 아니라 다각도에서 노가리 골목의 주인이 누구인지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위원회가 있어야 한다. 골목 생활권 내 세입자와 소비자 등 이곳의 역사에 지분이 있는 사람들의 참여권 역시 보장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태그:#노가리골목, #을지로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꼼꼼하게 보고 듣고 쓰겠습니다. 오마이뉴스 복건우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